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울드 상단을 시작으로 아렌달에 거점을 가지고 있는 상단들이 공격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동대륙뿐 아니라 중앙대륙까지 아렌달 상품이 팔려 나가는 것을 확인한 상단들은 점점 넓어지는 시장에서 먼저 기회를 잡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아렌달에 거점을 두며, 연방의 신뢰를 받는 상단들은 아렌달 은행으로부터 낮은 이율로 대출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자금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금력을 앞세워 다른 왕국의 상단들과 경쟁에서 앞설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아렌달 은행에 대출을 받아 간 상단이 몇 개지?"
"리비아 상단과 울드 상단을 비롯해 총 17개 상단입니다.
아렌달에 거점을 가지고 있는 중, 대형급 상단들은 모두 대출을 받아 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은행의 보유금은 유지되고 있는 거지?"
"예. 상단에서 빌려 간 대출금은 아렌달 백성들의 예금으로 충당 가능했습니다.
다만 귀족님들의 대출까지 포함하면 은행의 보유금이 조금 줄어들기는 했습니다.
물론,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귀족들은 보유하고 있는 땅이나 건물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기 때문에 정 대출금을 갚지 못한다면 담보로 잡은 부동산을 받아오면 되는 것이다.
은행장이 보고를 마치고 돌아간 후 리암이 지친 얼굴로 돌아왔다.
"브레튼에 기차역 건설 사업이 난항을 겪고 있다면서?"'
"지금 체스터와 요크에서 서로 먼저 기차역을 만들겠다고 싸우는 바람에 공사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체스터와 요크라…"
체스터가 브레튼의 중심이라고는 하지만, 요크 역시 체스터 못지않게 큰 도시였다.
베르겐 왕국에서 독립하기 전에는 같은 후작령으로 북부를 지배하던 영지들이었으니 독립한 이후에도 그 차이는 크지 않을 것이다.
리즈에 기차역이 만들어진 이후로 리즈가 얻고 있는 이득을 생각하면, 체스터나 요크나 경쟁에서 밀리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 리암에게는 인연이 깊은 가문들 아닌가.
아렌달 건설의 책임자인 리암으로서는 지금 상황이 피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건은 어디가 좋은데?"
"체스터나 요크나 조건의 차이는 없습니다.
어느 한쪽이 더 나은 상황이면 그쪽을 먼저 공사하면 괜찮을 텐데, 체스터나 요크나 상황은 비슷해서 말입니다."
눈에 띌 만큼 한쪽의 조건이 좋았다면, 아렌달 건설의 책임자로서 더 나은 조건을 선택했다는 명분을 내세우면 된다. 하지만 지금의 조건 대로라면 어느 한쪽에서는 리암에게 아쉬운 상황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그렇게 결정하기 어렵다면, 그냥 동시에 공사를 시작하는 건 어때?"
"공사비는 어쩌고요?"
"공사비는 우리가 생각할 일은 아니잖아?
어차피 브레튼에서 나중에라도 갚을 테니 말이야."
"브레튼에서 공사비를 지불하기 전까지는 아렌달 건설에서 공사비를 부담해야 하지 않습니까?
동시에 공사를 시작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은행은 뒀다가 어디에 쓰려고?"
"은행이요?"
"은행장이 방금 보고를 하고 돌아갔는데, 아직 아렌달 은행의 보유금은 여유가 있는 것 같더라고.
은행장에게 말해 둘 테니 아렌달 건설에서 조금 땡겨 써."
그 말에 리암의 표정이 조금씩 펴지는 모습이었다.
아렌달 건설은 따로 보증이나 담보도 필요 없다.
은행과 마찬가지로 내게 지배를 받고 있는 곳이었으니까 말이다.
"괜히 두 가문 사이에서 고민했네요."
"체스터나 요크나 나중에 다 갚아야 하는 돈이라는 건 확실히 해 놔야지.
확실하게 받아 내지 못하면 리암과 체스터 마을에 청구할 테니 알아서 하라고."
"걱정 마십시오. 체스터나 요크나 절대로 떼먹지 못하도록 확실히 협의하겠습니다."
아무리 친가와 처가라도 봐주지 않겠다는 리암의 표정이었다.
리암은 어느새 냉철한 기업가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아렌달의 귀족들은 돈이 많다.
아렌달 가문이나 스톨 가문은 말할 필요도 없고, 작은 마을을 가진 귀족들까지도 왕국의 영주 가문들과 비교해서 꿇리지 않을 정도로 재산을 쌓았다.
백성을 수탈하지 않고, 정당하게 일을 시키고, 임금을 주면서 재산을 쌓은 만큼 돈을 모으는 재미도 느끼고 있었다.
귀족 가문에서는 투자하는 만큼 더 많은 재산이 모이니 투자를 하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더 많은 대출을 받고, 더 많은 투자를 해서, 더 많은 재산을 모은다.
아렌달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 말이 유행처럼 번져 갔다.
"엔나 이야기 들었나? 이번에 새로운 생산 시설에 수십만 셀링 규모의 투자를 한다고 하던데.
언제 그렇게 재산을 모은 건지…
확실히 영주 가문 출신이라 재산을 불리는 속도가 장난 아닌 것 같아."
"귀족 마을과 노동력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니 당연한 거겠지."
"엔나에서 그만큼 재산을 모았다면, 같은 영주 가문이었던 기르만과 스톨은 얼마나 모았을까?"
어떤 가문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면 같은 귀족 가문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법.
"투자금이 더 필요해서 그러는데 2만 셀링만 더 대출해 줄 수는 없는가?"
"이미 레스터 가문에서는 5만 셀링이나 대출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여기서 2만 셀링을 더 빌리신다면 이자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이자는 걱정하지 말게. 정 안되면 선대로부터 물려 내려오는 보물을 팔아서라도 이자는 밀리지 않게 하겠네."
