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비가 지나치게 많이 오는 것 같은데?"
벌써 며칠째 비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것도 아렌달 전역에 걸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렌달은 비교적 좋은 기후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여름과 겨울의 연교차가 심하지 않아, 더위나 추위를 겪는 일도 거의 없었고, 특별히 건기나 우기를 나눌 만큼 집중호우가 있는 지역도 아니었다.
1년 내내 적당량의 강수량이 유지되었기에 구스강 역시 단 한 번도 범람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온 건 몇십 년 만인 것 같은데요?"
"예전에도 이렇게 비가 온 적이 있었나?"
"데우스님.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한 30년 전쯤에 비가 엄청나게 온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 구스강이 범람해서 영지민도 죽고 그랬는데요."
"아- 그랬나?"
30년 전이라면 데우스가 아직 어렸을 때의 이야기였다.
당연히 내 기억에는 없는 시절이었다.
"데우스님께서는 너무 어린 시절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으실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저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구스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농작물도 많이 휩쓸려서 그해에는 겨울나기가 매우 힘들었거든요."
"당시에 농사를 망쳤다면 정말 힘들었겠네."
"네. 그런데 먹을 것도 문제였지만, 그해에는 몬스터의 침입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몬스터도?"
"네. 몬스터의 침입 때문에 기사님들이나 어른들도 많이 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리오의 말을 들어 보면 정말 최악의 한해가 아닐 수 없었다.
"음- 생각해 보니 그 당시의 어른들도 옛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들이 어렸을 때도 이렇게 비가 많이 와서 구스강이 범람한 적이 있다고요."
"그렇다면 몇십 년마다 한 번씩 구스강이 범람할 정도로 비가 많이 오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따로 기록된 건 없는 거지?"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지금이야 서류를 쓰고 기록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아니었지 않습니까?"
왕국이라면 몰라도 지방 영지에서, 특히 아렌달 같이 영지라고 불리기도 아쉬운 작은 영지에서 꾸준히 기록을 남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방 영지에서 기록이라고 남기는 것들은 영주 가문의 역사 같은 사적인 일이 대부분이었다.
영지를 운영할 돈도 부족한 상황에서 이런 사건들을 기록하는데 투자하는 영주는 없었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라도 모아 봐야 하려나?"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봐도 별로 도움이 안 될 겁니다.
옛날의 아렌달과 지금의 아렌달은 많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아렌달 영지 시절과 환경도 생활 방식도 달라졌으니 그때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 뉴렌달에는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야기를 들어서 나쁠 건 없지.
뉴렌달이나 다른 도시들은 아니더라도 기존의 아렌달 영지와 그 위쪽으로는 재해를 피할 수 있잖아."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아렌달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모아 보겠습니다."
"아렌달 원주민뿐 아니라 스톨이나 기르만, 엔나 영지의 이야기도 전부 모아 봐. 아렌달은 아니더라도 그들은 기록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옛날에 홍수를 겪었던 아렌달의 원주민들은 리오처럼 그해의 재난을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그 당시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한해에 100명에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니…"
내가 이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 아렌달의 인구가 2천 명밖에 안 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이다.
리오나 아렌달의 원주민들이 똑같이 기억하고 있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비는 이제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옛날과 똑같이 비가 내린다면 앞으로 20일 가까이 비가 내릴 테니까요."
내 말에 리오 역시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마나 우기도 없는 지역에서 어떻게 한 달이나 비가 내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몇십 년마다 한 번씩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게 사실이라면 지금 비가 오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최대 20일 가까이 비가 더 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대비해야겠지?"
"구스강과 해안가 인근에는 언제라도 대피할 수 있게 준비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최악의 경우 강이 범람하면서 농사를 망칠 수도 있어. 만약의 경우를 위해 식량도 최대한 비축해 놓는 게 좋겠어."
구스강이 범람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상황이었지만, 정말 20일 가까이 비가 내리게 된다면 구스강 하류가 범람하는 건 피하기 어려울지도 몰랐다.
우의를 걸친 아렌달 군의 병사들이 마법 무기가 아닌 공사 도구를 들고 작업하고 있었다.
우중충한 날씨만큼이나 우중충한 표정의 병사들을 보며 과거 군대에 있던 시절 진지 공사를 나갔던 일이 떠올랐다.
장마로 인해 무너진 진지를 다시 만든다고 얼마나 삽질을 했는지…
그때 습한 날씨에 모래주머니를 쌓다가 탈진 직전까지 갔던 걸 생각하면 병사들의 표정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자연재해에는 군대의 힘을 빌려야지.
구스강은 아렌달 군이 지켜야 하는 요충지이기도 하고 말이야.'
자연재해에 가장 뛰어난 일꾼들이 바로 군인들이지 않은가.
왕국과의 국경을 방어하는 병력을 제외한 모든 아렌달 군의 장병들이 구스강의 범람을 예방하기 위해 작업을 시작했다.
"거기 모래주머니 좀 더 높게 쌓아."
"너무 높게 쌓으면 무너지지 않을까요?"
"그럼 무너지지 않도록 쌓으면 되는 거잖아.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히. 하지만 최대한 높이.
내 말이 이해됐어?"
"……하아- 알겠습니다."
지휘관들의 지시에 장병들이 몸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병사들은 따로 공병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일을 잘하는군."
