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왕국의 귀족들, 특히 영주 가문은 사병을 동원해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운다.
귀족으로서 권력을 누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군사력이기 때문이다.
영지와 영지민,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하고, 그 군사력을 기반으로 영지민들에게도 강력한 통치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아렌달에서는 그 어떤 귀족도 사병을 가질 수 없다.
호위를 위한 소수의 친위대를 가진 귀족 가문들이 있지만, 그들은 군사라기보다는 경호원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는 사람들이다.
왕국의 영주들처럼 영지민에 대한 생사여탈권도 없고, 이주를 위해 데리고 들어온 평민들도 귀족의 재산이 아닌 곳이 아렌달이었다.
귀족이라는 신분과 이주하며 분양받은 땅을 제외하고는 귀족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울 것이 없었다.
과거와 같은 권력을 누리지 못하는 불만이 없을 수가 없었음에도 아렌달의 귀족들은 다시 왕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영주이신 큰아버지보다 내가 훨씬 부유하잖아?
아렌달에서 귀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게 줄어들기는 했지만, 지금의 생활을 생각하면 참을 수 있는 정도지."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옛날을 추억하기 위한 여흥으로 충분하다.
아렌달만큼 살기 좋은 곳이 없는데 왜 왕국으로 돌아가겠어?"
아렌달의 인프라가 압도적으로 좋기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는 귀족들이었다.
자신들의 고향에 돌아갈 때마다 부족한 인프라에 실망과 함께 그곳에 살고 있는 친인척들을 안쓰럽게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 귀족들에게 귀족으로서의 권위쯤이야 조금 줄어든다고 문제가 될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귀족들의 권위가 줄어들었다고 다 포기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팔라스와 같이 평민들에게 적당히 공포를 심어 주어 신분의 격차만 잊지 않게 해 주어도 충분했다.
감히 귀족과 같은 위치에 서려는 마음만 죽여 놓아도 귀족이라는 이름의 가치는 유지되는 것이다.
물론 그 같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귀족들도 놀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는 학생이 리버 가문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체스터 가문의 후계자도 대학에 들어갔다고 하던데요.
체스터 가문에서는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보낼 생각인지 진작부터 준비를 해 왔다고 합니다."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렌달의 귀족들은 과거처럼 혈통만 믿고 권력을 탐하는 바보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아렌달이라고 해도 기득권을 그냥 내어 줄 귀족은 없었다.
그들 나름대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방식에 적응해 나가는 모습이었다.
"팔라스 마을의 사건 때문에 평민들이 다시 잠잠해진 건가?
귀족과 평민 사이의 트러블이 줄어들은 것 같은데."
"다행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제동이 걸리지 않았다면 분명 선을 넘는 평민들이 생겼을 겁니다."
리오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요즘 평민들의 행동을 보면 왕국 시절은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렌달은 왕국과 다르니까."
"그렇다고 해도 귀족은 귀족이지 않습니까?
귀족과 충돌이 일어난다면 평민이 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리다가는 지금까지 이뤄온 것들이 한순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지요."
다른 왕국과 비교하면 상상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 아렌달의 백성들이었다.
자칫 귀족과 트러블을 일으켜서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잃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이다.
리오는 누구보다 귀족에 대해 잘 아는 평민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많은 혜택을 누리는 평민이기도 했다.
아는 것도, 가진 것도 많은 평민이었기에 이렇게 걱정하는 모습도 이해가 되었다.
"괜히 일어나지도 않을 일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아렌달은 능력 있는 사람이 기회를 잡는 곳이니까, 귀족이라고 하더라도 능력이 없다면 평민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지 않겠어?"
"……"
그 말에 리오가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왜 평민인 제가 더 귀족들을 생각하고, 귀족이신 데우스님께서 평민들을 더 생각해 주는 건지…
가끔이지만 데우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혹시 데우스님께서 다른 사람이 되신 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다, 다른 사람이라니…"
나를 요리조리 바라보는 리오의 모습에 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지금의 아렌달을 만든 사람은 틀림없이 '나'였다.
"흠흠- 나는 귀족이나 평민이나 상관없이 능력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뿐이야.
능력이 있다면 평민이라도 귀족보다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어야지. 그래야 백성들이 기회를 받기 위해 더 노력하지 않겠어?"
그 말에 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귀족법을 무시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데우스님은 정말 신분 따위는 신경도 안 쓰시는군요."
"칭찬이지?"
"물론입니다. 데우스님의 그런 사상에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게 저인데요.
데우스님께서 능력주의자라서 참 다행입니다."
리오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리오도 지금처럼 열심히 하라고. 리오보다 더 나은 행정관이 나타나면 수석행정관 자리를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하하하- 아직 물러날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보다 나은 행정관이 나타난다면 수석행정관 자리는 웃으면서 내어 줄 수 있습니다."
"진짜?"
"당연하죠. 데우스님만큼 저도 아렌달을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리오의 대답에 나는 씨익 웃어 주었다.
아렌달에서 가장 많은 돈을 잡아먹는 곳은 단연 마법 연구 단지였다.
마탑은 물론이거니와 방위 기술 연구소, 방송국 등 돈 먹는 시설이 많았기 때문에 돈이 많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원래부터 과학 기술 아니, 마법 기술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돈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가끔 생각해 보면 마법 연구 단지에서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많은 자금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리오가 물어봐 달라고 해서 물어보는데, 마법사들은 도대체 어디에 돈을 사용하기에 이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 거야?"
