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나와 리오는 챙으로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모자와 평소에 입는 깔끔한 복장이 아닌 산업 현장의 일꾼들이 입는 작업복을 챙겨입고 행정관들 몰래 관청을 빠져나왔다.
"이런 작업복을 입어 본 게 몇 년 만이지? 뉴렌달의 건설이 끝나고는 처음인가?"
"이렇게 입고 있으니 예전에 저수지 공사를 하던 때가 생각이 나네요.
그날 데우스님을 따라 처음으로 삽질이라는 걸 했었죠."
"맞아. 그랬었지.
삽질 하나도 똑바로 못하던 게 얼마나 웃겼는지 몰라."
10년도 전의 일을 이야기하는 리오였다.
"음- 근데 데우스님은 삽질을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엄청나게 잘하시던 데요."
"어디서 배우긴. 군대에…"
"네?"
"군대에 관련된 책을 읽다가…"
"도대체 어떤 군대에 관련된 책에 삽질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까?"
"군대에서도 진지를 만들기 위해 공사를 하잖아? 그러니까 그런 진지 공사에 관련된 내용을 보다가 배우게 된 거지.
그리고 내가 토목 공사에 관심이 많잖아?
공사 기술이나 장비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 자연스레 삽질이나 곡괭이질에 손을 대기 시작한 거지.
내가 삽질뿐 아니라 곡괭이도 제법 치잖아?"
"음- 뭔가 석연치 않은데… 아무튼 알겠습니다."
의심의 눈빛을 보내는 리오의 모습에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일단은 외곽부터 돌아볼까?"
도시 철도를 타고 항구로 나오자 바다 냄새가 진해졌다.
아무리 아렌달이 따뜻한 지역이라고 해도 겨울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사늘했는지 리오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항구에서는 딱히 볼 게 없지 않습니까?
상단의 배가 들어와 있는 것도 아니고, 겨울에는 특히 볼 게 없는데요.
차라리 해안가에 있는 귀족님들의 별장이나, 제철소 쪽으로 가시는 게…"
"거기는 우리 백성들이 별로 없잖아?
그리고 제철소는 아무나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이런 차림으로 가면 바로 암행을 나왔다는 게 걸리겠지."
"그, 그렇겠네요."
이렇게 도시 시찰을 나와 본 적이 없어서 어색해하는 리오를 끌고 항구를 걷자 배를 대고 있는 어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곧바로 어부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요즘 물고기는 잘 잡히는가요?"
내 물음에 배를 대던 어부들이 나를 보며 말했다.
"복장을 보아하니 어디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인 것 같은데 물고기가 잘 잡히는지는 왜 묻는 거요?"
"내가 해산물을 좋아해서 말입니다. 물고기가 잘 잡히면 나도 배를 한번 타볼까 생각 중입니다."
배를 타겠다는 말에 어부는 나와 리오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디 그런 몸으로 배를 탄다고. 그냥 지금 하는 일이나 열심히 하는 게 나을 거요."
"내 몸이 어때서요?
큼- 그래서 물고기가 잘 잡히기는 하는 거죠?"
"예전만큼은 아니지.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는 그물만 던져도 만선이 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내 아이들을 굶기지 않고 배불리 먹일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것 같소."
"음- 바다에 나갈 때 위험하다거나 하는 건 없나요?"
"아렌달 가까이에는 다른 나라의 어선이나 해적 놈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주시니 먼바다로 나가지만 않으면 뭐-
근데 왜 자꾸 이런 걸 묻는 거요? 일하는 데 방해되게."
"하하- 바다에 관심이 많아서 그래요. 그럼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 테니 하던 일 계속하세요."
내 말에 어부는 살짝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다른 어부들과 같이 오늘 잡은 물고기를 올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살이 두툼하게 오른 물고기들이 나무상자에 가득 담긴 모습에 리오에게 말했다.
"작업 중에 말을 걸어도 화를 내지 않다니. 그래도 오늘은 꽤 잘 잡혔나 봅니다."
"그렇지?"
어획량이 안 나오는 날이라면 거친 말을 쏟아내는 어부들이 이렇게 고분고분 대답해 주는 모습에 안심했다.
"그럼 수산시장 쪽으로 가보자."
"시장은 너무 복잡하고, 호위 없이 다니기에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사람이 많아서 데우스님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는데요."
"설마 내가 호위도 없이 수산시장을 돌아다닐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어?"
"그것도 그렇네요."
시장 구역에 들어서자 생선 특유의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과 그들에게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평소에 방문할 때는 어느 정도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던 시장이었는데, 암행 시찰로 보는 시장의 모습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역시 시장은…"
"이 정도로 시끄러울 줄은 몰랐는데… 정말 혼잡하네요."
"거기 길 막지 말고 비켜!"
"엇?!"
수산물을 옮기는 상인의 목소리에 나와 리오는 화들짝 놀라며 통로 옆으로 밀려났다.
그 모습에 생선을 정리하던 상인이 웃으며 말했다.
"시장에 처음 오셨나?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놀라기는 누가 놀랐다고 그러는가! 나는 놀라지 않았네!"
리오의 반박에 상인은 더 크게 웃었다.
"놀라서 개구리마냥 폴짝 뛰시던데?
복장을 보니 건설 노동자분들인 것 같은데 횟감이라도 사러 오셨나요?"
"좋은 게 있나?"
"물론이죠. 방어라고 아시나요?
이게 오늘 아침에 잡아 온 녀석인데 한 마리만 해도 몇 사람이나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녀석이에요."
사람 몸통만 한 방어를 보여주는 상인에 나와 리오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이렇게 큰 놈을 횟감으로 쓴다고?"
"그럼요! 이놈 살이 얼마나 고소한데?"