투자를 위해 가지고 있는 재물을 처분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금액에는 한계가 있는 법.
"리버 가문에는 더 이상 대출을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레스터 가문에 2만 셀링을 더 대출해 줬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는데 말이야.
어째서 우리 가문만 불가능한 것인지, 똑바로 설명하지 않는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네."
"레스터 가문은 2만 셀링을 더 받아 봐야 7만 셀링이었습니다.
리버 가문은 이미 20만 셀링이나 대출해 가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더 대출하셨다가는 리버 마을을 담보로 내놓으셔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큼- 마을을 담보로 내놓으라니. 그건 좀…"
몇몇 가문들은 한계까지 대출을 받고서도 더 많은 투자를 위해 머리를 굴렸고, 결국 대출이 아니더라도 돈을 만들 방법을 찾아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이미 오래전부터 권리를 나눠 주는 것은 귀족 가문 사이에서는 흔한 일 아니었습니까?"
"그거야 땅이나 자원에 대한 권리를 나누었던 것 아닙니까?
확실히 눈에 보이는 실물이 있는 것에 대한 권리였지, 지금 말씀하시는 것처럼 실물이 없는 가치에 대해 권리를 나누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당장 실물이 없다고 해서 우리 마을이 올릴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아렌달 연방이나 여러 상단들과 올해 물품 생산 계약을 마친 상태입니다.
그로 인해 들어올 소득의 지분을 나누는 것이니 문제가 될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권리를 사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부터라도 찾아봐야지요."
앞으로 있을 수익에 대한 권리를 매매하겠다는 말에 사람들은 저게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그 생각에 속으로 감탄했다.
'마을에서 올릴 소득의 지분을 나누겠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이거 완전 주식 거래 아니야?'
아무리 귀족 마을이 기업처럼 움직인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지분을 거래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귀족 마을에서 얼마나 소득을 올릴지 모르기에 섣불리 권리를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저 약간의 투자만 하면 나중에 마을에서 올릴 소득을 나누어 받을 수 있다는 말은 여유가 있는 귀족들에게는 혹할 만한 이야기였다.
연방에서도 딱히 제재를 가하거나 문제 삼지 않는 모습에 점점 눈치를 보는 귀족들이 생겼다.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었다.
대표적으로 내 장인.
"그래서 얼마나 투자를 하면 되는 건가?"
"5만 셀링을 투자해주시면, 저희 마을에서 생산하는 상품에 대한 권리 10%를 드리겠습니다."
"10%에 5만 셀링인가? 별로 혹하는 거래는 아니로군."
"그, 그럼 12%를 드리겠습니다. 작년까지 마을의 소득을 보시면 2%만 해도 적잖은 배분이라는 걸 아실 겁니다."
"음- 그럼 이건 어떤가? 6만 셀링을 투자할 테니 15%를 넘겨주게나."
"……15%나 말입니까?"
"싫으면…"
"누가 싫다고 했습니까? 스톨 어르신께서는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신가 봅니다."
"허허허-"
여유가 넘칠 뿐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는 장인이 처음으로 투자를 시작하자, 권리를 팔려는 귀족들과 그 권리를 사려는 귀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연방에서는 귀족들이 거래하기 쉽도록 시장을 만들어 주었다.
아렌달 거래소.
연방에서 나서서 지분 거래에 대한 보증을 해 주기 시작하자 귀족들은 본격적으로 거래를 시작했다.
물론 나 역시 거래소의 이름으로 귀족들이 내놓은 지분을 사들였다.
"거래소의 이름으로 귀족 마을의 권리를 사기는 했는데, 이게 정말 도움이 될까요?"
"시장을 확실히 관리하기 위해서는 기관이 조절해 줘야 할 필요가 있을걸?
어떤 시장이던 중간에 누군가 조절하는 사람이 없다면 날뛰기 마련이잖아."
물론 나는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뉴스나 드라마, 영화를 통해 주식시장에서 장난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경제 상황이 엉망이 되는 모습도 그려지곤 했다.
"지금이야 처음 시작하는 만큼 시행착오를 많이 겪을 수밖에 없겠지만, 거래소가 잘 운영된다면 아렌달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도 있겠지."
"그럴까요?"
"어떠한 방식에서든 돈이 돌아야 경제가 성장하는 법이잖아?"
그리고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가져옴으로써 귀족들을 압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 귀족과 평민들 간의 분쟁이 생겼을 때, 그들을 중재하기 위해서 귀족들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상단들도 거래소에 뛰어들 수 있게 해야겠어.
상단들도 투자를 받을 수 있다면 좋아할 테니까."
"상인 길드를 통해 이야기가 전달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귀족 가문에서는 상인들에게 지분이 넘어가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감히 평민이 권리를 나누어 가지는 것을 귀족들이 좋아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은행도 그렇지만, 거래소에서는 돈이 곧 권력이다.
만약 거래소에서까지 신분을 나눠서 거래하는 귀족이 있다고 하면 거래소에서 추방하면 되는 거지.
그리고 앞으로 거래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공지하면 귀족들도 알아서 선택하겠지."
상인과 권리를 나누기 싫다면 거래소가 아닌 다른 곳에서 거래하면 되는 것이다.
따로 지분의 거래를 한다고 아렌달에서 뭔가 제재를 하는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모든 주식이 거래소에서 거래되지 않는다는 것은 주식을 하지 않던 나도 알고 있었다.
'비상장 주식이라고 하던가?'
비상장 주식이 오히려 가치가 있을 수도 있지만, 정당한 평가와 보호를 받고 싶다면 쉽사리 거래소를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