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현대인-95화 (95/169)

95화

각 왕국의 권력자들이 원탁에 둘러앉았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제각기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동대륙의 강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베일리 백작을 비롯한 왕국의 소드마스터들이었다.

'볼튼이 없었다면 기세만으로 압살당했을지도 모르겠네.'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와중에 아스타나 왕국의 빅터 왕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스타나 왕국의 제안에 이렇게 모여주신 각 왕국의 주인, 그리고 대리자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빅터 왕자의 말대로 동대륙 회의는 아스타나 왕국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아스타나 왕국에서 회의를 열자고 제안했지만, 다른 왕국들의 반발에 아렌달에서 회의가 열리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사안인 마법 무기에 관해서는 아렌달을 빼놓을 수가 없었고, 뛰어난 마법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다른 왕국에 비해 군사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적었기에 별로 위협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선뜻 회의의 자리를 마련해준 아렌달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빅터 왕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동대륙의 왕국들은 과거부터 다른 대륙보다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대한 대륙의 크기만큼이나 많은 자원을 가진 중앙대륙, 철과 마나석이 끊임없이 나오는 남대륙과 비교하면 동대륙의 자원은 상당히 부족합니다.

덕분에 그동안 다른 대륙에 비해 동대륙의 기술 발전이 더뎠다는 사실은 여기 계신 모두가 느끼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빅터 왕자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기술 발전이 더뎠던 것은 그동안 투자를 안 했기 때문이지 단순히 자원이 부족해서는 아니잖아?'

자원이 부족하다고 발전이 더디다는 말은 권력자들의 핑계일 뿐이다.

아렌달만 해도 특별히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현대 지식이라는 치트키를 가지고 있었지만, 바깥의 영토에서 나오는 자원을 더 해도 아렌달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력을 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동대륙은 그런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도 이렇게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다른 대륙에서는 구할 수 없는 수많은 마법 아이템들이나, 마법 무기. 그리고 다양한 기술과 각종 문화가 동대륙에서 태어나 발전하고 있습니다."

'어이구?'

아렌달이 이룩한 성과들을 동대륙의 것이라고 퉁 치는 빅터 왕자의 모습에 실소가 나왔다.

그건 나뿐이 아니었는지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참는 모습이었다.

이런 반응에도 빅터 왕자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 발전한 동대륙의 모습을 다른 대륙에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선진 문화와 발전된 기술을 다른 대륙과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동대륙의 위대함을 알릴 수 있는 적기입니다."

빅터 왕자는 왕국의 권력자들을 하나하나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래서 아스타나 왕국은 다른 대륙으로의 진출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멋들어지게 말했지만, 결국에는 힘을 합쳐서 다른 대륙을 침공하자는 말이었다.

그 말에 나르비크 왕국의 아서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제안이오. 우수한 기술을 가진 왕국이 그 기술을 다른 곳에 선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동대륙의 왕국들은 모두 비슷한 수준의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서로를 향하기보다는 다른 대륙에 우리의 기술을 알리는 게 좋을 듯하오."

아스타나 왕국과 나르비크 왕국에서 군대를 움직일 준비를 한다는 사실은 다른 왕국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대상이 자신들의 왕국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자 안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카르툰 왕국에서 빅터 왕자를 향해 말했다.

"굳이 우리가 가진 기술을 자랑할 필요가 있습니까?"

"다른 대륙보다 기술적 우위를 가지고 있는 지금이 대륙의 위대함을 알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카르툰 왕국에서는 이 기회를 허무하게 흘려보낼 생각입니까?"

"중앙대륙이나 남대륙에는 오랜 시간 교류를 해온 왕국들도 있습니다.

그들과 지금까지 쌓아온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카르툰 왕국은 중앙대륙과 교역을 통해 부를 쌓은 왕국이었다. 지금도 중앙대륙과 교역하며 가장 많은 이득을 챙기고 있으니 전쟁을 벌여봐야 좋을 게 없을 것이다.

그리고 카르툰 왕국은 아스타나 왕국과 가장 사이가 나쁜 왕국이었다.

최근까지 아스타나 왕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공격을 받았으니, 아스타나 왕국이 주도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술이 다른 대륙을 압도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다른 대륙에서 마법 무기의 연구가 더디다고 해도 마법 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들이 어느 정도의 성능을 보이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리스크가 생길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빅터 왕자는 카르툰의 주장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동대륙의 기술은 분명 다른 대륙을 압도할 겁니다.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말이죠."

그렇게 말하면서 빅터 왕자가 나를 가리켰다.

"이미 우리는 아렌달의 마법 무기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알고 있습니다.

베르겐 왕국과 나르비크 왕국, 그리고 저희 아스타나 왕국은 직접 그 위력을 확인했으니 알 것입니다."

빅터 왕자의 말에 아서 대공과 보리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아렌달의 마법 무기 앞에서는 소드마스터도 목숨을 장담하지 못합니다."

빅터 왕자의 말에 소드마스터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볼튼에게 보호받고 있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기세를 올리는 소드마스터들에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그들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금방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큼- 아무튼 아렌달의 마법 무기만 있다면 다른 대륙을 압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빅터 왕자는 나를 끌어들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음- 한마디로 나에게 마법 무기를 내놓으라는 말이군요."

