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아렌달에 은행이 생기면서 생활도 많은 변화를 가지고 왔다.
그동안 집안에 돈을 모으던 백성들이 은행에 돈을 맡기기 시작하면서 그 돈을 필요한 사람들이 빌려 가는 대출 시스템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부분의 생산 시설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이나 대규모 사업을 준비하던 상단들이 은행에 돈을 빌려 가며 새로운 투자를 시작했다.
귀족이 평민들의 재산을 수탈하는 것이 아니라 빌려서 사용한다는 특수한 상황에 귀족들이나 평민들이나 어색함을 금치 못하는 모습이었다.
"평민에게 돈을 빌리다니요? 귀족이 평민에게 돈을 빌리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아렌달 가문에 돈을 빌린 것이지 평민의 돈을 빌린 것이 아닙니다."
"아렌달 은행에서 정식으로 투자를 받은 겁니다.
투자받은 자금은 사사로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렌달의 산업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하는 겁니다."
"귀족님들이 내게 돈을 빌리다니. 이제 귀족님들도 평민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지는 못하겠지?"
"아렌달에서는 귀족들 못지않은 생활을 하는 평민들도 있잖아?
당연히 귀족이라고 옛날처럼 평민을 다룰 수는 없을 거야."
그래도 귀족들이 신분을 앞세워 권위를 휘두르면 평민에게도 좋을 것이 없기에 조심하는 눈치였지만, 과거처럼 귀족을 무작정 두려워하는 마음은 많이 사그라드는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아렌달 은행에서 돈을 빌린 귀족들이 얼마나 되지?"
"예상보다 더 많습니다. 가문의 이름을 대고 돈을 빌린 귀족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대부분 목적은 생산시설이나 새로운 산업에 투자하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귀족들도 생각이 있는 만큼 과거와 같이 신분만으로는 권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
옛날에는 귀족이라는 신분만으로 백성들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다.
귀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민들의 재산을 수탈하고, 길거리에서 사람을 죽어도 아무런 죄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아렌달에서는 그런 폭력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니 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귀족의 권위를 세워야 했고, 귀족들이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바로 평민들의 생활을 자신들에게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귀족 마을의 백성들은 귀족 가문의 생산 시설에서 일하고, 그 임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즉, 백성들의 일자리는 대부분 귀족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귀족들이 일자리를 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가족들이 굶주리게 되기 때문에 귀족 마을의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귀족들의 권위를 살려 줄 수밖에 없었다.
과거 귀족과 평민의 관계가 주종의 관계였다면, 지금은 갑을의 관계로 변한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상 귀족 마을이나 상단은 하나의 기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긴 하지.'
체스터 가문이나 리버 가문 같이 여러 가지 사업을 하고 있는 가문들은 기업을 넘어 그룹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렌달 가문도 마찬가지인가?'
아렌달 상단, 아렌달 건설에 마법 연구 단지, 제철소, 방송국, 은행, 대학이나 고등학교 등의 교육 시설까지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모두 아렌달 가문의 재산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것들이 내 손 안에 있다는 걸 아렌달의 백성들은 알고 있으려나?'
그저 아렌달의 관리자로서 왕국의 국왕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렌달의 백성들의 삶은 내 지시 하나하나에 완전히 달라질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굳이 군사력이나 자금력을 과시하지 않아도 아렌달은 내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아렌달에 은행이 생겼다는 소식은 아렌달을 넘어 브레튼이나 다른 왕국들에도 전해졌다.
그리고 담보만 있다면 돈을 빌릴 수 있다는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돈을 빌리기 위해 아렌달을 찾아왔다.
"브레튼은 이번에 오울루 왕국과 새로운 고속 도로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것참 좋은 일이군요. 오울루 왕국에서도 아렌달의 상품들을 더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이지요. 아렌달의 상품이 오울루 왕국까지 전해지는 속도가 훨씬 빨라질 겁니다.
그래서 그러는데… 도로 공사에 필요한 자금이 조금 부족해서…"
"아- 돈을 빌리러 오신 겁니까?"
"…담보만 있으면 빌릴 수 있다고…"
"물론입니다. 데우스님께서도 담보만 확실하다면 적극적으로 대출해 주라 하셨습니다."
