138화
"하하- 이것 봐라?
귀족과 평민을 가르는 신분의 벽을 부수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데이비드와 뉴렌달 경비대가 가져온 자료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 말에 데이비드의 표정은 심각할 정도로 굳어져 있었다.
"데이비드. 평민 학생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너와 귀족 학생들은 그동안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던 거야?"
"죄,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야."
만약 사과해야 한다면 데이비드가 아닌 대학장인 발더나 아렌달의 수석행정관인 리오가 해야 하는 게 더 맞는 일이었고, 따지고 보면 그들 역시 사과를 할 필요는 없었다.
아직 아렌달에는 아무런 피해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주동자는 졸업을 앞둔 평민 대학생들인가?"
"그, 그렇습니다. 조직의 이름은 붉은 바람이라고 합니다.
붉은 바람의 핵심 인물은 노아를 비롯해 안톤과 로자, 그리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주동자들의 이름을 대는 데이비드에 나는 손을 저었다.
"됐어. 데이비드는 이만 돌아가도 좋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지금의 이야기가 밖으로 돌지 않게 조용히 있는 것 잊지 말고."
"아, 알겠습니다."
데이비드가 입을 꾹 다문 채 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헤돈이 입을 열었다.
"데우스님. 이건 반역입니다.
당장 군을 동원해 주동자들을 잡아들이겠습니다."
헤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데이비드의 발언에서부터 굳어 있던 리오가 반역이라는 단어에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신분의 벽을 부수겠다는 말은 귀족인 데우스님을 몰아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렌달의 백성이 주인이신 데우스님을 몰아내겠다니… 그런 불온한 사상을 가진 이들을 당장 잡아들여야 합니다."
"백성들이 불온한 사상에 영향을 받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반역자들이 아렌달을 혼란으로 이끌 것입니다."
"귀족을 향한 그들의 적의가 귀족 가문에 알려지게 되면 아렌달은 분열하게 될 겁니다.
귀족들은 평민을 적대하게 될 것이고, 과거 왕국 시절과 같이 평민들을 탄압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백성들이 분열하게 되면 아렌달 경제에도 악영향이 될 겁니다.
특히 귀족 가문과 거래하는 상단이나 자영업자들, 장인들이 엄청난 피해를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군사와 경제 분야의 관리자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나섰다.
대학생들을 반역자로 몰아세우며, 당장 그들을 잡아들여서 혼란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들에 리오는 허탈하게 웃던 것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리오도 뭔가 말 좀 해 보지?"
내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던 리오가 고개를 내리고 나를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들을 잘못 키웠습니다.
제 손으로 아렌달의 반역자 놈을 만들었습니다."
리오의 말에 헤돈을 비롯한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의 침묵에 리오는 눈을 꾹 감은 채 내게 말했다.
"당장 반역자들을 잡아들이셔야 합니다.
아렌달을 위해… 아렌달을 무너트리려는 불온 세력을 제거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반역의 죄를 물어 반역자들과 그 일가를 모두 잡아들이셔야 합니다.
데우스님과 아렌달에 뜻에 반하는 세력은 모두…"
그리고 리오는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박았다.
과거 영지민들이 영주 앞에 조아리듯이 땅을 머리에 찢으며 소리쳤다.
-쿵
"반역자 노아와 그 일당을 제거하셔야 합니다!
아렌달을 위해! 아렌달의 미래에 반역자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흰머리가 더 많아진 아렌달의 수석행정관이 아렌달을 위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그만 일어나지."
"데우스님!"
내 명령에도 리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세계의 기준에서 노아와 학생들은 틀림없는 반역자들이다.
그런데 왜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대학생들이 만든 이 조직이 재미있다.
신분의 벽을 부수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든다니…
거기에 붉은색의 징표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지극히 현대적인 사상과 행동에 흥분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이들, 붉은 바람에 피해를 본 사람들이나 단체가 있었던가?"
내 물음에 헤돈을 비롯한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딱히 이들로 인해 피해를 받은 분야는 없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아렌달을의 체제를 위협할지도 모를 사회주의자들을 그냥 둘 수는 없겠지.'
아무리 지금까지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고 해도 아렌달의 체제에 반하는 사상임에는 틀림이 없었기에 이들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헤돈."
"네!"
"군과 경비대를 이끌고 붉은 바람에 속한 대학생들을 구속하도록.
발더의 도움을 받으면 대학을 뒤지기에 도움이 될 거야.
필요하다면 마탑의 지원도 받고."
"알겠습니다!"
헤돈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몇몇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는 소란에도 리오는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한숨을 쉬며 리오에게 말했다.
"그만 일어나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생각이야?"
"……"
내 물음에도 리오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 모습에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땅바닥에 찧은 머리가 붉게 물든 리오의 모습에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집에도 빨리빨리 들어가고 그러지 그랬나?
그랬다면 노아가 이런 사상에 빠지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
내 말에 리오의 굳어 있던 얼굴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제가 아들 녀석을 붙잡아 가르쳤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 나처럼 아이들 교육에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지. 쯧쯧-"
혀를 차는 내 모습에 리오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들의 교육은 샤를로트님께서 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그럼 데우스님도 저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요?"
"무슨 소리야. 내가 애들 교육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데?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데."
