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아렌달의 선진 문물을 직접 확인한 왕국의 권력자들은 열심히 눈을 굴려 관찰하고, 행정관들을 떠보거나 장인들에게 질문 공세를 펼치며 기술을 베껴가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렇다고 기술을 베껴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눈으로 본 게 있으니 왕국으로 돌아가면 비슷한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을 것이다.
마법 연구 단지나 제철소, 공장 지대같이 핵심 지역들은 처음부터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쉬움을 내비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아쉬운 만큼 아렌달의 상품을 구매하는 모습이었다. 상단들은 왕국의 권력자들이 아렌달의 상품을 확보하라는 지시에 아렌달의 백성들이 사용할 물품들까지 싹쓸이해가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보리스는 다른 사람들보다 잘 아는 만큼 아렌달의 상품보다는 도시를 구경하는 것에 더 시간을 들였다.
"레일을 설치하는데 너무 많은 철이 사용되는 것 아닙니까?
철길은 일반 도로와 다르게 마차나 수레도 달리지 못하는 것 같은데, 차라리 도로를 더 넓게 만드는 것이 나은 것 같습니다.
레일을 만드는 데 사용한 철을 다른 산업에 이용했다면 훨씬 더 도움이 되었을 것 같네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철은 언제나 부족하고 중요한 자원이니까요.
하지만 철도는 굉장한 가치를 가진 운송 시설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기차는 자동차와 다르게 여러 대의 차량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연결이라면?"
"차량을 끌 수 있는 동력 장치만 된다면, 하나의 기차에 몇 개의 차량을 연결해도 괜찮습니다.
지금이야 뉴렌달 안에서 백성들의 교통 시설로만 이용하고 있지만, 앞으로 아렌달 밖으로도 레일이 깔리게 되면 기차는 운송업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될 겁니다.
수십 대의 차량을 연결한 기차가 상품을 옮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 번에 얼마나 많은 양의 상품이 운송되겠습니까?"
철도가 괜히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상징으로 불리는 게 아니다.
자동차나 배, 비행기도 각자 장점이 있다고는 해도 기차가 가지고 있는 운송 능력과 가성비를 따라올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사고만 없다면 궤도를 벗어날 일도 없습니다.
정해진 길 위에서 자동차나 마차 등 다른 운송 수단과 접촉할 일이 없으니 다른 운송 수단과 마찰을 빚을 일이 없고, 도로가 아닌 궤도 위를 달리기 때문에 비와 눈 같은 날씨의 영향도 거의 받지 않습니다."
"그, 그렇군요. 기차의 장점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투자를 고려해볼 만한 시설이군요."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고려하는 게 아니라 무조건 만들어야 하는 것이 철도였다.
괜히 철이 남기 시작하자마자 기차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왕국도 철이 남게 된다면 기차를 도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이만큼 중요하다고 설명을 해줬음에도 아무튼이라고 말하다니…'
보리스의 말에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보리스 국왕 폐하께서도 골프를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영주들이 모두 골프를 친다기에 저도 시작했습니다. 종종 시간이 생길 때 즐기고 있습니다.
검술에는 재능이 없던 저도 골프는 크게 무리가 없더군요. 아주 좋은 스포츠인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야기가 편하겠군요."
"무슨 이야기 말입니까?"
"베르겐의 영주들과 투어 대회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보리스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자신도 모르게 나와 영주들이 대회를 한다는 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골프에 막 관심이 생긴 참에 시작하는 새로운 이벤트에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알고 계시겠지만 베르겐 왕국의 대 영지라 불리는 영지에는 모두 골프장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골프장이 있는 영지에 투어를 돌면서 대회를 개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왕도도 함께 해준다면 더 훌륭한 대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데요."
"저는 대회에 나갈만한 실력이…"
"저 역시 대회에서 입상할 만큼 실력이 좋지는 않습니다.
아렌달에서 대회가 개최될 때 호스트로서 역할만 잘 해내면 되지 않을까 생각 중입니다.
뭔가 큰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친목과 문화 교류의 역할을 하는 대회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한번 생각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골프 이외에도 축구와 연극 등 문화적으로 교류를 할 수 있는…"
아렌달에서 개최되었던 동대륙 회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아스타나 왕국이나 나르비크 왕국 입장에서는 실패한 회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아렌달 입장에서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모임이었다.
그동안 인연이 없던 왕국들과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시장을 얻었다.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지금 새로운 시장을 얻었다는 것은 가치가 있었다.
"외국의 일부 상단에서도 아렌달 백화점에 입점을 신청했습니다."
"좋은 자리는 하나도 없을 텐데, 그래도 들어오겠다는 건가?"
"아렌달 백화점에 입점했다는 것만으로도 상단의 가치가 상승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동대륙 회의가 열린 기간 동안 아렌달을 찾아온 외국의 상단들은 모두 백화점에 엄청난 관심을 보였었다.
돈의 흐름에 밝은 상단이기에 백화점이 지닌 가치를 알아봤을 것이다.
"그리고 베르겐 왕궁에서 메세지가 왔습니다.
베르겐 왕궁은 투어 대회를 개최할 만한 여유가 되지 않는다고 극단의 공연 정도만 교류하자고 하네요."
"음- 지방 영주들과의 사이가 생각보다 더 많이 틀어져 있는 건가?"
"베르겐 북부의 움직임이 조금 노골적이지 않습니까?
