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아렌달이 중립을 유지하겠다는 의향을 내비치자 베르겐 왕국은 나를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와 함께 소집령을 내려 왕도에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스타나 왕국과 나르비크 왕국이 다른 대륙과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국경병력까지 끌어모을 생각을 하는 베르겐 왕국이었다.
하지만 베르겐 왕국의 소집령에 모든 영주가 응답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스톨 영지와 엔나 영지는 물론이고, 기르만 영지까지 베르겐 왕국의 부름을 거부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베르겐의 수호자인 베일리 백작마저 변경백의 지위를 내세워 영지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소드마스터의 힘까지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베르겐 왕국으로서는 답답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중앙으로서는 브레튼을 치기는 해야 하는데 막상 치기에는 장담을 못 하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렌달을 향한 비난이 거센 것이고요."
"그래도 뭔가 행동은 보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이후에 왕국에 남은 영주들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모르니까."
"지금이야 아스타나 왕국이나 나르비크 왕국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다행이죠.
그렇지 않았다면 두 왕국에서 기회를 보고 베르겐 왕국을 간섭했을 겁니다."
"브레튼이 아니라 다른 왕국의 간섭이 생기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건데?"
"그렇습니까?"
"아무리 독립했다고 해도 아렌달 가문도 베르겐 왕가의 혈통이라고.
연 중에 가장 센 연이 혈연인 거 몰라?
내가 베르겐의 선왕에게 어떻게 돈을 빌렸는데. 방계 왕족이라는 것을 내세워 빌린 거잖아?"
"그, 그랬지요."
다른 왕국에서 베르겐에 간섭하는 것까지 가만히 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베르겐 왕국에서는 비난 외에는 다른 건 없는 거지?"
"일단은 그렇습니다. 베르겐 왕국에서도 그 이상의 조치를 하기에는 부담스러울 겁니다.
만약 아렌달이 브레튼의 손이라도 들어 주는 날에는 베르겐 왕국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대로 중립이라도 유지를 해야 베르겐 왕국에서도 뭐라도 해 보겠죠."
만약 아렌달을 향해 강한 조치를 하게 되었을 경우 손해 보는 게 훨씬 컸기 때문에 베르겐 왕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난의 목소리를 키우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리고 베르겐 왕국은 그 어디보다 아렌달의 상품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습니까?
이후에 뉴렌달 브랜드나 아렌달 상품을 계속 받으려면 국경을 봉쇄하거나 거래를 막는 일은 못 할 겁니다."
아렌달이 베르겐 왕국이라는 시장이 필요한 것처럼 베르겐 왕국도 아렌달의 상품이 필요한 공생 관계였다.
그리고 아렌달의 상품을 교역하면서 외국으로부터 받는 통행세도 엄청날 것이다.
"베르겐 왕도에 모여 있는 병력이 움직이는 상황이나 놓치지 말자고.
보리스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렌달도 챙길 건 챙겨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정보가 들어오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왕도에 소집된 병력이 눈치를 보는 사이에 브레튼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브레튼의 독립이 정당하다는 목소리를 내며, 그 증거로 왕도의 병력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내세웠다.
그 주장에 중앙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즉각 브레튼을 반역의 주체로 몰아세우며, 역도에게 명분은 없다는 이야기로 독립의 정당성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면서 반역자의 목을 가지고 오면 포상을 하겠다는 소문을 퍼트리며 브레튼의 백성들을 유혹했다.
하지만 브레튼의 백성들은 그 소문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요 몇 년간 영주들의 공격적인 투자 덕분에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영주님께서 반역자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북부가 누구 덕분에 이렇게 살 만해졌는데. 다 영주님들께서 백성들을 위해 돈을 풀어 주신 덕분이다!"
"왕국의 더러운 속삭임에 넘어가지 마라!"
"영주님들은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브레튼을 믿어야 한다. 의회를 믿어야 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영주님들을 믿어야 한다!"
