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보비! 보비! 보비!"
보비의 골에 사람들이 경기장이 떠나가도록 보비의 이름을 연호했다.
리암 역시 그 이름을 따라 부르며 내 귀를 괴롭히고 있었다.
"보비! 보비!
데우스님 보십시오. 저희 맨체스터의 보비가 아렌달을 구했습니다.
영웅이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은 선수입니다. 하하하-"
흥분하는 리암에 노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겨우 공 좀 찬다고 영웅이라니… 과장이 심하구나. 리암."
"과장이라니요? 형님.
축구는 전쟁입니다. 전쟁에서 승기를 가지고 온 사람에게 영웅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축구는 전쟁이라…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듯한 표현에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필드의 분위기가 다시 한번 흔들렸다. 조금 전까지 보비를 연호하던 관중들도 숨을 죽인 채 필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지! 달려라. 빈센트!"
오직 단 한 명.
노엘만이 주먹을 불끈 쥐고 필드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세 명의 수비수를 따돌리며 슛을 날리는 빈센트를 보며 리암이 소리쳤다.
"마, 막아! 알렉스!"
그 목소리에 반응하듯 알렉스는 몸을 날려 빈센트의 볼을 막았다.
알렉스의 슈퍼 세이브에 관중들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필드를 향해 환호를 보내 주었다.
균형을 맞출 기회를 놓쳐서인지 노엘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한 모습을 보며 리암이 말했다.
"체스터에도 꽤 괜찮은 선수가 있었군요.
아렌달 최고의 골키퍼 알렉스가 아니었다면 막기 어려웠을 겁니다.
저런 선수는 최고의 팀에서 뛰어야 하는데…
형님. 괜찮으시면 우리 맨체스터에 저 선수를…"
"헛소리하지 마라. 리암.
브레튼 최고의 축구 선수를 데려가겠다니! 그리고 맨체스터가 최고의 팀도 아니지 않느냐.
리그에서 성적이 바닥을 치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아?"
"바, 바닥을 친다니요!!!
아직 선두권 싸움에서 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말싸움은 결국 경기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아렌달과 브레튼이 철도로 연결된 것을 기념하여 열린 맨체스터와 체스터의 친선경기는 맨체스터의 약소한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역시 보비야.
보비 같은 선수가 한 명만 더 있었더라면 맨체스터가 분명 리그의 선두를 탈환할 수 있었을 텐데."
"보비 같은 선수가 있다면 어느 팀이라도 선두 경쟁을 할 수 있을 거야."
"그럼 보비와 알렉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죽을 쓰는 맨체스터는 도대체 무슨 팀인 거냐?"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관중들의 목소리에 노엘이 신기한 듯 말했다.
"겨우 축구 선수들에 백성들이 이렇게까지 열광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축구 선수라고 해도 저들과 똑같은 평민이지 않습니까?
귀족이나 전쟁 영웅도 아닌 평민이 이 정도의 인기를 끌다니. 대단하네요."
"브레튼에서는 아닌가?"
"브레튼의 도시들도 스포츠를 도입하고는 있지만, 아렌달만큼은 아닙니다.
이렇게 많은 백성이 경기장을 찾을 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고요."
노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렌달에서 축구 선수들의 인기가 이렇게 오르기 시작한 것은 라디오를 통해 중계를 시작한 이후였다.
그전에는 리암같이 축구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나 관심을 가졌지, 이렇게 선수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보내고, 응원하는 것은 선수들의 이름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마찬가지로 가수들이나 배우들 역시 라디오와 신문에 목소리와 얼굴이 퍼져 나가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아렌달처럼 백성들이 문화생활을 즐기고 몰입하게 되면 브레튼도 똑같은 상황이 일어나겠지.
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해."
"그렇습니까?"
축구 선수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는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린 사람이 인기를 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건 귀족들에게는 조금 위험한 일 아닙니까?"
노엘의 말에 나와 리암은 고개를 갸웃했다.