"어디에 돈을 쓰냐니요? 다 데우스님께서 말씀하신 연구를 위해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도 영상 마법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마나석과 마법 시약을 사용하는 줄 아십니까?"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은데…"
내 말에 자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영상 마법뿐이 아닙니다.
데우스님의 지시로 새로운 연구도 많이 진행하고 있고, 새로운 마법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비가 필요합니다.
그뿐입니까? 이미 만들어진 마법 기술도 다른 왕국에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데요?
전부 다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비용입니다."
자하의 당당한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과학 기술 연구에, 아니 마법 기술 연구에 비용을 아끼지 말라고 한 게 바로 나였다.
절대로 후발주자들에게 기술이 따라잡히지 않도록, 언제나 마법 기술 만큼은 다른 왕국들을 압도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마탑에서는 내 요구를 이행하기 위해서 자금을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아렌달의 행정을 책임지는 리오는 마법사들이 돈 먹는 귀신이라고 불평했지만,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법사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자금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리오도 알고 있었기에 불평을 하면서도 지원을 아끼진 않았다.
"그래서 오늘 나를 부른 이유는?"
"방금 드린 말씀의 연장이지만… 마탑에 지원을 더…"
"얼마나?"
"10만 셀링 정도만…"
"……"
"아, 안될까요? 하하-"
멋쩍게 웃는 자하의 모습에 그에게 물었다.
"어디 도시라도 새로 만들게? 아니면 바깥의 영토라도 개척할 생각이야?"
"그게 아니라… 한 번에 너무 많은 연구하다 보니 예산이 빨리 고갈되어 버렸습니다."
"리오한테 또 한 소리 듣겠군."
내 말에 자하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드디어 데우스님께서 말씀하신 기술이 조금씩 빛을 보고 있습니다.
이번에 지원만 해 주신다면 반드시 초기 모델을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내가 말한 기술?
영상 마법 말고 다른 게 있었나?"
"예전에 기차를 만들고 그다음에는 하늘을 나는 배를 만들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
자하의 말에 눈이 번쩍 떠졌다.
"비행선? 지금 비행선을 만들고 있다고?"
"네. 그때부터 조금씩 연구를 해서 지금은 조그만 물체 정도는 띄울 수…"
"10만 셀링? 오늘 당장 지원해 줄게."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자하의 모습에 나는 말했다.
"그래서 비행선은 지금 어디 있어?"
"에일렌. 오랜만이야."
자하의 부름에 에일렌이 연구실로 올라왔다.
사람 몸통만 한 모형 배를 가지고 온 에일렌은 내 인사에 고개를 꾸뻑 숙이고는 말했다.
"아직 배를 띄우는 게 전부지만, 그래도 한번 해 볼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일렌이 곧바로 주문을 외웠다.
"……하늘을 자유로이 나는 새가 되리라. 플라이!"
그 주문과 함께 에일렌이 가지고 온 몸통만 한 모형 배가 공중에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일렌의 조작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바다를 떠다니듯 매끄러운 움직임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플라이 마법은 원래부터 있는 마법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조작하는 마법은 아니었습니다.
단순하게 몸이나 물건을 공중에 띄우는 마법이었죠."
"그런데 조작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는 말이지?"
"실제로 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해서 비슷하게 조작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아론 선장이나 항해사들의 도움도 받았고요."
자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비행기'가 아닌 하늘을 나는 배라고 만들겠다고 했기에 진짜로 배를 참고해서 비행선을 만든 것이다.
과학이 아닌 마법으로 만든 비행 물체였다.
"이 사이즈면 얼마나 날 수 있어?"
"마나석의 마력이 다하기 전까지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호오-"
"아직은 기초 모델입니다. 실제 배처럼 사람이나 물건을 실기에는 아직 무리가 많습니다.
그리고 높이 띄우기에도 아직은 기술이 부족합니다."
"그래도 날릴 수는 있는 거잖아."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기술이 아닐 수 없었다.
비행기가 아닌 배가 하늘을 난다. 이 얼마나 놀라운 모습이란 말인가.
"10만 셀링만 지원해 주면 비행선을 완성할 수 있어?"
내 말에 에일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놀랐다.
그 모습에 자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금 더 지원해 주실 수 있으면 조금만 더…"
"20만. 그 정도면 되나?"
"허업! 20만이요?"
"거기에 보너스도 준다. 어때?"
"무, 무조건 만들겠습니다."
자하의 대답에 에일렌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자하님! 비행선 연구에 제가 제일 열심히 참여한 거 아시죠?
20만 셀링 받으시면 저한테 가장 많이 주셔야 하는 거 잊으시면 안 돼요!"
"아니- 열심히 하는 거야 당연한 거지.
마법 연구를 위해서 필요한 곳에…"
"연구비 많이 안 주시면 저는 더 이상 참여 안 할 거예요.
제가 빠지면 보너스고 뭐고 못 받으실 텐데."
"뭐! 지금 연구비 때문에 땡깡을 피우겠다는 말이야?"
"아- 몰라요! 연구비 주실 거예요? 아니에요?"
자하와 에일렌이 연구비로 떠드는 와중에도 나는 하늘을 떠다니는 모형선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말 하늘이 아니라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자유로운 움직임이었다.
'과학이 아닌 마법의 힘으로 비행선까지 만들다니…'
마법의 위대함에 나는 박수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