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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현대인-110화 (110/169)

110화

"죄송합니다. 데우스님.

뉴렌달, 인터리아, 코아스탈 등 모든 도시에 뒷돈을 받은 관리자들이 있었습니다."

리오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너무 어이가 없었는지 화조차 내지 않는 리오였다.

"뇌물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길래 다 썩어 있다는 거야?"

"뉴렌달에서만 18명이나 나왔습니다. 데우스님께서 도시에 있는데도 뇌물을 받은 녀석이 18명이나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른 도시들까지 모두 합치면 100명에 가까운 관리자가 뇌물을 받았습니다."

100명에 가깝다는 말은 100명은 넘지 않는다는 말.

그 정도면 아직 도려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내가 뇌물을 받지 말라고 했는데도 받았다면 책임을 져야겠지."

이미 행정관 몇 명이 뇌물을 받다가 파면된 전례가 있는 만큼 이번에 걸린 사람들도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부패한 관리들로 인해 연방이 썩어 가는 것을 그냥 둘 수는 없는 법.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잘못을 하지 않도록 강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 중요했다.

"파면하는 걸로…"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데우스님."

"?"

"귀족들은 어떻게 합니까?"

당연히 아렌달에는 신분이 귀족인 행정가들도 있다.

특히 젊은 행정가 중에는 과거 전문학교나 이후에 만들어진 대학을 졸업하고 행정가가 된 귀족들이 여럿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렌달로 탈주한 3개 영지는 아직 영주 가문의 사람들이 도시를 운영하고 있었다.

리오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귀족들은 뇌물을 받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뇌물이 아니라 선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귀족들이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귀족들 입장에서는 잘못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건 귀족법에 넣을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일들이었으니까요."

리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이라는 신분이 유지되고 있는 한 그들에게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는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니 잘못하지도 않은 일로 처벌을 받는 것은 귀족 행정가들에게는 억울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귀족 행정가들이 뇌물을 받고 어떤 대가를 약속했다거나 하진 않았나?"

"지금까지 알아본 바로는 없었습니다.

그냥 자신들에게 보내진 선물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대가를 약속한 것이 아니니 뇌물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들이다.

"선물을 받아 온 귀족들을 처벌하면 이건 이것대로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가뜩이나 귀족법 때문에 생긴 외부 귀족들의 비난을 아렌달의 귀족들이 막아 주고 있는 상황에서 아렌달의 귀족들을 처벌한다면 데우스님에게 좋지 않은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귀족이라는 거 생각보다 훨씬 귀찮네."

"데우스님께서도 귀족이십니다."

"하하. 그렇네."

리오의 말대로 나 역시 귀족.

아렌달 가문과의 친분을 위해 선물을 보내 주는 귀족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들도 나에게 뇌물을 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대한민국과 다르게 귀족과 평민으로 신분이 나누어져 있는 이세계에선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당장 신분제도를 없애야 할까?

'그건 불가능하겠지.'

언젠가 귀족과 평민이 다르지 않은 시대가 오면 모를까 지금 당장 귀족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귀족이라는 명칭을 없앤다고 귀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사람들의 인식에서 귀족과 평민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신분제도는 없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귀족들이 행정가가 되지 못하게 막을 수도 없는 일이지.'

귀족들을 똑같이 벌하지 못한다고 그들의 기회를 빼앗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귀족을 역차별하는 것일 뿐 아니라 나 역시 물러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냥 귀족들에게 선물을 주고받지 말라고 해도 안 되겠지?"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귀족들에게는 뼛속까지 자리를 잡은 문화일 텐데요."

리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한가지 대한민국의 법이 떠올랐다.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어쩌고 하는 긴 명칭 대신 법안을 입안했던 대법관의 이름으로 불리는 법률.

일명 김영란법.

물론 이 법률의 내용을 전부 이세계에 적용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 내용 중에 적용이 가능한 것은 분명 있었다.

'3만원 이상의 선물이나 대접은 안된다고 했었던가?'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선물의 금액에 제한을 두게 되면 어떨까?"

"금액이요?"

"선물을 받더라도 돈이 되지 않는 물건들만 받을 수 있게.

그럼 선물을 주고받는 귀족들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뇌물로서 의미도 퇴색되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별로 가치 없는 선물을 받고 청탁을 들어주는 것은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잖아.

겨우 몇 푼짜리에 청탁을 들어준다면 자신의 명예가 싸구려라는 걸 인정하는 것일 테니까."

싸구려 행정관을 배출한 귀족 가문. 자신의 이름뿐 아니라 가문의 이름에도 먹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일 귀족은 없을 것이다.

돈이 없어서 선물을 받는 귀족은 없다. 오히려 돈이 있어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주는 것이 귀족의 선물이다.

더 많은 재물을 탐내는 귀족도 있겠지만, 그들은 아렌달이라는 연방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뇌물을 줄 만한 멍청이는 없다.

"이번 감찰에서 걸린 행정관들은 철저하게 조사해서 구분해.

청탁을 받은 행정관들은 이전의 경우와 같이 파면. 청탁 없이 선물만 받은 행정관들은 벌금."

"귀족들이 벌금을 낼까요?"

"벌금이라고 해 봐야 얼마나 된다고…"

아렌달에 들어와 있는 귀족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스톨이나 엔나, 기르만 같이 영주였던 가문들, 그리고 바깥의 영토를 분양받고 이주를 했던 귀족들은 그동안 뉴렌달 브랜드를 생산하며 쌓은 재물이 있었다.

귀족 행정가들은 그 가문 출신의 귀족들이 대부분일 테니 벌금을 내라고 하면 기분이 상할지언정 벌금을 내지 못하겠다고 따질 귀족은 없을 것이다.