브레튼의 영주들은 자신들을 향한 백성들의 지지에 풍요로운 미래를 약속하며 정당성을 키워 나갔다.
"베르겐 왕국이 북부를 위해 무엇을 해 주었다는 말이냐!
북부는 북부의 힘만으로 이만큼이나 발전해 온 것이다."
"브레튼의 백성들이여!
우리는 왕국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일어난 것을 기억하라!"
결국, 베르겐 왕국에서도 브레튼의 주장에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으면 베르겐의 독립은 막을 수 없을 테니까 어쩔 수 없겠지."
"엔나 영지와 스톨 영지에는 상황을 주시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베르겐 왕국의 병력이 전부 왕도를 떠나면 곧바로 움직일 겁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있는 통신 마나석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데우스님. 헤돈입니다.
"아렌달 성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거야?"
-기르만 남작님께서 아렌달에 투신하기를 희망하며 찾아왔습니다.
"……"
통신 마나석에서 전해지는 메세지에 나와 리오는 말을 잊어버렸다.
"기르만이 중앙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스톨 영지와 엔나 영지는 이전부터 이야기가 되어있었지만, 기르만 영지는 아니었다.
-데우스님. 기르만 남작입니다.
기르만 영지를 아렌달에 바치겠습니다. 받아 주십시오.
실리를 위해서 머리를 숙이는 것도 서슴지 않던 기르만 남작이었다.
그런 사람인 만큼 지금 이 혼란을 기회 삼아 베르겐 왕국을 탈출해 아렌달에 투신할 생각을 한 것이 분명했다.
얼마나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같이 최적의 타이밍에 메세지를 보낸 것을 보면 분명 긴 시간을 준비했을 것이다.
"기르만 남작님은 생각보다 감이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감이 좋은 것인지 능력이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흐름을 보는 눈 정도는 확실한 것 같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스톨과 엔나라면 모를까 기르만까지 받아 주기에는 베르겐 왕국과의 관계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기르만까지 아렌달이 흡수한다면, 베르겐 왕국을 달래기 위해 준비했던 것들도 달라질 것이다.
"기르만은 특산물인 하몬 역시 아렌달과 연계되어 있고, 뉴렌달 브랜드를 저장할 터미널도 가지고 있지."
내 말에 리오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하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행정관들이 더욱 바빠지겠네요."
리오의 대답에 피식 웃은 나는 다시 통신 마나석을 붙잡고 말했다.
"기르만 남작. 일단 뉴렌달로 들어오도록 해."
베르겐 왕국과 브레튼이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스톨, 엔나, 기르만 영지 역시 조용히 독립의 흐름에 올라탔다.
그리고 베르겐 왕국에서 브레튼과 본격적인 시비가 붙자 냅다 베르겐 왕국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했다.
당연히 뒤통수를 맞은 베르겐 왕국으로서는 당장 3개 영지를 반환하라고 메세지를 보냈지만, 나는 침묵을 고수하며 시간을 끌었다.
당장 브레튼을 신경 쓰기 바쁜 베르겐 왕국에서는 침묵하는 나를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계속 쏟아 냈지만, 비난이야 베르겐 왕국과 브레튼의 관계에 중립을 표시한 순간부터 계속 들어 왔던 것이라 큰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브레튼 쪽도 황당하다는 반응입니다."
"그래도 브레튼 입장에서는 이쪽으로 베르겐 왕국의 신경이 분산되어서 이득 아닌가?"
한창 열을 내던 양쪽에서는 갑자기 일어난 황당한 사건에 끓어오르던 분위기가 갑자기 식기라도 했는지 큰 분쟁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브레튼도 확실하게 독립에 성공하겠네."
"아스타나 왕국이나 나르비크 왕국이 전쟁을 멈추면 베르겐 왕국으로서는 브레튼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칫하다가 승냥이 같은 두 왕국의 공격을 받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보리스에게 미안해지는데…"
"어쩔수 없지요. 아렌달도 이득을 취할 수 있을 때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당하기 싫다면 힘을 키워야죠.
