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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현대인-99화 (99/169)

99화

겨울이 끝나갈 무렵 시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시장에 거의 없던 마나석은 물론이고, 철과 구리, 목재 등의 자원과 밀과 감자 등의 식량까지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시장에서 증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아렌달이 자원이나 식량이 부족한 상황이었다면 그 흐름에 완전히 휩쓸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아스타나 왕국이 결국 일을 저질렀네."

"아스타나 왕국의 움직임에 나르비크 왕국도 즉각 반응한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과감하게 움직였네."

"선전포고와 함께 공격을 시작했으니까요."

아스타나 왕국과 나르비크 왕국이 전쟁을 시작했다. 동대륙 회의에서 이야기가 나왔던 대로 다른 대륙을 침공한 것이다.

"아론 선장에게서 연락은?"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나르비크 왕국군의 이동 경로를 보면 저희가 가지고 있는 경로와는 겹치지 않을 겁니다."

"만약 나르비크 왕국군을 만나게 된다면 충돌을 피해서 돌아오라고 해."

곧장 남대륙을 때린 나르비크 왕국으로 인해 그동안 거래하던 남대륙과의 거래가 막히는 것은 당연했다.

"베르겐 왕국의 반응은?"

"지금 정보를 모으고는 있는데, 베르겐 왕국은 지난 동대륙 회의에서도 평화 쪽 노선이지 않았습니까?"

"보리스의 의견은 그쪽이었지만, 왕국의 귀족들은 아닐 수 있잖아?

그리고 대륙의 정세가 혼란스러우면 왕국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기회를 잡기도 좋을 테고."

"…최대한 빠르게 정보를 잡아보겠습니다."

"헤돈에게도 군이 가지고 있는 정보력을 이용해서 베르겐의 상태를 살펴보라고 해.

베르겐 왕국도 흔들릴 수 있으니까."

아스타나 왕국이나 나르비크 왕국이 전쟁하는 건 시장이 흔들린다는 것 말고 크게 영향을 주는 부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물자를 비싼 값에 팔 수 있으니 그들의 전쟁이 길어질수록 재산을 모을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아렌달이 영향을 받는 것은 두 왕국보다는 베르겐 왕국.

많은 자원을 베르겐 왕국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아렌달로서는 베르겐 왕국에 혼란이 새기는 것은 곤란했다.

베르겐의 혼란은 북부가 개혁의 흐름을 일으킬 때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멀리서 전쟁에 대한 정보가 계속해서 들어왔지만, 아렌달은 평화로운 봄을 맞이했다.

아렌달 백성들에게 전쟁은 남의 이야기나 마찬가지인지 신문이나 라디오를 통해 전해지는 전쟁 이야기는 마른오징어만큼이나 씹기 좋은 안줏거리에 불과했다.

"지난 내전 때 아렌달로 이주하지 않았다면, 분명 나도 남대륙에 끌려갔겠지?"

"그때 나르비크를 떠나 아렌달로 온 게 자네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일 거야."

"내전으로 백성들이 목숨을 잃은 게 몇 년이나 됐다고 또 전쟁인지.

도대체 왕족과 귀족 놈들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길래 저렇게 전쟁을 못 해서 안달인 거야!"

"귀족이라고 다 똑같은 귀족이 아니잖아?

아렌달의 주인님들을 보라고. 데우스님이나 샤를로트님이 우리를 얼마나 아끼시는데."

"아- 그래. 네 말이 맞아. 귀족이라고 다 똑같은 놈들이 아니지.

우리 아렌달 건설의 관리자인 리암님도 귀족이고 말이야."

"하하- 리암님은 귀족인지 의심이 될 정도지.

공만 있으면 노예들과도 같이 뛰어노실 분이시잖아. 나는 아직도 리암님이 명문 귀족 가 출신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물론 전쟁 소식이 처음 들려 왔을 때는 백성들도 혼란을 느끼기는 했다.

