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나르비크 왕국과의 거래대로 아론 선장의 선단이 남대륙을 향해 출발했다.
아렌달의 동력선이 나르비크 왕국의 항해사들에게 충격과 좌절을 안겨 주었다는 것은 굳이 듣지 않아도 될 이야기였다.
아무리 아렌달이 발전했다고 해도 기술력 차이가 이렇게까지 크게 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렌달에 오기 어려웠던 나르비크 왕국의 백성들도 아렌달에 대해 알게 되겠지.
뉴렌달 브랜드의 상품에 동력선 같이 첨단 기술을 경험해 보면 그들의 마음속에도 아렌달에 대한 동경이 생기지 않겠어?"
"나르비크 왕국의 백성들도 브레튼의 백성들과 같이 마음속에 변화의 씨앗이 심어지겠군요."
물론 영주들이 적극적으로 아렌달의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브레튼의 백성들은 분명 다른 왕국의 백성들과는 조금 달랐다.
'아렌달의 백성들만큼은 아니었어도, 브레튼의 백성들도 생각을 하지.'
그저 시키는 대로만 일하던 백성이 아닌 생각하는 백성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중에 가장 많이 생각하는 백성이 바로 아렌달 대학을 졸업한 인재들이었다.
"이번에 대학을 나온 인재들은 어때?"
"아직까지는 눈에 띄는 친구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반 같은 녀석들이 많았으면 좋겠지만, 어반은 특이한 녀석이지 않습니까?"
"매년 어반 같은 친구들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지."
"그래도 대학을 나온 녀석들 아닙니까?"
전문적인 기술을 배운 인재들이었기에 현장에서는 가장 선호하는 인재들이기도 했다.
"일단 행정을 배운 녀석들은 이번에 아렌달로 합류한 영지들에 파견을 보냈습니다.
기존과 다른 아렌달의 행정 시스템을 도입하려면 아렌달에서 배운 인재들이 도움이 될 겁니다."
"괜찮네. 행정 쪽 인재가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인재들을 배분해 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대학을 나온 인재들이야 뉴렌달에서 일하고 싶어 하겠지만, 낙후된 시스템을 스스로 개선해 보는 경험도 나중을 위해서는 필요할 것이다.
언젠가는 다른 도시에서 그들을 필요로 할지도 몰랐으니까 말이다.
마법 연구 단지에는 마탑과 방송국, 방위 기술 연구소뿐만 아니라 마법 아이템 제작소나, 마력석 세공소 및 마력석 충전소 등 마법과 관련된 시설들이 모여 있었다.
마법 연구 단지는 마법 기술이 모두 모여 있는 만큼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관리를 받고 있었다.
다른 왕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지금은 기술 유출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세공일을 그만두고 건설이나 배울까?"
"아무리 그래도 세공을 그만두고 건설은 아니지 않아?
받는 임금도 다를 거고, 특히 건설은 몸이 너무 힘들잖아."
"그래도 연구 단지에 소속되어 있는 한 남들과 같은 일상을 보내지 못하잖아?
얼마 전 축제 때만 해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즐기지 못했고 말이야."
"그, 그건 그렇지만…"
마법 연구 단지의 기술자들은 남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에 불만이 생기고 있었다.
"연구 단지의 기술자들은 아렌달 어느 현장의 일꾼들보다 아렌달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마법이 연관된 기술은 더 정밀한 기술이 필요한 만큼 피로도가 높은 일임에도 외부의 일꾼들보다 긴 시간 일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높은 임금을 받는 것도 연구 단지의 기술자들이지."
아렌달에서 평균적으로 가장 높은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연구 단지의 기술자들임을 레이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레이가 하고 싶은 말은 뭐지?"
"연구 단지의 기술자들도 평범한 도시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평범한 도시 생활…"
"네. 도시의 다른 사람들처럼 문화생활도 즐기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레이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연구 단지의 기술자들끼리 노조라도 만든 건가?'
그런 내 웃음에 레이가 불안한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 저희가 이렇게 사는 것도 다 데우스님의 은혜 덕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그저 남들과 똑같이…"
"아- 됐어."
당황한 듯 말이 많아지는 레이의 모습에 다시 한번 웃음이 나왔다.
자크의 수제자였던 덕분에 세공사들의 리더가 된 레이였다. 자크가 은퇴한 이후에 어쩔 수 없이 대표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앞장서서 이야기할 만큼 담이 큰 친구는 아니었다.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이 조건들은 마법 연구 단지 전체의 생각인 거야? 아니면 세공사들의 생각인 거야?"
"그, 그게... 저희 세공사들이 이런 건의를 하겠다는 말을 듣고 다른 기술자들도 함께하겠다고…"
"마탑의 마법사들이나, 방위 기술 연구소도?"
"아, 아니요. 마법사님들은 가족도 없으시고, 문화생활도 즐기시지 않으셔서 따로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마법사들이야 웬만해서는 마탑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 사람들이니 기술자들과 같은 생각을 품을 일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방위 기술 연구소는 자신들이 왜 그렇게 관리를 받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방위 기술 연구소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레이가 아닌 마무가 나를 찾아왔겠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내 눈치를 보는 레이에게 말했다.
"마법 연구 단지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술들이 얼마나 중요한 기술들인지는 레이도 알고 있겠지?"
"네."
"그만큼 기술이 유출되지 못하게 관리를 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다른 왕국에서도 탐내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
만약 아렌달에서 관리를 느슨하게 한다면, 연구 단지의 기술을 노리고 너희에게 손을 쓰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까 말했던 기회를 달라는 것은 그만큼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거겠지?"