내 예상대로 새로운 법에 아렌달의 귀족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비록 선물을 통해 자신들의 재력을 과시하지는 못했지만, 가문에 재물을 사용하면서 재력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전과 달리 외부로 재물이 나가는 것도 아니었기에 더 좋아하는 귀족들도 있었다.

선물로 줄 수 있는 금액의 상한선이 정해지면서 가장 곤란해진 것은 전 스톨 백작인 장인이었다.

"아버지. 이제 그 용돈 못 주시는 거 모르세요?"

"이건 선물이 아니라 용돈이지 않느냐. 겨우 1천 셀링밖에 안 되는데…"

"겨우 1천 셀링이라니요. 평민에게는 몇 달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잖아요."

"나에게는 이제 돈밖에 없는데 돈도 마음대로 못 쓰게 하다니… 그건 너무하지 않느냐!"

장인의 말에 샤를로트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용돈을 주고 싶으면 스톨 가문의 아이들에게 주세요.

가문 안에서의 선물은 문제가 안 된다고 하잖아요."

"당장 그 악법을 없애라고 건의를 해야겠구나."

그런 장인에 샤를로트가 고개를 저었다.

"악법이라니요…"

장인의 분노에 아리아가 말했다.

"할아버지. 이제 용돈 안 주셔도 괜찮아요."

"할아버지에게 용돈 받는 게 싫어진 거니?"

"사람들이 그러는데 아렌달 가문이 이 세계에서 제일 부자래요.

그러니까 용돈은 안 주셔도 괜찮아요."

"허허허-"

똑부러지는 아리아이 말에 장인은 할 말을 잊어버렸는지 허허 웃고 말았다.

아렌달의 축제는 다른 도시들과 많이 다르다.

보통의 왕국에서 축제라 하면, 국왕의 탄신제나 추수가 끝난 후에 있는 감사절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아렌달의 축제는 누군가를 찬양하거나 어떤 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즐기기 위한 축제, 그저 놀기 위한 축제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렌달의 축제는 다른 어느 곳의 축제보다 자유로웠다.

길거리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경기장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휴식을 위해 해안이나 술집 등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까지.

자기만의 방법으로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샤를로트는 오드리의 초대를 받아 아침 일찍 나갔다.

체스터 부인이나 다른 귀부인들과 함께 연극을 보고 다과회를 가질 것이다.

덕분에 나는 샤를로트가 없는 집안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시녀들이 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나 나름대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 그림을 그리고 있던 아리아가 내게 말했다.

"아빠. 오늘은 축제라고 하던데 밖에 나가서 구경해도 되요?"

"밖에 나가고 싶다고?"

"네! 아렌달의 사람들이 어떻게 축제를 보내는지 보고 싶어요."

축제 기간에만 볼 수 있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는지 스케치북을 품에 안은 채 내게 말하는 아리아였다.

"도시의 축제를 보고 싶다면 한눈에 보이는 곳이 있지."

"정말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기대하는 아리아의 모습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곳에 가면 잘 보인단다."

뉴렌달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하면 바로 여기.

"그래서 아가씨들을 전부 데리고 오신 겁니까?"

황당해하는 자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만큼 도시를 구경하기 좋은 곳이 없다고."

증축을 마치고 이제는 15층짜리 건물이 되어 버린 마탑의 꼭대기 층.

마탑주 자하의 연구실이었다.

신기한 물건들이 잔뜩 있는 연구실인 만큼 아리스와 아리엘는 벌써 이것저것 만져 대며 놀고 있었다.

그리고 아리아는 창틀에 기대서 도시의 전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와- 아빠. 도시가 한눈에 보여요."

"잘 보이지. 더 잘 보이게 해 줄까?"

"진짜요?"

아리스의 물음에 나는 작은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자하를 불렀다.

"자하. 이리 와서 마법 좀 써 줘."

"네?"

"아리아가 도시를 잘 볼 수 있게 마법 좀 사용해 줘."

"…그거라면 저쪽에 망원경이 있습니다. 그걸 가져다가 보시면… 아리엘 아가씨! 그건 위험합니다."

다급하게 아리엘을 쫓아가는 자하를 보며 나는 그가 가리킨 망원경을 찾았다.

망원경을 아리아에게 가져다주자 아리아는 망원경을 통해 들어오는 도시의 모습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와- 엄청 잘 보인다."

그리고는 가지고 온 스케치북을 펼치고는 그 안에 도시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나는 옆에서 구경하며 조금 놀라고 있었다.

내 아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아리아에게는 대단한 재능이 있었다.

작은 손으로 빠르게 그려 가는 도시의 모습은 망원경을 통해 보는 것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연필로 빠르게 스케치를 마친 아리아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망원경으로 도시를 구경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케치북과 함께 가지고 온 색연필을 손에 쥐었다.

"와--"

그 옆에서 아리아의 작품을 구경하던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오고 말았다.

여러 가지 다양한 색으로 변해 가는 뉴렌달은 예술적 감성이 떨어지는 내가 보기에도 아름다웠으니까.

다채로운 색으로 채워진 도시를 보며 아리스는 활짝 웃었다.

"다 그렸다!"

그 목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고, 자하와 볼튼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리아 아가씨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마치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군요."

두 사람의 칭찬에 아리아의 귀가 발갛게 물들었다.

나는 그 모습에 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아리아. 그런데 뉴렌달은 이렇게 다양한 색이 아니지 않니?"

"회색은 별로 안 예쁘잖아요?

저는 우리 도시가 예쁜 색으로 가득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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