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아렌달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귀족들의 노역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귀족들은 어떻게 귀족이 노역할 수 있냐며 반발했고, 교도관들을 무시하며, 노역을 거부했다.
"교도소에 가둔 것으로도 모자라 귀족에게 노역을 시키다니!
데우스 아렌달은 정말 귀족이 맞는 것이냐!!"
"귀족법을 어기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아렌달은 귀족법에 따라 우리를 대우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노역을 거부하는 귀족들에게는 예정되었던 굶주림의 시간이 다가왔다.
"정말 먹을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겁니까?"
"노역을 거부하는 귀족들에게는 빵 한 조각도 내주지 말라는 데우스님의 지시다."
"그러다가 저희도 위험에 빠지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귀족님들이지 않습니까?"
"아렌달이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일부 교도관들이 점점 험악해지는 교도소의 분위기에 긴장하면서도 지시를 잘 지키고 있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겁박에도 교도관들이 지시를 이행하자 결국 노역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굶주림을 거의 겪어 보지 못했던 이들이었기에 귀족들의 저항은 길지 않았다.
"생각보다 빨리 무너졌네요."
"귀족들에게는 그 정도의 굶주림도 버틸 수 없을 만큼 고통이라는 거겠지."
"왕국의 백성 중에는 하루에 한 끼도 구하기 어려운 백성들이 많을 텐데, 겨우 이 정도의 굶주림도 버티지 못하다니. 아무리 굶주림에 내성이 없다고 해도 며칠은 더 버티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나도 이렇게 빨리 무너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귀족들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귀족으로서의 권위를 지키려고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었고 말이다.
심지어 죽지 말라고 물과 소금은 주었는데도 다들 굶주림에 삽과 곡괭이를 들고 노역을 시작했다.
'이런 걸 보면 귀족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지 알 수 있지.'
물론 귀족으로서의 기개가 높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교도소에 들어갈 일도 없을 것이다.
"귀족 가문에서 이들에게 노역을 시킨다고 항의의 메세지가 오더라도 무시해.
죄를 저질렀으면 죗값은 치러야 하지 않겠어?"
내 예상대로 죄수들이 속한 귀족 가문에서 아렌달을 향한 비난의 메세지가 쏟아졌다.
다른 귀족 가문에서도 귀족들에게 노역을 시키는 것은 너무한 일 아니냐는 목소리를 보냈다.
귀족법을 운운하며 노역을 멈추라는 목소리가 대륙 곳곳에서 들려왔지만, 나는 그 목소리들을 모두 무시했다.
그리고 아렌달에서는 귀족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렸다.
아렌달에서는 귀족법이 아닌 아렌달법을 따른다.
귀족이라도 범죄를 저지르면 법의 심판을 받고, 죗값을 치러야 했다.
귀족법을 무시하는 메세지에 대륙의 귀족들이 아렌달에 살고 있는 귀족들을 운운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오랜 시간 나에 대해 이해하고, 아렌달 문화에 물든 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저 법을 지키면 되는 것 아닌가?"
"아렌달은 큰 죄만 짓지 않는다면 귀족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곳이다."
아렌달에 살고 있는 귀족들이 이런 목소리를 내자 왕국의 귀족들은 어이없어했지만,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이 시큰둥하니 왕국에서도 아렌달의 메세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동대륙에서 아렌달과 척을 지기에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불만이 있어도 어쩔 수 없었다.
차마 가문의 일원이 노역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가문들은 죗값에 어울리는 대가를 치르고 죄인들을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은근히 용돈 벌이 정도는 되네."
"그 이상으로 손해가 발생하고 있는 건 아십니까?"
"손해?"
"아렌달을 찾아오던 귀족님들의 숫자가 꽤 줄었습니다.
덕분에 백화점의 매출도 많이 줄었고요."
귀족법으로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일부 귀족들이 아렌달을 방문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시 아렌달을 방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세계에서 아렌달만큼 그들을 즐겁게 해 줄 곳은 없었으니까.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을 것이다.
평민들은 이야기로밖에 접하지 못하는 아렌달을 귀족들은 방문할 수 있으니, 평민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아렌달을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평민들 말고 귀족들에게도 보여 줘야 했다.
"귀족이라면 아렌달을 찾을 수밖에 없을 거야."
"자신들의 권위가 통하지 않는 곳이라고 기피 하지 않겠습니까?"
리오의 말에 나는 씨익 웃었다.
"귀족들에게 명분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지."
"명분만큼이나요? 그게 뭡니까?"
"유행."
"아! 그렇군요."
"귀족들, 특히 귀부인들에게 유행에 뒤쳐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야.
아렌달의 문화는 이미 동대륙을 넘어 다른 대륙까지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지.
그 유행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렌달을 찾겠지."
"음- 이런 걸 생각하시다니.
평소에는 잊어버리지만, 역시 데우스님도 귀족은 귀족이시군요."
"뭐야? 나는 귀족같이 안 보인다고 말하는 거야?"
"데우스님이 보통의 귀족들과 다르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리오였다.
나는 그 모습에 눈에 힘을 주고 리오를 다그쳤다.
"행정관 리오. 그대는 지금 귀족모독죄로 잡혀 들어가고 싶은 건가!"
"그렇게 말씀하셔도 하나도 안 어울리십니다."
"허!"
"그럼 저는 상인 길드장과 저녁 약속이 있어서 가 보겠습니다."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몸을 돌리는 리오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상인 길드장과 저녁 약속이라니!
설마 뒷돈을 받는다거나…"
"……저는 뒷돈 같은 건 안 받습니다."
"장난이야. 어서 가 보라고."