사업에 속도를 높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러니까 이번 백화점 경매에 참여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 이 말씀이시죠?"
"물론이네. 경매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주머니가 무거워야 하지 않겠는가?"
"음- 담보는 준비가 되셨습니까?"
"경매에 패배하면 바로 돈을 갚을 텐데 담보는 가문의 이름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돈을 빌려주지 않겠다는 것은 우리 가문을 무시하는 것이냐!"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돈이 필요한 사람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그리고 많이 은행을 찾은 것은 아스타나 왕국의 사람들이었다.
"죄송하지만 아스타나 왕국에는 돈을 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어째서 아스타나 왕국은 돈을 빌려주지 않겠다는 거지?
내 신분도 확실하고, 담보도 충분하지 않나?"
"하지만 아스타나 왕국은 돈을 빌려주면 전쟁에 쓰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데우스님께서도 아스타나 왕국에는 돈을 빌려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아스타나 왕국이 이번에도 대륙 원정을 실패한다면 빌려준 돈은 언제 받을 수 있는 겁니까?"
"같은 동대륙의 왕국으로서 지원해 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왕국을 능멸하는 것이냐!"
"글러트 왕자님. 죄송하지만 아렌달은 왕국이 아닙니다."
"네놈! 오늘의 일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왕위를 이어받게 되면 절대 아렌달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안녕히 가십시오."
왕자들까지 찾아와 땡깡을 부릴 정도로 말이다.
"아스타나 왕국은 이번에도 원정에 실패하겠군.
이미 몇 번이고 반려했는데도, 저렇게 뺀질나게 찾아오는 걸 보면 이미 왕국의 재정이 거덜 났다는 말 아니겠어?
돈도 없는 왕국이 무슨 전쟁을 하겠다고…"
"식민지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전쟁으로 식민지를 만들 생각을 하는 건지.
빅터 국왕은 여전히 감이 없는 것 같네."
왠지 아스타나 왕국은 왕가가 바뀌지 않으면 앞으로도 힘들 것 같았다.
"뭐- 남의 나라 사정까지 내가 알아줘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보다 인공 마나석의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는 건 어떻게 되었지?"
"아무래도 인공 마나석의 재료인 마나석 광산의 흙과 모래도 거의 고갈이 되어서요."
"다른 왕국에서 수입해 오는 건?"
"왕국들도 인공 마나석의 재료가 무엇인지 눈치를 채서 수입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지금까지는 건설용 자원이라고 위장을 해서 수입해 왔었는데, 왕국들도 인공 마나석의 원재료를 눈치채는 바람에 더 이상 흙과 모래를 쓸어 오지는 못하는 상태였다.
아직까지 인공 마나석을 만드는 데 성공한 왕국은 없지만, 그래도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인공 마나석을 만들어 내는 왕국은 나타날 것이다.
마법사는 아렌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아렌달에서 만든 마법 아이템들과 상품들, 그리고 마법 무기도 따라서 만들지 않았던가.
아렌달의 것들과 효율이 똑같지는 않더라도, 다른 왕국의 마법사들도 결국에는 인공 마나석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원재료를 어디서 가져오지?
아렌달에는 마나석 광산도 없는데 말이야."
"남대륙에서라도 가져와야 할까요?"
"배에다가 흙을 실어 오기에는 효율이 너무 떨어지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면 남대륙에서라도 끌어와야지 어쩌겠어.
마나석 없이는 산업이 멈춰버릴 테니까."
화석 연료가 없는 이세계에서는 마나야말로 산업을 이끌어 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었다.
그리고 마나석은 마법진 세공을 통해 없어서는 마법 아이템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부품이 되어주고 있었다.
마법 무기부터 동력선이나 자동차, 기차에 이르기까지 마나석이 안 들어가는 곳이 없었고, 제철소의 불가마를 타오르게 만들어 주는 것도 마나석에서 나오는 마나였으니, 인공 마나석의 원재료를 찾아내는 것은 절대 늦출 수 없는 일이었다.
"계속해서 마나석 광산을 찾아봐야지.
안되면 구스강을 넘어가서라도 말이야."
B22
"왜 마법사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못하는 겁니까?"
