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아렌달에서 축제가 한창 진행되는 기간에 재밌는 일이 발생했다.
멤버쉽을 위한 백화점 경매에 참여하기 위해 왕국의 귀족들이 아렌달을 방문한 것이다.
아스타나 왕국과 나르비크 왕국의 귀족들은 혹시나 이번에도 마법 무기가 경매에 나오는 건 아닌지 이리저리 찔러보는 모습이었고, 베르겐 왕국의 귀족들은 왕국의 흉흉한 분위기를 무시하고 순전히 경매를 즐기기 위해 아렌달을 방문한 것 같았다.
"멤버쉽 회원들에게 경매에 대해 알리기는 했지만, 이렇게나 모일 줄은 몰랐는데."
"저도 설마 왕국의 분위기를 무시하고 경매에 참여할 줄은 몰랐습니다."
심지어 베르겐 왕국에서 찾아온 귀족들은 이번에 아렌달로 탈주한 귀족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모습까지 보여 주었다.
그 모습에 베르겐 왕국에서는 아렌달로 탈주한 스톨과 엔나, 기르만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도 브레튼의 귀족들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다른 왕국들의 귀족들이 아렌달에 들어오는 모습에 브레튼의 귀족들도 아렌달을 찾을까 걱정했는데 말이죠."
"베르겐 왕국에서 국경을 열어 주지 않았으니까. 겨우 경매에 참여하겠다고 봉쇄된 국경을 넘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을 거 아니야.
만약 이번 경매에 마법 무기가 나온다고 했다면 모를까, 브레튼에서 먼저 지금의 대치 상황을 깰 필요는 없지."
"맞습니다. 브레튼으로서는 굳이 베르겐 왕국을 긁을 필요는 없죠.
지금의 대치 상황을 최대한 끌어서 자연스럽게 분리되는 것이 나을 테니까요."
아렌달과 다르게 브레튼은 다른 왕국의 시장이 필요한 곳도 아니니 그저 베르겐 왕국에서 포기하고 독립을 인정해 줄 때까지 버티기에 돌입한 상태였다.
브레튼은 비옥한 땅과 100만이 넘는 인구도 있었으니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베르겐 왕국이 브레튼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빨리 인정해야 아렌달도 다시 브레텐과의 교역로가 열릴 텐데 말입니다."
"브레튼을 다시 끌어안을 수 없다는 건 벨파스트 후작도 아는 눈치던데…
베르겐 왕국으로서는 왕국의 자존심이 무너진 것 때문에 쉽게 브레튼을 놓지 못하는 거겠지.
그래도 저 대치 상황이 얼마나 가겠어?
지방 영주들이 바보도 아니고, 병력을 소집하느라 영지의 일손이 줄어들었으니 저렇게 병력이 묶여 있는 상황을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겠지."
"얼마나 보십니까?"
"추수의 계절이 오면 영주들이 일손의 부족함을 느끼고 중앙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겠지.
소집되었던 병력을 다시 돌려 달라고 말이야. 그때가 되면 베르겐 왕국에서도 자존심을 굽힐 수밖에 없지 않겠어?"
"하긴- 지방 영주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다가는 왕국이 더 쪼개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아렌달과 브레튼.
두 지역이나 왕국에서 독립했으니, 또 다른 영주들이 다른 뜻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베르겐 왕국과 브레튼이야 각자 알아서 하라고 하고, 지금 들어와 있는 귀족들이 사고나 치지 않도록 관리하자고.
왕국들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괜히 아렌달에서 시비를 거는 놈이 있을 수도 있어."
"왕국에서 온 귀족님들이 백화점이나 호텔에 집중하도록 관리하겠습니다."
"누구? 아서 대공이 왔다고?"
"데우스님과 긴밀히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백화점의 경매를 핑계로 아렌달을 찾은 귀족 중에 아서 대공이 있었다.
지난 동대륙 회의에서도 나르비크 국왕을 대신해 참석할 만큼 나르비크 왕국에서는 손에 꼽히는 권력자인 사람이었다.
그런 아서 대공이 비밀리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것은 뻔한 이유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였다.
"이번 경매에 마법 무기는 없다고 했을 텐데?"