"아렌달 수석행정관으로서 자존심이 있지 뒷돈 같은 걸 왜 받습니까?"
당당하게 고개를 드는 리오의 모습에 나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역시 리오는 믿을 수 있는 수석행정관이야.
오늘 저녁 약속도 당연히 리오가 계산하는 거겠지?"
"……그, 그건…"
당황하는 모습에 지긋이 바라보자, 리오가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물론 제가 계산하는 거죠."
"돈에 관해서는 상인들과 엮이지 말라고."
"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집무실을 나가는 리오를 나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백성들이 주체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서 기득권층인 귀족들과의 갈등 외의 다른 문제도 있었다.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조그만 이득이라도 더 취하기 위해 부정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행정관이나 현장의 관리자들에게 뇌물이나 선물을 주며 기회를 얻으려는 사람들이나, 사람들을 속여 남의 것을 갈취하려는 사람들같이 사회범죄자들이 발생한 것이다.
영주가 직접 기회와 재물을 분배했던 시기에는 없었던 범죄들.
백성들이 돈을 벌고 재산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일어나기 시작한 범죄들이었다.
"상품을 하나의 상단에 다 넘겨줬네."
"알아보니 친동생을 통해 상단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상단에 친동생이 있었나 보군."
내 물음에 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행정관이 뉴렌달 브랜드 중 일부 상품을 한 상단에만 줘서 상단이 독점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다.
상단에서 행정관의 동생이 가진 연줄을 이용해서 기회를 받은 것이니 머리를 잘 쓴 것일 수도 있었다.
나 역시 연줄을 이용해서 베르겐 왕궁에서 셀링을 빌리거나 한 적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품을 독점하면서 이득을 너무 많이 챙겨 다른 상단에게 걸렸다는 것이다.
"일부 상단에서는 행정관이 불공정한 이득을 안겨 줬다고 처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행정관은 얼마나 받은 거야?"
"이제 막 만들어진 상단이라 많이 받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저 선물 조금 받은 게 전부인 듯합니다."
"많이 받지도 못할 거면서 왜 이런 짓을 한 건지. 쯧쯧."
아렌달의 행정관으로서 이왕 뒷돈이나 선물을 받을 것이었다면 크게 받아야지 겨우 몇백 셀링짜리 뇌물 몇 개 받고 이런 짓을 저지를 줄이야.
물론 그렇다고 뇌물을 받으라는 말은 아니었다.
"상단은 해체. 행정관은 파면."
"받은 것에 비해 처벌이 너무 강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뒷돈 받다가 걸린 녀석들은 전부 파면이었잖아?"
"그, 그렇기는 하죠. 근데 받은 뇌물이 너무 소소해서…"
"소소하든 아니든 받지 말라고 했으면 받지 말았어야지.
지금까지 몇 명이나 파면되었던 걸 모르지는 않았을 것 아니야."
뉴렌달에서는 나와 리오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에 뒷돈이나 뇌물을 받는 행정관이 없었지만, 다른 도시나 지방에서 이미 몇 명의 행정관들이 상단이나 자영업자들에게 뇌물을 받다가 파면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근데 요즘 들어 뇌물을 받다가 걸리는 행정관들이 왜 이렇게 나오는 거야?
이참에 뉴렌달부터 싹 전수 조사를 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뉴렌달에서는 지금까지 없었는데요."
"그렇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데우스님과 제가 있는데, 뉴렌달의 행정관 중 뇌물을 받는 녀석이 있을까요?"
"등잔 밑이 어두운 것일 수도 있지 않겠어?"
내 말에 리오가 불안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렌달의 수석행정관으로서 행정관들이 계속해서 처벌을 받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뉴렌달에서 뇌물을 받은 행정관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행정관 관리를 소홀히 한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었다.
"기왕 생각난 김에 감찰관을 뽑아서 행정관들을 조사해 봐야겠어."
"감찰관을 뽑아서 조사한다고요?"
"확실하게 조사해서 앞으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지.
행정관들이 뇌물을 받는 게 당연한 문화가 되어서는 안 되잖아?"
뇌물을 주고받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전에 싹 정리를 해 놓는 것이 아렌달의 미래를 위해서는 필요했다.
내 말에 잠시 침묵한 리오는 결심했는지 내게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감찰관을?"
"네. 행정관의 부정은 수석행정관인 제 책임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직접 잡아서 처벌하겠습니다."
리오의 결연한 눈빛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뉴렌달에서부터 시작된 전수 조사에 행정관들이 숨을 죽였다.
행정관들이 숨을 죽이자 그에 따라 상단이나 자영업자들도 숨을 죽였고, 그들과 관련된 백성들마저 자신들에게 피해가 미치지 않기를 바라며 멀리서 지켜봤다.
"내 친구의 아들 녀석이 인터리아에서 행정관으로 일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조금 심각하다고 하더군.
어쩌면 행정관들이 많이 부족해지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하네."
"행정관들에게 뇌물을 주지 않은 상단이 하나도 없다는 말도 돌고 있잖아.
행정관들의 처벌이 시작되면 상단들도 처벌을 피하기 어려울 거야."
"상단들뿐인가? 지금 자영업자들 중에서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이들이 많잖아."
일부 백성들은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냐는 목소리를 내었지만, 리오는 그 목소리들을 싹 무시하고 아렌달의 모든 행정관을 하나하나 조사했다.
뉴렌달의 조사가 끝나자마자 인터리아와 코아스탈, 그리고 스톨과 엔나, 기르만까지 어느 한 곳도 무시하지 않고 싹 털어 냈다.
그리고 감찰 결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데우스님. 다 썩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