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현대인-100화 (100/169)

100화

체스터 후작이 자리를 채운 영주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도 아렌달과 같이 시대를 이끌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요크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우리 북부는 스스로 일어나기에 충분한 역량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중앙에서 우리 북부를 위해서 해 준 것이 무엇입니까? 중앙에서는 더 이상 우리를 잡아 둘 명분이 없습니다."

"요크 후작님께서 잘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리버 역시 체스터와 뜻을 함께하겠습니다."

"리즈 역시 그 뜻을 함께하겠습니다."

"프리스톤도 함께하겠습니다."

북부 영주들의 외침에 체스터 후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북부는 아렌달과 같이 베르겐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겠소.

앞으로 우리는 브레튼으로 불리며, 새로운 시대를 이끌 것이오!"

체스터 후작의 말에 북부 영주들이 각자 술잔을 들고 일어나서 외쳤다.

"브레튼! 브레튼!"

"브레튼을 위하여!!"

새로운 이름을 연호하며 술잔을 비운 영주들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때 한 영주가 체스터 남작에게 말했다.

"그럼 브레튼의 왕위에는 누가 앉을 겁니까?"

"저는 북부의 대영주이신 체스터 후작님께서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크 영지 역시 대영지입니다. 대영주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면 요크 후작님도 자격이 있습니다."

"베르겐 왕국의 방계 왕족이신 리즈 백작님께도 정통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렌달도 베르겐의 왕족이었기 쉽게 독립한 것이 아닙니까?"

저마다의 이유를 들어 새로운 왕을 지지하는 목소리에 체스터 후작이 다시 한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중의 주목을 모은 체스터 후작은 영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북부의 영주들 중 왕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없소.

모두가 왕위에 올라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오."

"그럼 체스터 후작님께서 생각하시는 국왕에 어울리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물음에 체스터 후작은 영주들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브레튼은 왕이 없는 나라가 될 것이오.

아렌달과 같이 연방으로서 여기 모인 영주님들이 함께 이끄는 나라가 될 것이오."

"왕이 없는 나라라고요?!"

"그렇소. 브레튼은 왕이 아닌 의회가 나라를 운영하게 될 것이오.

여기 있는 모두가 브레튼의 주인이 될 것이오!"

체스터 후작의 말에 북부 영주들이 다시 한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 *

아스타나 왕국이나 나르비크 왕국이나 더 이상 전쟁을 길게 끌고 가고 싶은 마음은 없는 듯했지만, 이미 원정을 떠난 병력을 쉽게 되돌리지는 못했다.

선제공격을 당한 왕국들이 쉽게 놔주지 않은 것이다.

원정을 보낸 수만의 병력과 그들이 가지고 간 물자들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두 왕국은 이도 저도 못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베르겐 왕국에서도 혼란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데우스님. 체스터 영지를 중심으로 한 북부의 영주들이 연방을 만든다고 합니다."

"연방을?"

"왕을 세우지 않고 의회를 결성해 베르겐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고 합니다."

민주주의의 상징인 의회라는 단어에 나는 제법 놀라고 있었다.

물론 북부가 민주주의의 이념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귀족원이 아닌 의회를 만들 줄은 몰랐다.

"왕국의 대응은?"

"북부의 부족한 명분을 걸고 나올 것 같습니다.

바깥의 영토를 개척한 아렌달과 달리 북부는 오랜 시간 베르겐 왕국의 영토였지 않습니까?

그 땅은 오래전부터 베르겐 왕국이었으니, 그 땅을 명분으로 독립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땅의 주인은 영지의 주인인 영주들이다. 그리고 영지에 사는 백성들도 영주들의 재산이었다.

왕국이라는 하나의 연합체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기술과 문화를 나누는 것이 이세계 왕국들의 구조였으니까.

중앙의 권력이 강한 아스타나 왕국 같은 곳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왕국이 분열해도 이상하지 않은 어설픈 연합체가 왕국이었다.