베르겐도 충분히 기회가 있었지 않습니까? 베르겐이 당한 것은 아렌달이나 브레튼에 비해 힘을 키우지 않은 탓입니다."
브레튼과 다르게 어느 순간부터 발전에 투자를 멈춰 버린 베르겐 왕국이었다. 만약 보리스가 더 공격적으로 투자해서 베르겐 왕국을 발전시켰다면, 브레튼도 독립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베르겐 왕국은 기회를 놓쳤고, 아렌달과 브레튼이 떨어져 나가며 힘을 잃었다.
"베르겐 왕국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렌달은 아렌달의 일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데우스님. 단번에 아렌달의 백성이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갑자기 늘어난 인구로 인해 백성들이 혼란을 느끼지 않도록 관리해야 했다. 당장 밀려들 백성들로 인해 도시가 포화 될 수도 있었다.
"리암과 어반을 불러.
그동안 준비하던 신도시 건설을 시작한다."
뉴렌달에서도 멀지 않은 미개발 지역.
겨우 도로 하나만 연결되어있는 곳에 아렌달 건설의 핵심 인력들이 모여 있었다.
"이곳이 제일 괜찮은 것 같은데 어때?
뉴렌달과의 거리를 생각해도 최적의 장소인 것 같은데."
내 말에 리암과 아렌달 건설의 주요 관리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동의에 나는 어반에게 말했다.
"어반. 스톨 영지에서 키워 온 실력을 기대해도 괜찮겠지?"
"맡겨만 주십시오. 반드시 최고의 도시를 만들겠습니다."
어반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스톨 영지에서 무리하게 받아들이던 이주민들이 아렌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항상 부족하던 건설 인력이 보충되었고, 그들을 신도시 건설에 투입하면서 새로운 건설 사업이 시작되었다.
자신들이 살 도시라는 말에 이주민들도 적극적으로 공사에 임했다.
"확실히 자신들이 살 도시를 직접 만드는 것이라 그런지 의욕들이 대단하네."
"이대로 공사가 진행되면 올해 안에 도시가 완성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반의 설계대로라면 그렇게 빨리 완성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괜히 무리하게 건설하다가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까 무리하진 말라고 해."
빠른 이주를 위해 효율만 생각하고 만든 뉴렌달과 다르게 어반의 설계는 도시의 미관을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격자형의 도로를 만들어 주거 구역을 배치하고, 공공시설이나 건물들이 튀지 않도록 도시 안쪽에 잘 숨겨 두었다.
건물의 높이도 일정하게 조절하면서 스카이라인까지 맞추는 모습에 아렌달 건설의 베테랑들이 나를 찾아와 불만을 성토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설계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까.
신도시 건설은 어반에게 맡기기로 했으니까 사고가 나지 않는 이상 어반의 설계대로 진행한다."
"그런데 지금 다른 왕국들은 전쟁으로 인한 혼란에 빠져 있는데 저희는 공사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나 하고 있네요."
"그거야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가꾸는 데 더 노력했으니까 그런 거지.
아스타나 왕국이나 나르비크 왕국도 다른 대륙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왕국 내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겠지."
여전히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두 왕국이었다.
"베르겐 왕국은요?"
"베르겐 왕국과 브레튼은 전쟁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잖아?
그냥 서로 주권을 가지고 다투고 있을 뿐이지.
아직까지는 큰 시비가 붙은 것도 아니고, 신경전만 계속하고 있잖아?"
"그렇긴 하네요."
"그래도 신경전이 오래가는 건 아렌달로서도 바라는 상황은 아니니까 그만 멈추고 잘 지냈으면 좋겠지만…
뭐- 리오도 말했잖아? 아렌달은 아렌달의 일을 하자고."
자신이 했던 말을 똑같이 돌려주자 리오는 씩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