"나르비크 측의 이야기는 마법 무기 때문에 대화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데우스님께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음- 마법 무기가 아니라면 아서 대공이 직접 걸음을 할 만한 이유가 있나?"
베르겐 왕국에서 자원의 거래량을 줄여서 나르비크 왕국과의 거래도 걸려 있었기에 마냥 대화를 거절하는 것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베르겐 왕국과 소원해진 만큼 나르비크 왕국과의 관계는 유지해야 하니까…
일단 아서 대공과 이야기는 나눠 보자. 혹시 이상한 이야기를 꺼내면 들어줄 수 없다고 거부하면 될 테니까."
아렌달을 찾은 귀족들은 대부분 해안가 호텔에 머물기 때문에 해안 쪽을 피해서 아서 대공을 초대했다.
괜히 전쟁 중인 왕국과 독대를 나눴다가 오해를 사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서 대공도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내 요청을 들어 약소의 장소를 찾아 주었다.
"제법 괜찮은 저택이군.
과연 아렌달의 건설 기술은 이런 저택에서도 빛을 보는 건가?
이 저택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 줄 수 있소?
나도 기회가 된다면 왕도에 이런 저택을 하나 지었으면 좋겠군."
아서 대공의 말에 나는 볼튼을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저택은 소드마스터인 볼튼경의 저택이 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내가 아서 대공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긴- 아무리 귀족이 아니라고 해도 소드마스터라면 이 저택을 소유하기에 부족함이 없지."
리오나 다른 친위대들도 비슷한 저택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뭐라고 할지 궁금해지는 말이었다.
"그보다 나와 대화를 나누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법 무기에 관한 이야기라면 나는 딱히 할 말이 없는데."
그 말에 아서 대공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법 무기는 처음부터 이야기를 못 하게 막아 두는 건가?"
"표정을 보아하니 아서 대공께서도 마법 무기에 대한 기대는 안 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전쟁 중인 왕국에서 뛰어난 무기에 대한 기대를 안 할 수는 없지.
하지만 오늘 대화의 목적은 마법 무기가 아니라 다른 것이네."
"무엇입니까?"
"함선. 아렌달이 가지고 있는 동력선이 왕국에 필요하네."
아서 대공의 요구에 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대륙은 넘어 전쟁을 하고 있는 나르비크 왕국으로서는 마법 무기 만큼이나 남대륙으로 원정을 위한 운송 수단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내가 잠시 침묵하며 생각에 잠기려 하자 아서 대공이 급하게 나를 깨웠다.
"솔직히 말하지. 왕국의 남대륙 원정은 실패했네."
그 의외의 말에 나는 아서 대공을 바라봤다.
"벌써 실패를 논할 단계입니까?"
"처음 남대륙 원정을 시작했을 때 목표했던 것은 반년 안에 포르토 왕국의 북쪽을 완전히 점령하는 것이었네.
우리가 가진 마법 무기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아니었네. 남대륙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네."
동대륙보다는 늦게 마법 무기를 개발한 남대륙이었지만, 그래도 나르비크 왕국의 마법 무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로 뒤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르비크 왕국의 침공을 동대륙의 침공이라고 생각한 남대륙의 왕국들이 합심해서 나르비크의 원정군에 저항했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 성과를 올리지도 못한 나르비크 왕국이었다.
"지금 이야기하지만, 우리 원정군은 겨우 항구 하나만 점령한 상태지. 솔직히 말이 점령이지 그곳에 고립되어 있다고 하는 게 정확할지도 몰라."
"음- 그렇군요."
"그래서 아렌달의 동력선이 필요한 것이네.
나르비크 왕국은 더 이상 전쟁을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다네. 전쟁을 지속하면서 얻어 낼 것이 마땅치 않으니까 말이야."
"남대륙에서 원정군을 데리고 올 생각이군요."
"맞네. 원정군과 그들이 얻어 낸 조그만 성과만 가지고 돌아올 생각이네.
그런데 남대륙의 바다 상황이 만만치가 않아.
자칫하다가는 수천의 병력이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네."