혹시 모를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베르겐의 왕권이 저렇게 약해진 것은 사실상 나로 인한 것이기에 보리스에 대한 약간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어쩌면 이번 투어 대회가 영주들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베르겐 왕궁은 영주들을 위험의 대상으로 본 것 같았다.
'베르겐은 이제 이 흐름을 막지 못하겠네.'
아렌달에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지 어느새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라디오 방송과 신문을 통해 백성들은 뉴스를 접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어디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고, 어떤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아렌달에서 무슨 일을 기획 중인지 백성들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다른 일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백성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주제는 단연 문화와 스포츠였다.
"오늘 공연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공연은 아렌달 가문의 샤를로트님과 체스터 가문의 이블린님, 그리고 상인 길드와 치킨 전문점 브룩스의 후원을 받아 열리게 되었다는 점을 알려 드립니다.
그럼 첫 번째 무대입니다.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아렌달 최고의 가수. 세이렌양을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와- 천상의 목소리!"
"세이렌님. 사랑해요!"
음악 방송에서만 듣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실제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극장과 공연장을 찾았고,
"내일부터 리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건가?"
"분명 체스터 가문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맨체스터가 우승할 거야."
"멍청한 소리! 체스터 가문만 팀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야.
리버는 주인인 귀족 가문과 같은 이름을 달고 뛰는 팀이라고. 그리고 아렌달 컵의 우승 트로피를 가지고 있는 명문 중에 명문이지."
"명문? 리버 가문보다 체스터 가문이 훨씬 명문 귀족이라는 걸 모르는 거냐?"
"쯧쯧. 너희 둘 다 틀렸어. 제철소의 마초들을 몸싸움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이번 대회의 가장 큰 우승 후보는 압도적인 피지컬을 가진 스틸러스다."
본격적인 축구 리그가 시작된다는 것도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소개되면서 백성들을 흥분시켰다.
그만큼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백성들은 생각했다.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하루도 빠짐없이 일해서는 문화생활을 제대로 즐길 수 없어."
"문화생활을 즐기면서 휴식할 수 있게 휴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일부 백성들은 문화생활을 즐기겠다고 일터에 나오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모아 놓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기 전에는 일터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조금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제가 백성들에게 너무 많은 놀 거리를 주는 것은 안 좋은 결과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리오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일자리에서 짤릴까봐 걱정해서 문화생활을 즐기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게 휴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휴일을 요구하다니… 확실히 백성들의 의식 수준이 엄청나게 높아지긴 했네."
"의식 수준이 높아진 게 아니라 주제를 모르는 것이지요.
감히 백성이 놀고 싶다는 생각을 어떻게 가진단 말입니까?"
이세계에서 백성들은 귀족들의 재산이다. 특히 영주들은 생사여탈권까지 가지고 있는 신분 사회였다.
귀족들의 재산인 백성들은 귀족을 위해 일해야 하며, 휴식 역시 귀족이 내려주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휴일을 내려주기도 전에 먼저 요구하는 백성들이라니. 백성들에게 아렌달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따로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백성들에게 휴식을 내려 줄 수 있는 여건도 아니지 않습니까?
외부에서 요청하는 생산량을 맞추려면 일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상황입니다."
"음- 그것도 그렇지."
인공 마나석의 개발로 산업이 새로운 탄력을 받았고, 동대륙 회의 이후에 외국으로 나가는 상품도 늘어나면서 아렌달의 생산량이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다.
아렌달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인구 부족이 다시 한번 느껴지는 와중에 휴일이라니.
지금 아렌달의 사정과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 경험상 무작정 일하는 시간이 늘어난다고 그 효율이 늘어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피곤해서 쉬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더 일하기 싫은 마음만 생겨났다.
'공사판에 있을 때 아침 6시에 출근해서 11시에 퇴근한다고 일의 능률이 올라가지는 않았지.'
아렌달에서 농사만 짓던 시절이라면 몰라도 뉴렌달에서 백성들은 정말 열심히 일해주었다.
정해진 휴일도 없이 일터의 사정에 따라 정말 가끔씩만 휴식을 취하면서도 불만을 보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쉬지 않고 일해준 백성들 덕분에 아렌달은 이만큼이나 발전할 수 있었던것이다.
산업의 형태가 달라진 만큼 농사만 짓던 시절과 똑같이 백성들을 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아렌달의 사정상 백성들이 불만을 일으킨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일터에 나가지 않는 백성들은 벌을 준다고 하면, 백성들도 어쩔 수 없이 일터에 나가지 않겠…"
"휴일… 주도록 해."
"알겠습… 네? 데우스님. 지금 휴일을 주라고 하신 겁니까?"
"그래. 아렌달에서 산업에 뛰어든 백성들은 모두 휴일을 가질 수 있게 해줘."
"데우스님!"
리오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평소라면 내 지시에 의문을 품더라도 금방 받아들이는 리오였지만, 이번 일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금 영지에 일손이 부족한 상황에서 백성들에게 휴일을 주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아렌달의 수석행정관을 맡고 있는 저로서는 지금의 지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리오가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휴식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세계 어디에도 정기 휴일이라는 개념은 없다.
당연히 휴식 덕분에 일의 능률이 올라갈 수 있다는 개념도 없다.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성과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백성들에게 휴일은 줄 거야.
그래도 너무 많이는 아니고… 14일마다 하루씩. 이정도면 괜찮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