식량을 사재기하려던 백성들도 있었고, 혹시 아렌달에도 전쟁의 여파가 미칠지 걱정해서 관청을 찾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 지시를 받은 행정관들과 군인들이 평소와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백성들도 금방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상인 길드를 통해 상단들에게 식량이나 자원을 최대한 끌어오라고 지시를 내려 영지의 생산활동에도 무리가 없도록 했다.

어디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자신들의 일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 백성들에게 전쟁 이야기는 가벼운 안줏거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과 다르게 나와 행정관들에게는 마냥 떠들고 있을 수는 없는 이야기였다.

"비축해 놓은 식량이 점점 떨어지고 있네.

지금이라도 경작지를 늘려야 할까?"

"지금 경작지를 늘려봐야 몇 개월은 기다려야 하지 않습니까?"

아렌달은 다른 가진 영토의 크기에 비해 경작지가 작은 편이었다.

농업보다는 다른 산업에 집중하고 있는 아렌달이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식량자급률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여분의 식량이 남는 편은 아니었다.

그 여분의 식량은 시장에서 남는 식량을 사들이는 방법뿐이었는데, 대륙을 넘어가는 전쟁에 식량 가격이 계속 오르고 있는 게 문제였다.

"그래도 당장 식량이 필요한 건 아니잖아? 그럼 조금만 기다리자."

"베르겐 왕국에서 어떤 움직임이 보이면 필요하게 될 겁니다."

"스톨이나 엔나 쪽은 비축해 놓은 것 없데?"

"엔나는 영지가 공업화되면서 식량자급률도 떨어지고, 스톨 영지도 이주민을 너무 많이 받아서 식량이 부족할 겁니다."

아스타나 왕국과 나르비크 왕국이 양쪽 대륙을 전부 때려서 그런지 다른 대륙에서 식량과 자원을 끌어오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남대륙이던 중앙대륙이던 합심해서 한 곳만 때릴 것이지 왜 양쪽으로 나뉘어서 전쟁을 일으키고 난리야!"

"서로 취할 수 있는 자원을 독점하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아스타나 왕국은 중앙대륙으로, 나르비크 왕국은 남대륙으로 진출하기 좋다는 것도 영향을 미쳤겠죠."

"아스타나 국왕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라면서 왜 저렇게 호전적인 건지…"

"동대륙 회의에 참석했던 빅터 왕자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들이 그 정도였는데 그 아버지는 더 하겠죠."

동대륙 회의에 참석했던 빅터 왕자도 가장 먼저 전쟁을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그 모습을 떠올려 보면 적어도 아스타나 왕국은 성과를 내기 전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그냥 무리하지 말고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을 때까지만 숨을 죽이고 있을까?"

"그것도 괜찮은 방법일 겁니다.

그동안 계속해서 투자를 해오지 않았습니까? 이제 조금씩 투자를 줄이고 내실을 다지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음-"

그동안 엄청난 투자를 바탕으로 발전해온 아렌달이었다.

이미 이세계 어느 왕국보다 뛰어난 기술력과 문화력을 가지고 있는 아렌달이니, 리오의 말대로 투자를 줄이고 내실을 다지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가 가진 현대 지식이라면 더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직 발전할 수 있는 게 한참이나 많다.

문학이나 예술, 스포츠뿐 아니라 첨단 기술과 연계한 미디어도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어.

그리고 산업 기술 역시 지금보다 훨씬 발전할 수 있어.

아직 만들지 못한 것들이 한참이나 있잖아?'

"데우스님. 투자를 줄이는 것도 괜찮은…"

"발전을 위한 투자는 줄이지 않는다."

"하아- 당연히 그러시겠죠."

"그리고 식량도 필요한 만큼 구매하도록 해."

"생각보다 훨씬 많은 돈이 나갈 겁니다."

동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아렌달이라도 지금 시장의 상태로는 엄청난 자금이 깨질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타개책은 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네?"

"인공 마나석을 시장에 풀 거야."

"……진심이십니까?"

리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타나 왕국이나 나르비크 왕국이나 다른 대륙을 침공한 가장 큰 이유는 영토가 아니잖아.

