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아렌달 대학을 나온 인재들이 가장 원하는 직업은 단연 아렌달의 관리직이었다.
하지만 모든 학생이 아렌달의 관리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귀족 학생들은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한 일환으로 대학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서 대학을 꼭 졸업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사업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는 대학보다 가문에서 배우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 가문에서는 후계자들을 반드시 대학에 보내려고 했다.
귀족에게는 명분과 명예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리버 가문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일을 후계자 스티븐에게 맡긴다고 하네."
"아직 젊다고 들었는데. 벌써 새로운 사업의 관리자가 되는 건가?"
"잊었어? 리버 가문의 스티븐은 아렌달 대학을 나온 인재잖아.
소문으로는 최상위의 성적을 가지고 졸업했다고 하던데.
아렌달 대학을 최상위의 성적으로 졸업한 인재인데 나이와 경험이 무슨 상관이겠어?"
아렌달 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문의 사업을 이어받을 정당성을 얻었고, 그 스스로도 뛰어난 인재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문으로 뛰어난 인재를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폴. 졸업한 후에 아렌달의 관리가 될 생각이야?"
"아무래도 저는 성적이 떨어져서 쉽지는 않을 것 같을 것 같아요.
그냥 어디 유력한 상단에 투신한다면 굶지는 않겠죠."
"그렇다면 나를 따라 우리 가문으로 와라."
"네? 팔라스 가문에요?"
"그래. 졸업하면 아버지께서 내게 새로운 사업을 맡기신다고 하셨어.
그때 나를 도와줄 인재가 필요해.
너라면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 아니겠어?"
"저라도 도움이 된다면 팔라스 가문으로 가겠습니다."
가문을 위해 일해 줄 인재들을 포섭하는 모습은 과거 뛰어난 기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했던 그것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귀족으로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분이 아닌 능력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아렌달의 생각을 귀족들은 받아들인 것이다.
신분이 아닌 능력과 실력으로 기득권을 붙잡고 있으니, 그것을 시기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도 없었고, 가문의 명예도 쌓을 수 있었다.
과거와 달리 조금 불편함이 있기는 했어도,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으니 귀족 가문으로서도 변화를 쉽게 받아들였다.
"일부 평민 학생들은 아렌달의 관리자가 되기보다는 귀족 가문에 투신하고 싶어 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습니다."
"귀족 가문에 가게 되면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
"일부 학생들은 벌써부터 귀족 가문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귀족 가문의 지원을 받아서 쉽게 공부할 수 있으니 평민 학생들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기업의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니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이러다가 인재들을 귀족 가문에 다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그런가?"
"데우스님께서는 걱정되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렌달을 위해 일해야 할, 아렌달을 위해 키워 온 인재들이 아렌달보다 귀족 가문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귀족 가문이라고 해도 아렌달 안에 있는 거잖아?
어디 다른 왕국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물론, 이번에 들어온 왕국의 유학생들에게 포섭되어 다른 왕국으로 나가는 인재가 생길 수도 있지만…
"뭐- 어때? 아렌달 대학을 나온 인재들이 각 왕국에서도 활약해 준다면 대학이 명성 더 높아지지 않겠어?"
그리고 아렌달 대학에서 배웠다는 동질감으로 아렌달을 위해 더 나은 거래를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른바 학연을 이용한다면 아렌달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아렌달 대학을 졸업하는 사람 중 대부분은 아렌달에 남아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다른 왕국에서는 평민이 가지는 한계도 있고, 아렌달보다 좋은 조건을 줄 수 있을 만큼의 능력도 없잖아?"
"음-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어디 귀족님한테 밉보이기라도 했다간 언제 어디서 비명횡사할지도 모르니까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언젠가는 다른 왕국에서도 평민들의 지위가 높아질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영상 마법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아렌달 밖의 정보를 모으기에 더 수월해졌다.
아렌달 상단은 이제 동대륙은 물론이거니와 중앙대륙과 남대륙에도 손을 뻗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곳의 영상들을 담아 아렌달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제로스 왕자의 말처럼 타자트 왕국은 복식이 화려하네.
이런 패턴의 장식은 아렌달이나 동대륙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양식인 것 같아."
"화려한 것보다 맨살이 너무 많이 보이지 않습니까?
남대륙의 사람들이 옷을 얇게 입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건 조금 그렇군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슬쩍슬쩍 비치는 속살에 리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보였다.
"이런 화려한 패턴을 넣은 옷들은 브랜드에 사용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는데?
조금 더 고급스러운 장식과 같이 사용한다면 명품 패션으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제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눈길을 사로잡는 것 같은데, 이게 명품이 될 수 있을까요?"
"눈길을 사로잡아야 명품이지. 귀족들 특히 귀부인들이 명품을 사는 이유가 뭐겠어?
남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게 하기 위해서잖아."