그리고 베르겐은 그 어느 나라보다 왕권이 약한 나라였고, 왕국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않아도 될 만큼 힘을 가진 영지들이 많은 왕국이었다.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게 관리해야겠네."

"이미 아렌달 백성들에게 전쟁은 안줏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스톨 영지와 엔나 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면 그렇지 않을걸?

그들이 피난민은 아니더라도 이주민이 갑자기 밀려들어 오는 거잖아?

동요가 없을 수는 없겠지."

"헤돈경과 경비대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하겠습니다."

북부, 브레튼의 독립에 보리스는 곧장 아렌달에 지원을 요청했다.

베르겐 왕실의 일원으로서 베르겐이 쪼개지는 것을 막아 달라는 메세지였다.

"베르겐으로부터 먼저 독립한 건 아렌달인데 왕실의 혈통까지 내세우면서 지원을 요청하다니…"

"지난번에 말씀하신 대로 일단 시간을 끌까요?"

"그래야겠지. 베르겐 왕국이나 브레튼이나 우리에게는 중요한 거래 상대니까."

지금부터 하는 줄타기가 매우 중요했다.

자칫 줄타기를 잘못하다가 양쪽 모두의 미움을 사면 아렌달은 중요한 거래 상대를 잃을 수 있었다.

아무리 스톨과 엔나를 포함한다고 해도 내수 시장이 너무 작았다.

아렌달에서 생산해 내는 상품들을 팔기 위해서는 베르겐도 브레튼도 놓쳐서는 안 되는 상대였다.

"브레튼에서는 메세지가 없었나?"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리오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암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데우스님. 체스터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리암의 뒤로 들어오는 사람에 나는 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감사합니다. 데우스님."

"오랜만이네. 노엘."

체스터 영지의 후계자이자 리암의 형인 노엘이 브레튼의 메세지를 가지고 직접 뉴렌달을 방문한 것이다.

"편하게 인사나 나누고 있을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하하- 데우스님께서 쓸데없이 시간을 끄는 분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 브레튼의 메세지를 전달하겠습니다."

노엘은 곧바로 자신이 가지고 온 메세지를 전했다.

"브레튼의 요청은 딱 하나뿐입니다.

중립을 지켜 주십시오."

"……"

"브레튼의 독립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아렌달은 움직이지 말아 주십시오.

아무런 지원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저 아렌달이 베르겐 왕국에 힘만 실어 주지 않으면 됩니다.

그럼 아렌달과 브레튼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노엘의 메세지는 조금 놀라웠다.

브레튼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조건으로 어떠한 지원을 부탁할 줄 알았는데, 그저 중립만 지켜 달라니.

"자신 있나 보네?"

"아렌달이 베르겐 왕국의 손만 들어 주지 않는다면…"

노엘의 표정에서 브레튼의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동안 체스터 영지를 비롯한 북부가 얼마나 공격적으로 기술을 도입하고, 투자를 해 왔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포섭할 수 있는 마법사는 모두 끌어모아서 과거 아렌달과 같은 마법 연구소까지 만든 체스터 영지였다. 아렌달을 제외하면 마법 기술 역시 어느 곳보다 앞서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울루 왕국도 신경 써야 하지 않나?"

"오울루 왕국은 다른 왕국들보다도 기술이 떨어지는 왕국입니다.

만약 오울루 왕국이 브레튼의 독립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크게 데이고 말 겁니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노엘 만큼이나 리암도 긴장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아렌달로 적을 옮겼다고 해도, 리암 역시 고향의 사정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브레튼이 먼저 조건을 걸었으니 아렌달도 조건을 걸어도 되겠지?"

"…듣겠습니다."

"베르겐 왕국이나 브레튼이나 둘 다 아렌달에는 중요한 곳이지만, 베르겐 왕국이 가깝고, 인구도 많은, 더 큰 시장인 것은 사실이지.

