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아렌달의 농경지는 대부분 구스강 유역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이번 홍수로 적잖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발 빠르게 베르겐 왕국이나 나르비크 왕국에서 식량을 수급하려 했지만, 아렌달 만큼은 아니더라도 인근 왕국들 역시 많은 비가 내렸기에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비가 그치자마자 아론 선장이 선단을 이끌고 남대륙으로 식량을 수급하기 위해 출발했고, 브레튼이나 북부 왕국들에게 식량을 사들이기 위해 상단들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덕분에 동대륙의 식량 자원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가격으로 치솟았다.
"그나마 물고기라도 많이 잡히니까 다행이지.
그것도 없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어."
"이번 겨울만 잘 버티면 분명 내년에는 괜찮아질 거야.
아는 농사꾼이 그러는데 강이 범람하면 땅이 비옥해진다고 하더라고.
분명 내년에는 풍작이 올 테니까 올해만 잘 넘기면 될 거야."
그래도 백성들은 그동안 모아 놓은 재산 덕분에 버틸 여력이 되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구스강 유역이 아닌 다른 곳에 농경지를 만들어 놨어야 했는데.
남는 땅도 많았잖아."
"이런 비가 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이라도 농경지를 만든다면 다음은 잘 대비할 수 있을 겁니다."
"인터리아 인근에 새로운 농경지를 만들도록 하는 게 좋겠어.
그래도 거기는 내륙에 지대도 높아서 홍수의 위험은 덜할 것 아니야."
구스강 유역의 농경지만으로도 아렌달의 식량 자급률을 모두 채울 수가 있어서 새로운 농경지를 만들지 않았다.
식량 자급률만 채우고 산업화에 여력을 다하는 아렌달인 만큼 농민의 숫자도 적었기에 바로바로 대응이 안 되었다는 것도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구스강의 범람을 피해 마을을 떠난 농민들이 다른 농경지로 바로 옮겨 갈 수 있었다면 식량 가격이 이렇게 뛰지 않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구스강의 수위가 낮아지는 대로 살릴 수 있는 농경지는 살려 보자고.
거기에 빨리 수확할 수 있는 농작물을 심으면 겨울나기는 어떻게든 되겠지."
비가 그치고 또다시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구스강의 수위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식량을 수급하기 위해 남대륙으로 떠났던 선단이 충분한 양의 식량을 가져왔기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물론 덕분에 이주 이후에 아렌달은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한 한 해가 되었지만 말이다.
예년에 비해 짧았던 수확기가 지나갈 때쯤, 정말 오랜만에 테이블 위의 마나석이 환하게 빛을 뿜었다.
"핫라인?"
두 왕국의 대륙 원정의 실패 이후 동대륙의 왕국들은 모두 내실을 다지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기에 핫라인으로 연락할 만한 일이 무엇인지 조금도 예상되지 않았다.
"메신져! 지금 핫라인을 보낸 게 누구지?"
-데우스님! 아렌달 군입니다.
"아렌달 군? 갑자기 핫라인이라니 무슨 일이야?"
-바깥을 순찰하던 병력이 모두 실종되었습니다.
가끔 잊어버리고는 하지만, 구스강을 넘어가면 언제든지 몬스터를 만날 수 있는 위험한 땅이 있었다.
구스강 안쪽은 완전히 아렌달의 영역이었지만, 아직도 구스강 너머에는 몬스터가 지배하는 바깥의 땅인 것이다.
아렌달 군이 주기적으로 순찰하며 강을 넘어오는 몬스터를 제거하고 있었기에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지, 언제든지 몬스터가 구스강을 넘어 아렌달을 침범할 수도 있었다.
그런 몬스터의 침략을 예방하기 위해 아렌달 군은 꾸준하게 바깥을 탐사해 왔다.
소수의 무장한 병력들이 바깥에 나가 몬스터 군단이 생기지 않도록 관찰하고, 때에 따라서는 몬스터 군락을 파괴하면서 관리해 온 것이다.
가끔 순찰을 나가 위험한 몬스터를 만나서 부상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탐사를 나간 병력이 모두 실종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바깥으로 나간 병력이 얼마나 되지?"
"2대대 소속의 1개 소대. 30명입니다."
"30명… 30명 전원이 실종되었다는 말인가?"
헤돈의 보고에 지휘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바깥으로 순찰을 나간 병력이 또 있나?"
"지금 1개 소대가 실종된 병력을 수색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바깥으로 나간 병력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종된 병력이 몬스터에 의해 죽었는지, 아니면 그저 연락이 끊긴 것인지는 확인이 안 된 거지?"
"그렇습니다만… 마지막으로 통신이 닿은 거리를 생각해 보면 벌써 돌아왔어야 할 거리였습니다."
"……"
몬스터가 지배하는 바깥의 땅이었다.
바깥에서 실종이라는 말은 사실상 죽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마법 무기가 개발된 이후로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한 번에 피해를 당한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헤돈과 지휘관들이 이번 일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깥의 몬스터들에게 뭔가 변화가 있었던 걸까요?"
"변화라고?"
"마법 무기로 무장한 병사 1개 소대라면 오크 군단이 나타나더라도 상대할 수 있는 전력입니다.
오우거나 와이번 같이 대형 몬스터가 나타나더라도 잡을 수 있는 화력이죠.
그런데 그런 전력이 한 번에 실종되었다는 건 바깥의 몬스터에게 어떤 변화가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몬스터의 변화…"
그 말에 30년 전 구스강이 범람했던 해에 몬스터의 침입이 굉장히 많았었다는 리오의 말이 떠올랐다.
"헤돈. 구스강이 범람한 이후로 몬스터의 숫자는 어때?