"마법사들은 담보로 내놓을 수 있는 게 없잖아?"
"마법사들이 개인적으로 만든 마법 아이템들을 담보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자하의 말에 연구실에 모인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이 내게 지원받는 연구비가 웬만한 평민들 임금보다 훨씬 많은 건 알고 하는 소리지?"
"……"
"그리고 개인적으로 만든 마법 아이템을 담보로 쓰겠다고?
설마 물의 색을 바꿔 주는 물 조리개와 불타지 않는 불쏘시개, 이런 걸 담보 삼아 돈을 빌리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 말에 물 조리개를 만든 에일렌과 불쏘시개를 만든 알비레오가 딴청을 피웠다.
"그런 쓰잘데기없는 아이템이나 만드니까 연구비가 다 떨어지는 것 아니야?"
"물 조리개에서 다양한 색의 물이 나오면 얼마나 예쁜데…
아리아 아가씨도 좋아해 주셨다고요."
"쓰, 쓰잘데기없는 거라니요! 불타지 않는 불쏘시개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아리스 아가씨가 얼마나 신기해했는데요?"
"우리 애들은 왜 걸고넘어져?"
"……"
두 사람의 불평에 다른 마법사들이 둘을 쏘아보았다.
괜히 더 이상 입을 열어서 이야기를 망치지 말라는 눈빛에 알비레오와 에일렌은 투덜대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20만 셀링을 지원해 준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대출을 받겠다는 거야?"
내 말에 마법사들이 눈을 번쩍 뜨며 놀랐다.
"20만 셀링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20만 셀링을 지원해 주셨다고요? 마탑주!!"
"설마 개인적인 마법 연구를 위해 연구비를 빼돌린 건 아니겠죠!"
마법사들의 목소리에 자하가 마법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들었다.
"다들 진정해! 얼마 전에 다들 조금씩 연구비 지원을 받았잖아!
그리고 비행 마법과 영상 마법에 써야 하는 돈이니까 마구잡이로 쓸 수 없는 돈이라고!"
순식간에 시끄러워지는 마법사들에 나는 마법사들을 주목시키기 위해 손뼉을 치고 말했다.
"자! 마탑의 의견은 잘 들었다.
결국에는 돈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잖아?"
"그렇습니다."
"연구비가 필요하다면 지원해 주겠다.
대신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가지고 와."
"…또 뭘 시키시려고요?"
"인공 마나석."
내 말에 마법사들의 고개가 갸웃해졌다.
"인공 마나석은 이미 만들지 않았습니까?
설마 인공 마나석의 효율을 더 올리라는 말씀이십니까?"
"인공 마나석의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다."
"!"
내 말에 마법사들이 다시 한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요즘 마나석이 조금 줄어든 느낌이었는데…"
"마나석 지원이 줄어들면 연구비가 늘어나도 의미가 없는 것 아니야?"
마나석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마법사들답게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들 깨닫고 있었다.
"인공 마나석을 만드는 원재료가 부족해지고 있다."
"원재료라면 마나석 광산의 흙과 모래 말씀입니까?"
"맞아. 다른 왕국에서 인공 마나석의 원재료가 그것들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 같다.
그래서 아렌달에서 구할 수 있는 대체재가 필요해."
"아렌달에는 마나석 광산이 더 나오지 않는 겁니까?"
"아직까지는… 앞으로 마나석 광산이 더 나온다면 좋겠지만, 마나석 광산이 아니더라도 인공 마나석을 만들 수 있는 대체재가 있다면 좋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자하의 대답에 에일렌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얼마나 지원해 주시는 거예요?"
에일렌의 말에 마법사들이 일제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 마법사들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 한 개를 세웠다.
"10만…"
"그 정도면 나한테 얼마나 떨어지려나…"
자신에게 떨어질 몫을 계산하는 마법사들을 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10만이라니, 무슨 소리야?"
"네?"
"100만."
"허업!"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자하가 연구실에 걸려 있는 삽을 들고 뛰쳐나갔다.
"마, 마탑주! 같이 가요!"
"대지 마법 전문가들 다 붙어!"
자하를 시작으로 마탑을 뛰쳐나가는 마법사들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