추가 병력을 보내기 위한 함선이 아니라 발이 묶인 병력을 구원하기 위한 함선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왕국의 병력을 구원할 수 있도록 아렌달의 도움을 부탁하네."
"동력선을 내주기 위한 명분이. 아렌달의 함선이 나르비크의 병력을 운송한다고 하면 말이 나올 겁니다."
내 물음에 아서 대공은 씩 웃으며 말했다.
"데우스 아렌달. 동대륙 회의에서 그대는 스스로를 평화주의자라고 했었지."
"아-"
"평화를 위해 아렌달이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고 하면 명분은 충분할 거네."
내가 우스갯소리로 한 말을 기억하고 이렇게 명분을 만들어 왔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듣고 나르비크의 요청을 거부하기에도 뭣한 상황이었다.
"그냥 동력선을 내어 달라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물론이네. 아렌달이 도와만 준다면 왕국은 부족하지 않은 대가를 치를 생각이네."
"부족하지 않은 대가라면 무엇을?"
"아렌달에 부족한 인구나, 자원이라면…"
"지금 갑자기 늘어난 인구도 완전히 융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당장 새로운 인구를 받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자원 역시 지금 거래하고 있는 수준이면 충분하고요."
"음- 그렇다면 아렌달이 원하는 것을 말해 보게.
우리가 생각하는 범주 안에서 가능하다면 들어주도록 하지."
이번 원정군 퇴각에 생각보다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서 대공은 자신 있게 내게 요구조건을 말하라고 했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르비크의 고속도로건설권과 철도개발권을 주십시오."
"고속도로건설권과 철도개발권…"
"대공께서도 아시다시피 아렌달의 가장 큰 산업은 건설 산업입니다.
나르비크 왕국의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있는 권리를 준다면 우리가 가진 기술로 나르비크에도 훌륭한 고속도로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도로 기술은 다른 왕국에도 있지만, 철도 기술은 아렌달에만 있다는 걸 아신다면 아렌달에 철도개발권을 양도해 줘도 아쉬운 거래는 아닐 겁니다."
내 설명에 아서 대공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역시 왕국을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도로건설이 얼마나 큰 규모의 사업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이렇게 큰 사업을 아렌달에 그냥 넘기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생각보다 고민이 길어졌다.
"고속도로와 철도."
"……"
혼잣말하며 내 눈치를 보던 아서 대공은 결론을 내렸는지 나를 보며 말했다.
"고속도로건설권과 철도개발권을 둘 다 내어 줄 수는 없을 것 같네.
둘 중에 하나, 하나만 가져가는 게 어떻겠나?"
"둘 중에 하나라…"
"그렇게 해 준다면 내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렌달에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약속해 주겠네.
국왕 폐하께도 확실한 약속을 받아 주도록 하지."
"좋습니다. 철도개발권만 받도록 하죠."
"고맙네!"
"대신 사업에 대한 모든 권리를 주셔야 합니다."
"…알겠네."
아서 대공의 대답에 나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브레튼에 이어서 나르비크의 철도개발권까지 아렌달이 차지해 버린 상황이었다.
철도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면 절대로 내주지 않았을 사업권을 홀랑 집어삼켜 버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요구 사항이 너무 많지 않은가?"
"이건 나르비크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일 겁니다."
"말해 보게."
"나르비크 왕국과 아렌달 사이의 거래량을 늘리는 게 어떻습니까?
뉴렌달 브랜드나 아렌달에서 생산하는 상품을 나르비크 왕국에서 더 받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대신 나르비크 왕국의 자원도 아렌달에서 더 받도록 하겠습니다."
베르겐 왕국과 소원해진 지금 아렌달의 생산 물량을 나르비크 왕국에 풀 수 있게 된다면, 베르겐 왕국과 브레튼의 갈등이 조금 길어져도 괜찮을 것이다.
그저 거래량을 더 늘리자는 조건에 아서 대공이 한숨을 쉬었다.
"그 정도면… 알겠네.
그럼 철도개발권과 거래량을 증가하는 것으로 아렌달의 동력선을 빌려 가도록 하지."
"좋습니다.
남대륙에 묶여 있는 나르비크의 병력은 모두 안전하게 데리고 오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