"아렌달 건설에서 군에 도움을 많이 요청합니다.
아렌달의 병사들 중 도시 건설이나 도로 공사에 참여해 보지 않은 병사는 없을 겁니다."
"전군의 공병화라. 아주 좋아."
내 말에 헤돈 역시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이 비를 맞으며 제방을 쌓아 올리자 기다리고 있던 마법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일어나라 모래여! 샌드월!"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제방의 빈틈을 단단하게 메워 주는 모습에 나는 박수를 보냈다.
"마법 한 번으로 저런 제방이 만들어지는구나.
역시 마법은 대단해."
내 박수에 마법사들이 나를 돌아봤다.
병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우중충한 표정의 마법사들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우스님. 앞으로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거예요?"
"음- 가능하면 구스강 전체 구간에 제방을…"
"구스강이 얼마나 긴데 어떻게 그런 말씀을…
마법사들이 전부 마력 고갈로 쓰러지고 말 거예요."
"그런가?"
내 말에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마법사들의 모습에 나는 마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오늘은요? 그럼 내일도 해요?"
"당연하지. 비가 그칠 때까지 할 거야."
"……"
"뭐야. 그 표정들은? 마법사들은 도와주기 싫다 이거야?"
마법사들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모습에 활짝 웃으며 말했다.
"천재지변과 자연재해에는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하는 것 아니겠어?
마법을 너무 많이 써서 지친 거라면 자하도 나오라고 해."
"정말요?"
"마탑주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헤돈은 꼬박꼬박 나와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는데 말이야.
당연히 마법사들의 지휘는 마탑주가 해야지 않겠어?"
"당연하죠!"
마탑주도 끌고 오라는 말에 마법사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법사들에게 끌려 나온 자하는 나를 보자마자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얼마 전에는 하루라도 빨리 비행선을 만들라고 하셨으면서 저까지 공사 현장에 나오라니.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다른 마법사들이 힘들다고 하니까 부른 거지."
내 대답에 자하가 자신을 끌고 나온 마법사들을 바라봤다.
그런 자하의 눈빛에도 마법사들은 당당하게 말했다.
"데우스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천재지변과 자연재해에는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요.
그러니 마탑주도 함께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여기서 데우스님을 판다 이거지?"
그런 마법사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만 싸우고 가서 마법이나 좀 써 줘."
"데우스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마법진 전문이라 원소 마법은 잘 사용하지 못합니다.
제가 마법을 썼다가는 오히려 제방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건 곤란한데."
자하의 말에 아렌달 최고의 원소 마법 전문가인 에일렌이 손을 들었다.
"원소 마법은 마법사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마법이에요. 데우스님.
지금 마탑주가 도망치려고 핑계를 대는 겁니다."
"에, 에일렌. 네가 어떻게 나한테!"
"마탑주 혼자 비행선을 만들어서 데우스님의 보너스를 독차지하려고 그러시는 거죠?
누가 모를 줄 알아요?"
에일렌의 말에 나는 자하에게 마나석을 쥐어 주며 말했다.
"만약 제방이 무너지면 다음 달 마탑 지원금은 전부 재해 복구 작업에 사용할 생각이야."
"허업!"
"그러니까 제방이 무너지지 않게 잘 부탁하네. 마탑주."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공사를 계속하는 동안에도 비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제방의 높이가 사람 키보다 배는 높아지고, 구스강 바깥쪽이 강인지 바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까지 강물이 차올랐다.
폭이 좁은 대신 깊이가 있던 구스강은 이제 폭마저 넓어지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바다를 향해 흘러갔다.
"지금 강물에 휩쓸리면 도저히 살아남지 못하겠는데?
이제부터는 구스강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
강이 범람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괜찮겠습니까?"
"이만큼이면 할 만큼 했어. 이 이상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내 지시에 헤돈과 자하는 바로 병사들과 마법사들을 뒤로 물렸다.
언제 제방을 무너트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불어난 강물에 나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비는 정말로 한 달을 채우고 나서야 그치기 시작했다.
기르만부터 아렌달 성까지 구스강의 중상류 부분은 잘 대비해서인지 피해 없이 재해를 피할 수 있었다.
미리 쌓아 놓은 제방이 제구실을 하며 구스강의 범람을 막아 준 것이다.
하지만 강 하류의 범람까지 모두 막을 수는 없어서 일부 농경지는 수몰되고 말았다.
"아렌달 건설의 인부들과 아렌달 군의 병사들, 마탑의 마법사들을 전부 제방 공사에 투입했는데도 강이 범람할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비가 온 거지?"
"그래도 큰 피해 없이 막아 내지 않았습니까?
미리 홍수를 예측해서 제방을 쌓지 않았다면 마을 몇 개는 수장되고 말았을 겁니다."
아직까지도 강물이 줄지 않아 구스강 인근의 일부 마을 사람들은 마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비가 오는 것은 처음 겪은 일이라 나는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이런 자연재해가 또 없었는지 잘 찾아봐.
이렇게 비가 많이 쏟아지는 해가 있다면, 분명 비가 내리지 않았던 해도 있을 거야."
"가뭄이 있었던 때를 찾아보겠습니다."
"홍수나 가뭄뿐 아니라 그 밖에 재해라고 불렸던 일들은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기록으로 남기도록 해.
그래야 나중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예방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