내 말에 레이는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행정관들과 이야기를 해 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아- 그런데 이건 알아 둬.
기술자들에게 시간을 나눠 주는 만큼 임금은 줄어들 거야."
"허업!"
"그리고 만약 중요한 기술이 유출되는 불상사가 생기면 그 책임 역시 기술자들이 물어야 할 거야.
레이가 연구 단지의 기술자들에게 내가 한 이야기를 꼭 전해 주길 바라."
"아, 알겠습니다."
노조측이 요구 사항을 건의했다면 사측에서도 조건을 걸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핵심 기술자들에게 당연한 조건을 걸었을 뿐, 특별히 과한 조건도 아니었다.
"정말 괘씸한 놈들 아닙니까?
누구보다 많은 임금을 받고 있으면서 이런 요구까지 하다니."
리오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만히 듣다 보면 리오는 은근히 꼰대 기질이 심하단 말이지.'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아니- 갑자기 웃긴 이야기가 떠올라서."
"재밌는 이야기면 혼자만 웃지 마시고 저도 알려 주십시오."
"아- 나중에 알려 줄게."
레이가 가지고 온 기술자들의 요구 사항은 들어주기로 했다.
그들의 말대로 평범한 아렌달의 백성들이 누리고 있는 문화생활이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을 그들은 누리고 있지 못했기에, 처음 레이가 요구 사항을 말했을 때부터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사실 다른 왕국에서도 마나석 세공은 이미 세공사들의 영역으로 넘어간 일이었다.
과거 마법사들의 기술이었던 마나석 세공은 더 이상 마법사들의 기술이 아니었고, 마법 아이템 제작 역시 마법사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법 무기를 시작으로 마법 아이템이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지금 시대에는 마법사들이 모든 것을 하기에는 마법사의 숫자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아렌달의 기술이 다른 왕국의 기술보다 앞서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만큼 다른 왕국에서도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따라올 수 있을 만한 기술들이었다.
'그래도 다른 왕국에 따라잡힐 생각은 없다.
아무리 땅이 커지고 인구가 늘어났다고 해도 기술적 우위는 중요하다는 말이지.'
마법 연구 단지의 기술뿐만이 아니다.
건설 기술이나 운송 기술, 그리고 가공, 생산이나 아렌달에서 특허를 내려 준 사소한 기술들까지.
무엇 하나 다른 왕국들에 밀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데우스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어떻게 하면 기술자들을 더 괴롭힐 수 있을까 하는 생각?"
"그, 그게 뭡니까?"
"기술자들은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오니까."
"제, 제가 기술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참 다행이네요."
질린 얼굴로 말하는 리오의 모습에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기술만능주의자인 나에게는 행정 기술도 기술이라네. 수석행정가 양반."
"……저는 행정 회의가 있어서 그만 나가 보겠습니다."
도망치듯 나가는 리오의 모습에 볼튼이 웃으며 말했다.
"리오님이 행정 일을 배우라고 할 때 거부하길 잘한 것 같군요.
하마터면 저도 데우스님께 괴롭힘을 당할 뻔했습니다. 하하-"
"기사는 기술자라고 하기 조금 그런가?
그래도 검술도 따지고 보면 검을 다루는 기술이잖아?"
"……"
요즘 나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고민이었다.
"그러니까 아리아에게 친구가, 그것도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말이지?"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샤를로트는 나를 정말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냥 아이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뿐인데 왜 그렇게 심각해요?"
"샤를로트. 아리아에게 접근한 놈이 나쁜 생각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어떡하지?"
"무슨 소리예요? 겨우 7살짜리 아이가 나쁜 생각이라니…"
"아니- 생각해보라고. 아리아가 보통 아이야? 아니잖아.
아렌달 가문의 대공녀라고."
샤를로트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하아- 아리아를 학교에 보낸 건 당신이라고요.
그리고 아리아에게 학교에 가서 또래의 친구들을 사귀라고 한 것도 당신이라고요."
"…그거야 또래의 '여자' 친구들을 사귀라고 했던 말이지."
내 말에 샤를로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하아- 데우스!"
"샤를로트님. 그렇게 화내시면 아기씨에게 안 좋습니다."
시녀의 말에 화를 가라앉힌 샤를로트가 나에게 말했다.
"아리아는 그저 학교에서 또래의 아이들과 친하게 지낼 뿐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당신 할 일이나 하세요.
알겠죠?"
"……"
"알.겠.죠?"
살짝 눈을 흘기는 샤를로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서 혼자 놀고 있는 아리스에게 말했다.
"아리스. 나중에 학교에 가면 남자 친구 말고 여자 친구를 만들렴."
"그렇게 말하면 아리스가 알아들어요?"
"아리스는 똑똑하니까 알아듣지."
"맞아! 아리스 똑똑해요!"
"아리스. 남자는 다 나쁜 놈이니까 가까이하면 안 돼요."
"남자. 가까이하면 안 돼요?"
내 말을 따라 하는 아리스에 샤를로트는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하아- 애한테 이상한 말 가르치지 말고 빨리 가서 쉬세요."
빨리 가서 쉬라는 샤를로트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리스에게 말했다.
"아리스. 아빠랑 같이 갈까?"
내 말에 아리스는 잠시 나를 올려다보고는 샤를로트에게 딱 달라붙으며 말했다.
"아니! 아빠 남자예요! 가까이하면 안 돼요!"
"커헉!"
"풉- 그러게 이상한 말 가르치지 말라고 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