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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현대인-127화 (127/169)

127화

아스타나 왕국에서는 전쟁을 짧게 끝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전쟁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 수를 쓰는 모습이었다.

백화점에 자국의 보물을 경매품으로 내놓았을 뿐 아니라, 아렌달 은행에 돈을 빌리기 위해 매일같이 문을 두드리고, 아렌달 거래소에 상단이나 앞으로 얻게 될 점령지의 소득을 거래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물론 백화점의 경매품 외에 다른 요청들은 전부 거절하고 있었다.

"아스타나 왕국은 왜 전쟁을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 계속 전쟁을 이어가 봐야 왕국에 도움이 되는 것도 없어 보이는데."

"왕국 역사에 왕으로서 업적을 남기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역사에 기록된 대부분의 왕들은 영토 확장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왕국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을 증명하기 가장 확실한 것이 영토의 크기고요."

영향력을 증명하기 위해 영토를 넓힌다.

정말 1차원적인 생각이었지만, 그것보다 확실한 증명 방법도 없었다.

"다른 왕국들이 부추기는 것도 한몫하는 거겠지?"

"그럴 겁니다. 이미 아스타나 왕국의 전쟁은 왕국들의 마법 무기 실험장으로 이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전쟁으로 인해 기술이 발전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었는지, 왕국들의 마법 무기도 제법 쓸 만한 수준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베일리 백작이 말했던 기사의 시대가 완전히 끝을 알리고 있었다.

아렌달에는 원래부터 기사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헤돈과 볼튼을 포함해 아렌달에 충성을 맹세했던 8명의 기사 중 아직까지 검을 잡고 있는 기사도 소드마스터인 볼튼 단 한 명 뿐이었다.

헤돈은 이제 기사라기보다는 군인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있었고, 아렌달 가문의 친위대 기사들도 더 이상 검을 주력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소드마스터가 아닌 기사는 결국 마법 무기를 사용하는 전투에서 활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소드마스터를 꿈꾼다고는 말하지만, 수백, 수천 명의 기사들 중 한두 명만이 오를 수 있는 소드마스터가 아니겠는가.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미련으로 검을 계속 잡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베르겐 왕국에서도 왕국 기사단을 제외한 모든 기사단을 해산한 것 같습니다."

"마법 무기만 있으면 값싼 병력으로 충분히 전투력을 뽑을 수 있으니까.

영주들은 굳이 몸값이 비싼 기사단을 계속 유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겠지."

그 말에 볼튼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드마스터인 볼튼의 입장에서 기사의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겠지만, 그 역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시대는 검보다 마법 무기라는 것을.

"기사들은 마법 무기를 만든 나를 원망하려나?"

"원망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말겠죠."

소드마스터마저 변화를 이야기하니 정말 기사의 시대의 끝나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기사가 데우스님을 원망하더라도 저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볼튼의 말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나를 찬양한다고 급발진이나 하는 사람이 원망은 무슨."

"왕국을 떠난 기사들은 전쟁터를 찾아가지 않겠습니까?

평생 검만 쥐고 살아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기사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전쟁터만 한 곳이 없죠."

헤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장에서 가치를 증명하고 아직 기사로서 활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을 겁니다.

그리고 기사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끝까지 부정하며 죽어 가겠죠."

"씁쓸하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시대의 흐름은 거스르지 못하는 법이죠."

그 말에 볼튼도 고개를 끄덕였다.

"헤돈경께서는 저보다 빨리 시대의 흐름을 아셨나 봅니다."

"나는 이제 내가 기사였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네.

이제는 경이라는 호칭보다 장군이나 사령관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훨씬 많아.

아직도 나를 경이라고 불러 주는 사람은 볼튼 자네나, 오래된 인연들뿐이지."

"그렇군요."

헤돈과 볼튼은 쉽게 받아들였지만, 다른 기사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만큼 그들에게 기사라는 이름은 중요한 것이었다.

"우중충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 이미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의미 없는 이야기겠지.

그럼 아렌달 군의 훈련 상황을 확인해 볼까?"

내 말에 헤돈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휘관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중대 단위로 움직이는 병사들의 모습이 마치 기사단의 행진처럼 보였다.

이미 드론을 통해 정찰이 끝난 지역을 빠르게 이동하며 멀리 무리를 이루고 있는 몬스터 군단을 타격하는 모습은 기사단의 그것보다도 위력적으로 느껴졌다.

지휘관의 신호에 몬스터 군단을 괴멸시킨 병사들이 재정비를 시작하며 바로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말이 아닌 자동차를 타고 먼 거리도 쉽게 이동을 하니 기동성마저 기사단보다 나았다.

하나의 몬스터 군단을 괴멸시켰음에도 지친 모습 없이 곧바로 새로운 전장을 찾아 나서는 모습은 공포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들을 현대의 기사단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겠네.'

제로스 왕자가 어느덧 아렌달에 적응을 마쳤을 무렵.

다른 왕국에서도 타자트 왕국을 따라 유학생들을 대거 아렌달로 보냈다.