몬스터가 출몰하는 빈도나 구스강까지 내려오는 몬스터의 규모에 변화가 있었나?"
내 물음에 헤돈이 지휘관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한 지휘관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강이 범람한 이후 몬스터가 더 자주 보였습니다."
"얼마나?"
"예년보다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배는 늘어난 것 같습니다."
30년 전과 똑같이 구스강의 범람 이후 몬스터의 숫자가 늘어난 것이다.
"이번 겨울은 많이 피곤할 수도 있겠네."
바깥의 몬스터가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병사들을 또다시 바깥으로 보내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그래도 바깥의 변화를 주시하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 나는 곧장 마탑으로 달려왔다.
"자하. 지난번 보여 줬던 모형 정도라면 마나석의 마력이 떨어지기 전까지 계속 띄울 수 있다고 했지?"
"네. 마력이 다하기 전에는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멀리 날리는 것도 가능한 거야?"
"특정 좌표로 보내는 기술은 이미 있지 않습니까?
그걸 활용하면 단순히 날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럼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도 가능한가?"
내 물음에 자하는 잠시 고민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금 복잡하기는 하지만 처음 특정 좌표로 날릴 때 돌아오는 좌표까지 설정해 놓으면 되지 않을까요?
세세한 조정은 어렵겠지만, 그냥 날아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영상 마법은 얼마나 진척되었어?"
"…구스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마법사들이 전부 투입되지 않았습니까?"
"그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냥 이야기해 봐.
한 번에 몇 분이나 기록할 수 있는 거야?"
"…아직까지는 겨우 5분이 한계입니다."
"5분이라…"
조금 아쉬운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5분이나 담을 수 있는 게 어디인가.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구스강 너머, 바깥의 몬스터의 상태를 확인해 보려고."
지금 병사들을 바깥으로 보내기에는 어떤 위험이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마법의 힘을 빌려 바깥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모형을 날릴 때 그 안에 기록석을 같이 날릴 수도 있는 거지?"
바로 드론을 만들어서 말이다.
실종된 병력과 마지막 통신이 닿았던 좌표를 향해 드론이 날았다.
그리고 날아간 드론은 5분의 영상 기록을 가지고 돌아왔다.
"여기 흔적이 있네."
"마지막 통신 이후에 더 깊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바깥의 땅에는 확실한 좌표가 없었기에 대략적인 임시 좌표를 설정해 다시 한번 드론을 날렸을 때 순찰 병력이 어떻게 된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몬스터의 시체들과 전투의 흔적들. 그리고 부서진 마법 무기들의 모습까지 짧은 영상에 담겨서 돌아왔다.
그리고 그보다 심각한 것도 보였다.
"몬스터가 너무 많아."
몬스터의 시체를 뜯어먹기 위해 모인 몬스터가 너무 많았다.
"이렇게 많은 몬스터를 본 적 있어?"
"지금까지 보고된 적도 없습니다."
헤돈의 말에 지휘관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을 개발하기 위해 나왔을 때도 이렇게 많은 몬스터는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뉴렌달을 향할 때도, 나르비크 왕국 방향으로 점령해 나갈 때도 많은 몬스터 군단과 군락을 파괴해 왔지만, 지금 영상에 보이는 숫자의 몬스터는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몬스터 군단이라고 불렀던 규모는 그 수가 많아 봐야 천 마리 정도의 규모였다.
그런데 지금 영상에 담긴 몬스터의 숫자만 해도 그것을 훨씬 상회할 숫자였다.
적어도 3천은 될 법한 규모의 몬스터 군단.
"겨울이 되면 이것들이 구스강으로 내려올 수도 있다."
내 말에 헤돈을 비롯한 지휘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몬스터 군단이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드론을 날려. 다른 몬스터 군단이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본격적으로 몬스터가 구스강으로 내려오기 전에 최대한 줄여 놔야 했다.
"자하. 방금 영상이 찍힌 좌표가 어디인지 알겠어?"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대충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좌표로 다시 드론을 날릴까요?"
자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방금 확인한 곳에 다시 드론을 날릴 필요는 없지."
"그럼 왜?"
"죽은 병사들의 복수는 해 줘야 하지 않겠어?
알비레오에게 연락해."
"아- 알겠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 발견된 몬스터 군단은 총 6개.
순찰 병력이 전투를 벌인 몬스터 군단 만큼은 아니었지만, 모두 천 단위를 넘어가는 대형 군체였다.
그리고 몬스터 군단이 발견될 때마다 대규모 폭격 마법이 시전됐다.
아렌달 군의 수고를 줄이기 위해 미리미리 몬스터의 숫자를 줄여 나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스강까지 내려온 몬스터의 숫자는 역대급이라고 할 만큼 많았다.
오죽하면 몬스터의 시체로 인해 구스강의 수위가 다시 높아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도대체 30년 전에는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그때는 마법 무기도 없었는데 말이야.
몬스터가 내려오는 규모를 보면 100명이 아니라 영지가 완전히 파괴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때는 아렌달 성에서 하루빨리 봄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뉴렌달과 아렌달 성은 거리도 꽤 되지 않습니까?"
"30년 후에 이 몬스터 군단이 또 나타날 수도 있다는 거지?"
내 말에 리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윽- 그렇군요. 나중을 위해서 올해 있었던 재난은 꼭 기록해 놔야겠습니다."
"그때까지 살아 있으려고?"
"이거 왜 그러십니까?! 저랑 데우스님이랑 몇 살이나 차이가 난다고요?!
그때도 저는 아렌달의 수석행정관으로 일하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일할 생각인 거야?"
내 말에 리오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저보다 나은 행정관이 나타나지 않는 한, 데우스님의 수석행정관으로 기록되는 사람은 바로 저, 리오뿐일 겁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