"그, 그런가요? 제가 그쪽 분야는 잘…"
리오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사실 나도 패션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긴 나도 말로만 이렇게 말하지 아는 게 별로 없으니…
이건 리지에게 보여 줘서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해 보라고 해야지."
비전문가들이 떠들어 봐야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으니, 전문가에게 알아서 하라고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럼 다른 영상은…"
"중앙대륙의 그람 왕국을 찍어 온 영상이 있습니다."
그람 왕국이라면 아스타나 왕국이 침공한 왕국이었다.
지금 왕국들의 마법 무기 실험장이 되어 영토가 초토화되고 있는 불운한 왕국이기도 했다.
"그람 왕국의 영상은 확인해 봐야겠지."
영상으로 보이는 그람 왕국의 모습은 과연 전쟁 중인 왕국임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암울했다.
끝날 줄 모르는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의 표정은 어두웠고, 먹을 게 부족한지 앙상한 몰골을 한 병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전투가 벌어진 장소들은 마법 무기로 인한 상처들로 보기 불편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다른 왕국의 마법무기도 많은 발전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네. 이정도면 우리에게도 위협이 될 만한 무기겠어.
다른 영상도 있나?"
그람 왕국에서 보내진 다른 영상에서도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몇몇 부분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참혹한 모습도 있었기에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이만하면 충분히 확인한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왕국들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까지 올라왔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야겠네."
"아렌달 군에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렌달 상단뿐 아니라 왕국들의 정보를 물어 올 사람들을 더 만들어야겠어.
아렌달에서 신분을 보증한다고 하면 웬만한 왕국에서는 그들의 통행을 막지 않겠지."
"보따리상이나 음유시인 정도로 위장해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네."
아직 다른 왕국에서는 영상 마법이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모르는 만큼 정보 취득에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영상 마법이라는 게 이렇게나 대단한 활용성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저 멀리 떨어진 곳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그동안 모르던 세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상상도 못 해 본 일입니다."
"……"
"그리고 데우스님께서는 텔레비전을 자주 보지 않으셔서 모르시겠지만, 이것보다 쉽게 문화를 접하기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문화를 즐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합니까?
또 시간이 없어서 경기장이나 극장을 찾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공간이 부족해서 자리를 얻지 못하던 사람들에게도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아닙니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마법 기술이 아닐 수 없죠.
마법의 위대함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나에게는 영상 마법이 특별하지 않은 기술이었지만, 리오의 말대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는 대단한 기술이었다.
"그럼 마탑에 지원금을 더 보내 주는 게 어때?
마탑에 갈 때마다 연구비가 부족하다고 말하던데."
"네?! 지금 매달 연구비로 나가는 자금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부족하다니요!
마탑에 들어가는 돈을 조금만 아껴도 도시 하나가 뚝딱 만들어질 겁니다."
"뭐- 마법사들이야 항상 연구비가 부족하다잖아."
"그래도 안 됩니다."
방금 전까지 마법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아렌달 가문의 아가씨들에게는 한 가지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아리아는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아리스는 뭐든지 쉽게 만드는 손재주가 있었으며, 아리엘은 사람들의 눈길을 빨아들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언니가 만들어 줬어요. 예쁘죠?"
"그래. 예쁘구나."
내 칭찬에 꺄르르 웃으며 언니들에게 돌아가는 아리엘이었다.
그런 아리엘을 보며 나도 모르게 걱정이 되었다.
'지금도 이렇게 예쁜데 나중에는 앞으로 얼마나 예뻐질까?'
셋째 딸이 가장 예쁘다는 노래도 있지만, 정말 아리엘은 걱정이 될 정도로 예쁜 얼굴이었다.
"누구를 닮았길래 이렇게 예쁘게 태어난 걸까?"
"당연히 저를 닮았겠죠."
"……"
샤를로트의 말에 나는 샤를로트와 아리엘을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 반응은 뭐예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분명 샤를로트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아리엘의 외모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아리엘은 그냥 예쁜게 아니라 사람을 홀리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아리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어."
경국지색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내 말에 샤를로트는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게 무슨… 아직 어린 아이에요.
그리고 무슨 얼굴이 예쁘다는 이유로 전쟁이 일어나요?"
"아니야. 아리엘은 위험해."
"……"
샤를로트는 내 말고 고개를 젓고는 아리엘에게 다가갔다.
"아리엘. 너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하는구나."
"그게 뭐예요?"
"아무것도 아니란다."
샤를로트의 말에 아리엘은 눈을 깜빡이고는 말했다.
"엄마. 아이스크림 먹어도 돼요?"
"그럴래?"
아이스크림을 허락하는 샤를로트에 아이들은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왔다.
그리고는 다시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아- 아리엘은 배우를 시켜 볼까?"
"배우요? 아리엘에게 연기를 가르치겠다는 말이에요?"
"왜? 배우의 연기력은 얼굴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잖아?"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귀족이 배우가 될 수 있어요?"
말도 안 된다는 샤를로트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