아렌달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베르겐 왕국과 나르비크 왕국은 물론, 아스타나 왕국이나 북부의 3왕국, 그리고 남대륙의 다른 왕국들과 중앙대륙의 일부 왕국들까지 아렌달에 왕자들이나 고위 귀족 가문의 자재들이 유학을 목적으로 찾아왔다.

베르겐 왕국의 경우 아렌달 전문 학교 출신의 인재들이 왕국으로 돌아가 좋은 활약을 하고 있는 덕분에 아렌달의 교육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펠릭스 왕자를 비롯해 많은 인재가 아렌달의 교육기관에 입학하게 되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베르겐 왕국의 펠릭스입니다."

나를 보고 인사하는 펠릭스 왕자를 보자 곧바로 보리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바마마께 데우스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보리스 국왕이 내 이야기를 많이 했어?"

베르겐 왕국을 쪼개 버린 역적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런데 펠릭스 왕자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것이 나에게 적개심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네! 아바마마께서는 데우스님께서 이루신 업적들이 대단하다고, 저도 데우스님을 본받아 훌륭한 인물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허어-"

"앞으로 아렌달에 머무는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그래. 잘 부탁하네. 펠릭스 왕자."

펠릭스의 인사에 내가 손을 내밀자 펠릭스는 감격에 찬 눈빛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보리스는 아들한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이렇게 감격에 찬 눈빛을 보내는 거야…'

브레튼이 독립하는 과정에서도 베르겐 왕국보다는 브레튼의 힘이 되어 준 아렌달이었다.

그럼에도 보리스의 감정은 여전히 호의적이었다는 걸 펠릭스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베르겐 왕국에 해 온 짓이 조금 더 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베르겐 왕국과의 거래에서는 조금 힘을 빼라고 말해야겠네.'

가끔씩이지만, 나는 대학의 요청을 받아 짧은 강연을 해 주는 경우가 있었다.

아렌달의 인재들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나 역시 강연 요청에는 웬만해서는 응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강연은 조금 달랐다.

대학뿐 아니라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까지 강연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렌달의 발전은 지식을 나누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지식을 특정 계급이, 기득권이 독점하지 않았기에 더 많은 기술이 만들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다.

그 역할을 해 주는 것이 바로 특허다.

특허를 통해 기술의 소유권을 보호해 주기 때문에 기술을 도둑맞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뿐더러, 특허로 등록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자신의 기술을 사용할 때마다 로열티도 받을 수 있으니 돈도 벌 수 있지."

내 말에 귀족 유학생 하나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평민이 너무 많은 돈을 가지게 되면 주제넘는 생각을 가지게 되지 않습니까?"

"주제넘은 생각이 뭐지?"

"귀족들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귀족들과 같이 고급 요리를 먹고, 비싼 옷을 입으며, 문화를 즐기는 행동 말입니다."

"고급 요리, 비싼 옷, 그리고 문화를 즐기는 건 귀족들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 말에 몇몇 유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렌달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반응으로 보였다.

그 반응에 귀족 유학생이 말했다.

"귀족과 평민은 엄연히 다른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평민이 귀족과 같이 행동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렇다면 평민이 교육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닌가?"

"그것 역시, 죄입니다."

그 말에 일부 학생들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평민인 것은 알고 하는 말인가?"

"네? 평민이요?"

그 말에 귀족 유학생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봤다.

"이 사람들이 다 평민이라는 말입니까?"

"그렇다. 아렌달에서는 능력만 된다면 평민이라도 귀족과 똑같이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아까도 말했잖아.

아렌달의 발전은 지식을 특정 계급이나 기득권이 독점하지 않고 나누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하지만 평민은 평민이지 않습니까?"

"그대는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착각이요?"

"귀족이나 평민이나 칼로 찌르면 피가 나고 죽는다.

똑같이 굶주리면 배가 고프고, 추우면 옷을 입어야 하지.

신분만 다를 뿐 똑같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똑같은 사람이라니… 말도 안 돼."

충격을 받은 귀족 유학생이 주저앉자 다른 학생이 일어나서 말했다.

"그렇다면 아렌달의 귀족들은 평민들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까?

귀족이나 평민이나 똑같은 사람이라면서요."

"귀족이 평민보다 능력이 있으면 된다."

"능력이요?"

"그렇다.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다면 신분이 아닌 능력으로 지배하면 되는 것이다."

내 말에 일부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렌달의 귀족 가문 출신 학생들이었다.

"아렌달의 귀족들은 왕국의 귀족들과 다르게 무능하지 않다.

우리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기술을 터득했다.

뛰어난 인재를 다루고 싶다면 그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면 된다."

리암의 큰 아이들이자 체스터 가문의 후계자인 데이비드의 말에 아렌달의 평민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우리보다 뛰어난 귀족님이라면 얼마든지 그 밑에서 일할 수 있지만, 우리보다 무능한 존재의 밑에서는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감히 평민이! 이 자리에 있는 유학생 중에 왕족들도 있다는 것을 잊은 것이냐!"

"왕족이라도 능력을 보여라!"

당당한 아렌달 학생들의 목소리에 몇몇 유학생들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눈을 빛내는 학생들이 있었다.

지배자의 눈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은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학생들이 진짜 인재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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