"위험한 일이라니?"
"귀족보다 평민이 더 주목을 받게 되면 사회적으로 문제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아-"
'귀족 중심의 사회에서 평민 중심의 사회로 변해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건가?'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나 리암 같이 신분을 거의 따지지 않는 사람들이나 신경을 안 쓰는 것이지, 아렌달의 귀족들 중에도 노엘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아렌달에서는 더 이상 백성들이 귀족들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분명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 그건 사회가 발전해 나가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발전입니까?"
"다른 왕국들처럼 귀족들이 평민을 지배하는 사회를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무지하도록 유지하는 것이 낫겠지.
백성들이 무지하면 무지할수록 지배하기에는 편할 테니까."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래서는 사회가 발전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
사회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평민들이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은 기술을 익혀야 하는 거니까."
그 말에 노엘과 리암의 표정이 어색하게 변했다.
나도 그들도 귀족, 지배자의 계급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리 같은 귀족들의 힘이 약해져야 한다는 말이었으니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그럼 귀족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이대로 평민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하는 겁니까?"
리암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귀족들이 더 능력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굳이 자리를 내줄 필요는 없지 않겠어?
그리고 귀족들이 더 많은 기회를 받게 되는 것도 사실이니까. 기회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그리고 굳이 높은 자리에 있지 않아도 지배자의 자리에 있는 방법도 있다.
"그저 귀족이라는 신분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바보들이나 도태가 되는 것이지."
"그렇군요."
"그러니까 두 사람도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잘 준비해."
"아렌달 건설은 아무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리암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노엘이 웃었다.
"그건 데우스님의 생각에 달려 있는 것 아니냐?
아렌달 건설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구나. 리암."
"실수라니요? 지금까지 저는 실수한 적이 없습니다.
실수라면 제가 아니라 형님이 더 걱정입니다."
"나?"
"형님은 의원 자리도 내려놓지 않으셨습니까?"
리암의 말에 노엘이 나를 잠시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
아렌달 문학계가 들썩였다.
베르겐 왕국이나 브레튼도 아렌달의 문학계를 주목하며 기대하는 눈치였다.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당장이라도 뉴렌달에 가야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그 이유는 바로 대문호 샤를로트님의 신작이 출판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샤를로트님의 신작이라니… 너무 기대돼서 잠도 안 와요.
이번에는 어떤 작품으로 저를 설레게 해 주실지 너무 기대돼요."
"소문으로는 극단의 배우들이 주인공이 되는 작품이라는데?
유령도 나오는 신비로운 작품이라고."
이번 작품이 극장을 배경으로 한다는 이야기에 극단과 팬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 연극도 만들어지면 주인공은 당연히 오드리겠지?
오드리야말로 샤를로트님의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하는 배우잖아?"
"오드리라니? 언제 적 오드리야?
지금 뉴렌달 연극판에 가장 떠오르는 배우는 스칼렛이라고."
샤를로트도 그런 기대들을 알고 있었다.
"이번 작품은 아직 이블린에게도 오드리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어요."
"그럼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보지 못한 건가?"
"네. 지금까지 이 작품을 본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대문호 샤를로트님의 작품을 혼자서만 봤다는 사실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나 혼자 독점하고 있던 샤를로트님의 작품을 다른 사람들과 나눠야 한다니. 조금 아쉬운걸."
"그럼 공개하지 말까요?"
"그랬다가는 폭동이 일어날걸?"
"설마요."
"어쩌면 베르겐 왕국과 나르비크 왕국의 귀부인들이 남편들을 선동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몰라."
내 농담에 샤를로트는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돼."
물론 농담이었지만, 그만큼 동대륙에서는 샤를로트의 신작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정말로 이 방법이 효과가 있을까요?"
"당연하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작품을 보고 싶어서 아렌달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날 거야.
어쩌면 완결이 될 때까지 아렌달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있겠지."