그리고 브레튼보다 베르겐 왕국의 명분이 더 강한 것도 사실이고."

그 말에 노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기서 내가 베르겐 왕국의 손을 들어 주면 브레튼의 독립은 물거품이 될 게 분명한 상황이었기에 내 조건을 거부할 수 없다는 걸 그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브레튼이 내게 중립만 요구한 것도 지나친 조건을 요구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브레튼이 독립을 하게 되면 철도개발권을 아렌달에 줘."

"철도개발권이요?"

"아렌달 건설이 브레튼에 철도를 깔 수 있는 권리를 약속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것뿐 입니까?"

노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엘은 잠시 고민하며 리암에게 무언가 눈짓을 주었지만, 리암이라고 답을 내줄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아직 이세계는 철도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확신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철도… 조금만 시간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철도가 무엇인지 제가 잘 몰라서, 의회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의회에 물어봐도 철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운송 시설에 대한 공사를 아렌달에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조건이니, 오히려 환영하며 받아들일 수도 있는 사업일 것이다.

양해를 구하고 집무실 밖으로 나가는 노엘의 모습에 리암이 내게 말했다.

"저는 당연히 백성을 요청할 줄 알았는데… 아렌달에 가장 부족한 것은 백성 아닙니까?

백성을 달라고 했다면 브레튼에서도 아렌달의 요청을 쉽게 들어줬을 겁니다."

"노엘이 그렇게 말했어?"

"저도 그 정도 생각은 합니다.

왜 백성이 아닌 철도개발권을 달라고 하신 겁니까?"

"철도는 토목 산업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큰 사업이거든.

공사에 투입되는 자재나 인력도 만만치 않고, 철도가 만들어 내는 인프라와 그로 인해 따라오는 산업의 가치도 어마어마하지."

그리고 브레튼의 철도개발권을 아렌달이 차지하게 되면 브레튼의 운송 인프라를 아렌달에서 지배할 수도 있었다. 당연히 아렌달이 브레튼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 역시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아렌달에 철도를 깔아 봐야 다른 곳에 철도가 없다면 큰 효과를 보기 어렵지 않겠어?

다른 곳에서도 철도의 효과가 있어야 왕국들이 철도를 도입하기 시작할 것 아니야."

내 설명에 나와 여러 번 철도 산업의 이야기를 나눈 리오도 한마디 거들었다.

"뉴렌달 브랜드 등 아렌달의 상품을 빠르게 대량으로 대륙 곳곳으로 운송하기 위해서는 철도가 필요합니다.

데우스님께서 철도개발권을 요구한 것은 탁월한 결정입니다."

리오까지 나와 같은 의견을 내자 리암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집무실을 나갔던 노엘이 다시 돌아왔다.

"정말 철도개발권만 드리면 아렌달은 중립을 지켜 주시는 겁니까?"

"그래."

"백성이나 자원 등 다른 요구 사항은 없는 것이 확실합니까?"

"그래. 다른 것보다 아렌달이 가지고 싶은 것은 브레튼의 철도개발권이다."

내게 확답을 들은 노엘은 다시 한번 브레튼의 메세지를 전했다.

"알겠습니다. 브레튼의 철도개발권을 아렌달에 양도하겠습니다.

아렌달은 그 조건으로 브레튼과 베르겐 왕국 사이에서 절대 중립을 유지해 주셔야 합니다."

"아렌달은 브레튼의 철도개발권을 받는 대신 절대 중립을 유지하겠다."

환하게 미소를 짓는 내 모습에 노엘도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원래부터 아렌달은 중립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공짜로 철도개발권이 생겼다.

'어쩌겠어. 철도가 뭔지 모르면 뜬 눈으로 빼앗기는 거지.

그래도 조금 미안하니까 나중에 레일 값이라도 조금 깎아 줘야지.'

정말 미소를 감추려 해 봐도 감출 수가 없는 거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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