"오, 오늘은 이렇게 큰 놈을 가져갈 만한 여건이 안 되어서… 기회가 되면 다음에 생각해보지."
"방어는 겨울에만 먹어야 그 맛을 알 수 있으니 꼭 겨울이 가기 전에 다시 오세요."
생선을 팔지 못해 아쉬워하는 상인을 뒤로하고 수산시장을 한 바퀴 돌아봤다.
"다들 열심히 살고 있네."
"그렇죠. 특히 아렌달에서는 일하는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으니 더 열심히 살지 않겠습니까?
옛날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죠.
옛날에는 열심히 일해봐야 얻을 수 있는 건 밀가루 몇 줌이 다였는데, 지금은 물건을 팔아 돈을 벌거나 임금을 받아서 원하는 것을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아렌달의 백성들은 이제 다른 왕국이나 영지에 가서는 못 살 겁니다."
시장을 빠져나와 광장으로 돌아왔다.
광장으로 돌아오자 일부 사람들이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뭐지?"
"뭔가 수상한 모임을 하는 사람들 아닐까요?
심상치 않은 느낌입니다. 당장 헤돈경에게 연락해 그 뒤를 파 봐야 합니다."
리오의 말에 나도 사람들의 행렬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저거 리암아니야?"
"네?! 마, 맞는 것 같은데요? 설마 체스터 가문에서 아렌달을 노리고?!"
리오가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리암이 그런 생각을 가질 사람도 아니고, 저 표정을 보라고. 그냥 신이 난 것 같은데?"
싱글벙글 웃으면서 사람들을 이끄는 리암의 모습에 리오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리암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저 사람들은 도대체 뭘까요?
하나같이 비슷한 옷을 입고,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다니…"
"잠깐만. 저쪽으로 가면 뭐가 있더라?"
"공장 노동자들이 사는 주거 지구와 그 뒤로 장인들의 공방이 있죠.
그리고 더 멀리 가면…
아! 새로 지어진 축구장이 있습니다."
리암이 왜 저렇게 싱글벙글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오늘은 맨체스터의 경기가 있나 보네."
"하아- 그런 것도 모르고 수상함 모임이라고 생각하다니…
근데 왜 오해하게 다들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거죠?"
"팀을 응원하기 위해서 팀 유니폼과 비슷한 옷을 입었겠지.
기사단이 복장을 맞추는 것과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잖아?"
"축구팀이랑 기사단을 비슷하게 생각하다니…"
축구장을 향해 걷는 사람들뿐 아니라 극장 인근에서도 평소보다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 한눈에 보였다.
확실히 휴일을 받으면서 문화생활을 즐기는 인구가 늘어난 느낌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도 보이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술을 즐기는 사람들도 보였다.
물론 술을 과하게 마시고 추태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대가 금방 나타나 제압하는 모습에 나도 리오도 만족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휴일에는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경비대도 바쁘겠네."
"갑자기 경비대장이 경비대를 더 뽑고 싶다고 하더니…
돌아가서 생각을 해봐야겠네요."
"치안을 생각하면 경비대를 조금 늘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광장과 먹자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암행 시찰을 통해 백성들의 생활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거의 현대 지구의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산업 현장에서 일하고, 각자의 문화생활을 즐기며, 먹자골목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모습은 나에게 묘한 향수를 느끼게 해주었다.
"가끔은 이렇게 백성들의 생활을 지켜보는 것도 괜찮군요.
그동안 몰랐던 부분들도 알 수 있고, 이 도시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 지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겨우 반나절만으로는 다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도시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이만큼이라도 백성들의 생활을 알게 된다는 건 도움이 되는 일이겠지."
환하게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도시의 모습을 보며 리오에게 말했다.
"본격적으로 도시의 밤이 시작되나 보네. 이제 돌아가야겠군."
"음- 이왕 이렇게 나온 거 어디 식당에서 식사라도…"
"가족들에게 말도 안 하고 나왔는데, 돌아가야지.
그리고 아무리 집에 돌아가기 싫다고 해도, 저녁은 가족들과 함께하라고."
"…하하-"
어색하게 웃는 리오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갑자기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데우스님. 이제 돌아가시는 겁니까?"
"엇?!"
"허업!"
"볼튼? 언제부터 있었어?"
"데우스님께서 도시 철도를 타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항구로 가기 위해 도시 철도를 타는 걸 봤다는 말은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면 그냥 함께하지 그랬나?"
"두 분이 같이 있는 모습에 도시 운영에 대한 중요한대화를 하는 것 같아 방해하지 않으려고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는 무슨. 그냥 데우스님께 끌려다닌 게 다지."
"그래도 리오님도 꽤 즐거워 보이시던데요?"
"큼- 아무튼. 다음부터는 처음부터 모습을 보이게.
내가 데우스님의 안전을 위해 얼마나 긴장을 하면서 돌아다녔는데.
볼튼이 처음부터 같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았을 거야."
"알겠습니다. 하하-"
그래도 볼튼이 계속 같이 있었다는 말에 리오도 마음이 놓인 것 같았다.
"리오도 이만 돌아가. 오늘은 휴일이잖아? 휴일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라고."
"하아- 알겠습니다. 그래도 관청에 돌아가서 옷은 갈아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관청에 돌아가면 또 거기 박혀서 집에 안 갈 생각이잖아?"
"아닙니다! 오늘은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하는 리오에 나와 볼튼이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광장의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어라? 저사람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리오님 아니신가?"
"저 키가 크신분은 볼튼님이신것 같은데?"
"그럼 저기 얼굴을 가리신 분은 설마?!"
그 목소리에 나는 볼튼과 리오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눈치챘다. 빨리 돌아가자."
"모시겠습니다. 데우스님."
"저, 저도 데리고 가주십시오. 데우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