"그래도 이런 건 처음으로 하는 방식이라 조금 걱정이 돼요."
지금까지 소설이나 시 등의 문학 작품들은 한 번에 작품 전체가 공개되었다.
하지만 이번 샤를로트의 신작은 새로운 방식으로 공개가 된다.
연재.
완결까지 한 번에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신문을 통해 연재할 계획이었다.
"한 번에 완결까지 보여 주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으면 어쩌죠?"
"그 비난 이상으로 작품에 미치는 사람들도 많겠지.
다음 연재는 언제일까? 다음에는 어떤 내용일까? 상상하며 더 작품에 빠져들지 않겠어?"
"그럴까요?"
샤를로트의 걱정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렌달 신문을 통해 공개된 샤를로트의 신작은 내 예상대로 대단한 반응을 이끌어 냈다.
한 번에 공개되지 않는 작품에 당장 뒷부분의 내용을 알려 달라는 사람들이 뉴렌달 관청과 아렌달 가문의 저택 앞에 모여들었다.
거의 폭동에 준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샤를로트와 아이들이 살짝 겁을 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만큼 샤를로트의 작품은 대성공을 이루었다.
아렌달 신문은 어둠의 경로를 통해 대륙 곳곳으로 퍼져 나갔고, 그 신문에 들어 있는 아렌달의 이야기와 문화들이 샤를로트의 작품 덕분에 대륙에 전해졌다.
당연히 아렌달을 동경하는 사람들도 그만큼 늘어나게 되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이 신문을 보니 아렌달은 정말 환상적인 곳인 것 같아."
"이 그림을 사진이라고 했던가? 정말 시간을 붙잡아 놓은 것 같은데.
아렌달에서는 이런 기술이 당연하다는 말이지?"
그리고 아렌달을 찾아오는 관광객들도 다시 한번 늘어나기 시작했다.
귀족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아렌달의 방문을 기피하던 귀족들도 샤를로트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빨리 읽기 위해서 아렌달을 찾아올 정도였다.
"뉴렌달의 극장에서는 벌써 연극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던데…
샤를로트님의 신작을 완결까지 본 사람이 있는 걸까요?"
"제가 알기로는 체스터 가문의 이블린님도 완결을 보지 못했다고 하던데요?
이블린님이야 말로 샤를로트님과 가장 친분이 깊으신 분인데, 그분도 완결을 못 봤다는데 설마 다른 사람이 먼저 완결을 봤을까요?"
작품이 완결되면 바로 연극에 올리기 위해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이번에 아렌달을 찾아온 귀족들의 숫자만 100명이 넘습니다."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하는 리오에 볼튼도 옆에서 거들었다.
"데우스님. 해안가 호텔도 더 이상 방이 없습니다."
귀족들이 너무 많이 아렌달을 찾아오는 바람에 뜻하지 않는 호황을 맞은 호텔이었다.
"귀족들이 많이 오면 돈도 많이 벌 수 있으니까 좋은 거 아니야?"
"한 번에 너무 많은 귀족이 찾아와서 사고가 날까 봐 그런 겁니다."
"아렌달에서는 귀족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다들 알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사고 치는 귀족이 있으면 잡아서 교도소에 가둬 버려."
"너무 쉽게 이야기하시는 것 아닙니까?
저는 아직도 귀족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 움츠러드는 걸요."
"귀족을 보면 움츠러든다고? 리오가?
근데 왜 나나 리암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거야?"
내 말에 리오는 어색하게 웃었다.
"데우스님이야 이제 익숙하니까 그렇죠. 리암님도 그렇고요.
어떤 면에서는 평민보다 더 평민 같아 보이시니까…"
리오의 말에 그를 살짝 흘겨보니 리오가 당황하며 말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만큼 데우스님이 대단하시다는 말입니다."
"내가 대단하다는 건 나도 알아.
아무튼, 이번에 방문한 귀족들은 제법 오래 머물 수도 있으니까,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잘 관리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