내 말에 고개를 젓는 리오를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 조금 정신을 차린 것 같네.
정신 차렸으면 가서 일합시다. 수석행정관."
"예? 이 상황에서 저보고 가서 일하라고요?
제 아들이 반역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가서 일을 하라고요? 진심이십니까?"
"아직 반역을 일으킨 것은 아니잖아?"
내 말에 리오의 눈동자가 떨렸다.
내 의중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노아가 진짜 반역자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내리면 되는 일이지.
그러니까 진짜 반역자로 밝혀지기 전까지 리오는 가서 일하라고.
리오보다 나은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수석행정관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겠다면서?"
"…데우스님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죽을 때까지 데우스님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칭찬으로 듣지."
웃으며 대답하는 나에게 리오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렌달의 군사들이 처음으로 아렌달 내부를 뒤집기 시작했다.
붉은 바람에 속한 대학생들이 학장의 지시로 대학에 묶여 있던 동안 아렌달 군과 경비대는 대학을 봉쇄하고 그 안에 남아 있던 노아와 동지들을 구속했다.
"이것 놔라! 우리가 무엇을 했다고 구속하는 것이냐!"
"너희 병사들도 평민이지 않느냐!
귀족이 아닌 평민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일이다!"
학생들은 스스로 만든 조잡한 도구를 들어 저항했지만, 정규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대항할 수는 없었다.
붉은 두건을 쓴 채 구속되어 끌려 나오는 붉은 바람의 동지들을 보며 학생들은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많은 기회를 주었음에도 무엇이 불만이어서 저런 짓을 한 거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네."
"일단 대학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혜택을 받고 자랐다는 증거잖아?
그런데도 아렌달에 불만이 있다는 것은 욕심 아닌가? 욕심도 정도껏 부렸어야지. 쯧쯧-"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붉은 바람의 동지들은 허탈하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자신들의 뜻과 이상은 틀린 것이 아니었지만, 그 뜻과 이상을 펼치기에 아렌달은 좋은 배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평민들마저 우리의 뜻보다 지금의 아렌달을 지지하고 있었으니, 처음부터 실패할 사상이었다.
아렌달은 처음부터 우리의 뜻을 펼치는 것이 불가능한 곳이었어."
붉은 두건을 쓴 채 끌려오는 붉은 바람의 동지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 웃음소리에 끌려오던 학생들이 한숨을 쉬는 것이 보였다.
"큼- 하필이면 빨간색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그 모습에 나는 웃음을 지우고 말했다.
"너희가 붉은 바람이군."
"……"
침묵으로 저항하는 학생들을 보며 말했다.
"정말 귀족과 평민을 가르는 신분의 벽을 부수면 정말 차별 없는 세상이 온다고 믿고 있는 건가?
그게 정말 더 나은 세상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거냐?"
내 말에 학생들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학생들보다 확실하게 신분의 벽을 부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까. 만약 내가 그들의 사상에 동조한다면 뜻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는 학생들의 모습이었다.
"그렇습니다. 데우스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귀족도 평민도 똑같은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신분이라는 벽이 서로를 갈라 차별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신분의 벽만 사라져도 평민들은 더 많은 기회를 얻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만들어질 겁니다."
노아의 말에 동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라… 아주 이상적인 사회겠구나."
"그, 그렇습니다! 더 나은 세상이…"
"그런데 모든 사람이 너희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네?"
내 말에 노아와 동지들은 놀라 입을 다물었다.
"너희는 사람의 욕심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어."
"그게 무슨…"
"사람은 절대 평등할 수 없다는 말이다.
모든 이가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면 통제와 억압이라는 시스템이 필요하거든.
마치 귀족들, 왕과 영주가 백성들의 생활을 통제하듯이 시스템이 사회를 통제하고 억압하지 않는 이상 모든 이가 평등할 수는 없는 법이야."
"……"
내 말에 노아와 동지들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설마 귀족을 없애서 신분이라는 벽을 허물고,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벽을 만들 생각은 아니지?"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아렌달은 욕심으로 발전해 왔으니까.
더 좋은 집을 가지고 싶다는 욕심.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욕심.
그 욕심을 통제하지 못하는 이상 너희가 바라는 이상적인 세상은 절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그 세상은 그저 신분의 벽을 허문다고 만들어지는 세상이 아니거든."
적어도 내 기억에 사회주의는 실패한 이념이었다.
사람의 욕심이 있는 한 이들이 바라는 유토피아는 절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뜻을 펼치려면 아렌달이 아닌 다른 곳에서 했어야지.
아렌달의 평민들은 너희의 이상에 조금도 동조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야."
내 말에 노아와 동지들의 눈빛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렌달의 평민들이 저희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것이란 걸 어떻게 아신 겁니까?"
"아렌달이 독립한 게 아직 10년도 되지 않았다.
아렌달에 살고 있는 평민들은 아직 왕국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다.
과연 그 시절을 기억하는 평민들이 지금 아렌달에 부당함을 느끼고 있을까?"
"……"
"백성들을 강제할 수 없는 너희가 뜻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아렌달의 백성들은 너희보다 권력자인 나를 더 지지하고 있지."
"……"
"이제 알겠어? 너희의 사상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