"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협력하자는…"

"그게 그 말이지 뭐-"

"……"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빅터 왕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스타나 왕국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럼 아렌달도 함께…"

"하지만 아렌달은 다른 대륙으로 진출할 생각이 없습니다."

내 말에 빅터 왕자가 테이블을 치며 일어났다.

"아스타나 왕국 혼자서 잘 나가자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동대륙의 일원으로서 함께 하자는 제안을 이렇게 무시하다니!"

아서 대공도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입을 열었다.

"아렌달은 자원이 부족하지 않은가 보군.

근래에 마법 아이템의 생산량을 늘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얼마나 갈 수 있을 것 같소?

분명 금방 자원이 떨어져서 생산량이 감소하겠지.

그전에 대륙의 시장을 다시 안정시켜야 하지 않겠소?"

아서 대공의 말에 빅터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한 자원을 들먹이며 아렌달을 끌어들이려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아직 인공 마나석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한 왕국들의 정보력에 안도감마저 들었다.

"자원이야 바깥의 땅을 개발하면 나오지 않겠습니까?"

"자꾸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실 겁니까?"

"잘 모르셨나 본데 나는 이래 봬도 평화주의자라서 말입니다.

굳이 피를 보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렌달은 왜 이 회의를 받아들이신 거요?"

아서 대공의 물음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친하게 지내자고 그러는 줄 알았지. 같이 전쟁을 하자고 모이는 줄은 몰랐습니다."

"……누굴 바보로 알고 있는 거요?"

"오만하구나! 아렌달!

감히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나를 향해 소리치는 빅터 왕자를 그의 뒤에 있던 실베르 백작이 제지했다.

"왕자님. 흥분을 가라앉히시지요."

"실베르 백작. 저 오만한 자를 가만히 두실 겁니까?"

"왕자님. 여기는 아스타나 왕국이 아닙니다."

그제야 여기가 어딘지 다시 생각이 났는지 빅터 왕자가 흥분을 가라앉혔다.

볼튼과 친위대가 내뿜는 기세에 빅터 왕자는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아렌달은 함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아렌달은 그저 다른 왕국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을 뿐입니다.

서로의 시장을 개방해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교류를 하는 협력이라면 얼마든지 함께하겠습니다."

"칫- 겨우 그딴 것을 하려고 이런 자리를 마련한 줄 아나…"

"동대륙의 일원으로서 다른 왕국과의 친목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보리스나 오울루 왕국의 사람들은 다른 대륙으로 진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베르겐 왕국은 지금과 같은 상황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베르겐과 교류를 원한다면 언제든지 우리 왕국에 사신을 보내도 좋습니다."

"보리스 국왕 폐하. 정말 이대로 괜찮다는 말입니까?"

"베르겐은 지금 왕국을 발전시키기에도 바쁜 상황입니다."

"하아- 미치겠군."

보리스마저 나와 같은 뜻을 내비치자 빅터 왕자는 다시 한번 표정을 구기며 일어났다.

"이딴 이야기를 나누려도 수십일이나 걸려서 여길 왔다는 말인가!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으니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빅터 왕자의 말에 아서 대공 역시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아렌달이 계속 평화를 바란다면 나르비크 왕국도 아렌달과는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겠소."

"아렌달이 나르비크 왕국의 뒤통수를 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알겠소."

빅터 왕자와 아서 대공이 회의장을 나가는 모습에 나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다른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아렌달에서는 새로운 마법 아이템을 계속해서 시장에…"

아스타나 왕국과 나르비크 왕국이 회의장을 떠난 이후 나머지 왕국들과 몇 가지 협약을 맺을 수 있었다.

오울루 왕국에서는 뉴렌달 브랜드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고, 에르트리아 왕국에서도 아렌달에 자국의 상단을 보내기로 했다.

베르겐 왕국은 기존보다 상단 간의 통행을 더 쉽게 해주고, 상품과 자원의 거래량을 늘릴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영주들과 직접적인 거래는 지금처럼 왕궁에서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카르툰 왕국은 아렌달에서 가장 멀리 있는 만큼 협약을 맺은 것은 없었지만, 대화를 통해 중앙대륙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울드 상단에서 가져다주는 정보와 조금 차이가 있네."

"아무리 대상단이라고 해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왕국이 모으는 정보가 더 광범위하고 정확하지 않겠습니까?"

"꼭 그렇지만도 않을걸?"

'국제적인 기업의 정보력은 국가보다 더 정확할 때도 있었으니까.'

상단을 하나의 기업이라고 생각해보면, 상단의 정보도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앙대륙에서도 마법 무기 개발에 이렇게나 열을 올리고 있을 줄이야."

"중앙대륙에서 마나석의 거래를 막은 것도 제법 시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어느 정도 성과는 나오지 않았을까요?"

처음 아렌달에서도 마법 무기를 만들겠다고 연구를 시작하고 겨우 2년 만에 실전에 배치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다른 왕국에서도 충분히 쓸만한 마법 무기를 만들 시간은 되었을 것이다.

물론 현대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들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앞으로의 전쟁은 이전의 전쟁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 아렌달을 따라오려면 한참이나 멀었다는 것이죠. 하하-"

"맞아. 아렌달이 위협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게 우리는 조용히 발전이나 하자고.

언젠가 아렌달이 위협이라고 느껴도 감히 대적할 생각도 못 하도록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