영토를 원한다면 다른 대륙이 아니라 동대륙의 다른 왕국을 공격했겠지.

그들이 대륙을 넘어가면서 전쟁을 일으킨 가장 큰 이유는 마나석 때문이라는 건 다들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지."

"……"

"그런데 대륙에서 갑자기 마나석이 남아돌기 시작하면 어떻게 할까?"

지구에서 자원을 노리고 전쟁을 일으켰던 것처럼 아스타나 왕국이나 나르비크 왕국이나 자신들이 가진 자원을 개발하는 것보다 남의 것을 빼앗겠다는 생각으로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자원, 특히 마나석의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소모되는 게 더 크다면 무리하면서까지 전쟁할 필요가 없다.'

"솔직히 조금 더 독점하고 싶기는 하지만…

지금이 마나석을 풀기에 최적의 상황이기도 하잖아?"

두 왕국이 전쟁을 시작한 지금이 마나석의 가격이 가장 높은 시기이기도 했다.

마나석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최적의 시기였으니 지금 인공 마나석을 공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내 말에 리오는 잠시 생각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인공 마나석을 바로 시장에 공개하겠습니다."

"그리고 베르겐의 상황은 일단 주시하면서 대응하자."

"베르겐 왕국에서 올 메시지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북부에서 움직임을 보이면 연방에 도움을 요청할 텐데요."

"베르겐 왕국을 돕기에는 북부와의 관계도 생각해야 하잖아? 시간을 끌면서 줄타기를 해야지."

"그러다가 스톨과 엔나가 흐름에 올라타면 왕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요."

"그때는 이미 북부 때문에 스톨과 엔나를 관리할 여력이 안 될걸?

우리는 조용히 있으면서 엔나와 스톨이 넘어오는 것만 받아들이자고. 이미 연방으로 넘어온 걸 자기들이 어떻게 하겠어?

베르겐 왕국에는 나중에 어르고 달래면서 적당히 보상하면 되겠지. 아렌달의 기술을 공유해 주면 베르겐 왕국도 어쩔 수 없이 흐름을 받아들이겠지."

따지고 보면 각각 영지에서 독립을 요구하며 떨어져 나가도 베르겐 왕국에서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왕국이 더 이상 영지에 혜택을 주지도 못하니 영주들로서는 왕국의 이름 아래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북부는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도 충분했다.

이미 베르겐은 영주들의 힘이 너무 커져서 왕국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을 강제할 방법이 없는 것이 베르겐 왕국의 현실이었다.

아렌달에서 만들어진 인공 마나석이 동대륙 시장에 공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법 무기를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있던 아스타나 왕국과 나르비크 왕국은 시장에 등장한 인공 마나석을 끌어모으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돈을 쏟아붓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두 왕국은 점점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시장에 마나석이 줄어들지 않았으니까.

"다른 대륙으로 원정 가는 것보다 동대륙의 시장에서 마나석을 사는 게 더 이득 아닌가?"

"그래도 마법사들의 말로는 일반 마나석보다 효율도 떨어진다고 하던데…"

"이 많은 마나석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그렇게 시장에서 마나석 가격이 폭락을 시작하자, 다른 자원들의 가격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동대륙의 자원 시장이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기까지는 겨우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다.

"전쟁도 시들시들해지는 것 같은데?"

"중앙대륙과 남대륙의 마법 무기 상황도 생각보다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 쉽게 점령하지도 못했고, 마나석과 자원의 가격이 폭락해버려서 두 왕국에서는 의욕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아스타나 왕국과 나르비크 왕국에 크게 한 방을 먹인 느낌이었다.

그들이 전쟁을 준비하며 쏟아낸 돈과 정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았기에, 그들이 느끼고 있을 허탈함을 생각해보면 안타까울 정도였다.

"동대륙 회의에서 내가 말한 대로 대륙 안에서 경제적, 문화적 교류나 열심히 하지.

그럼 손해 보는 것 없이 발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다시 한번 두 왕국을 향해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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