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아렌달에 부족한 것이라고 하면 당연히, 사람이다.
베르겐 왕국에서도 나르비크 왕국에서도 인구의 유입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인구도 성장세가 확 꺾이지 않았는가.
이런 상황에서 스톨 영지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인구를 조금만이라도 나눠 받을 수 있다면 아렌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베르겐 왕국에서 스톨 영지가 아렌달로 인구를 내주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거라는 거지.'
스톨이 아무리 아렌달과 인연이 깊고, 친밀한 관계라고 해도 스톨은 베르겐의 영지.
심지어 과거 아렌달과 같이 자치권을 가진 영지도 아니었다.
베르겐 왕국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휘두를 수 있는 영지라는 말이다.
아무리 영주들의 권한이 강한 세계라고 해도 왕국에서 스톨 영지에 왕권을 행사하면 스톨 백작으로서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왕국의 지시를 거부하게 될 경우 국왕이 지방 영지들을 동원해 스톨 영지를 압박할 수도 있었다.
'명분은 베르겐 왕국에 있으니까.
명분과 왕국의 명령만 있으면 영주들도 스톨 영지가 가지고 있는 금광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들겠지.'
그 명분이라는 놈 때문에 아렌달에서도 베르겐 왕궁에 마법 무기를 넘겨준 것이다.
스톨로부터 사람을 넘겨받을 수 있는 명분이 없는 이상 라이언과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함부로 사람을 넘겨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스톨 백작님이라면 아렌달에서 도움을 요청한다면 어떤 방법이든 만들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는 스톨 백작이라도 명분 만들기가 쉽지 않을 텐데?
이렇게 눈에 띄게 사람을 모았는데, 그걸 아렌달에 넘겨준다면 누가 봐도 아렌달의 사주를 받아서 사람을 모은 것 같잖아."
괜히 그랬다가는 기껏 봉합해 놓은 베르겐과의 관계가 또 틀어질 수도 있었다.
"정치나 경제같이 정책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친목을 위한 대화를 나누자고 스톨 백작님을 초대하는 건 어떻습니까?
샤를로트님이 계시니 스톨 백작님을 초대할 명분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외부에 보여주는 모습은 친분을 위한 대화라는 건가."
"두 분은 연방과 영지의 주인이시니 정치나 경제, 그밖에 인구나 물류의 이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눈 가리고 아웅이네."
"그래도 스톨 백작님과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좋은 명분 아닙니까?"
리오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내 초대에 라이언은 곧바로 응답해주었다.
뉴렌달로 들어오는 스톨 가문의 사람들을 나와 샤를로트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습니다. 스톨 백작."
"갑자기 초대를 해주셔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그런데 장인께서는 같이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께서는 지금 귀족들의 행사에 참여하시느라 바쁘셔서요.
북부에 있는 아라스 가문의 결혼식에 참석하신 이후 그곳에서 열리는 사냥대회까지 즐기시다가 돌아오시겠죠."
"여전히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시네요."
"아버지 말씀으로는 자신은 아직 청춘이라고 하더군요.
자동자와 고속도로 덕분에 더 바빠지신 것 같습니다."
스톨 백작의 이야기에 샤를로트가 피식 웃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오라버니께 영지까지 물려주신 분이에요.
아마 돌아가실 때까지 그렇게 즐기시다 가시겠죠."
"샤를로트. 무슨 말을 그렇게…"
"언제까지 이렇게 인사만 나누고 있을 거예요?
두 분 대화에 가족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만 들어가요."
쿨하게 돌아서는 샤를로트에 나와 라이언은 서로를 보고 웃었다.
"아마 샤를로트가 아버지를 제일 닮았을 겁니다."
"영지민을 늘리고 있는 것은 나중을 위함입니다."
"나중이라 하면?"
"아직 모르십니까? 북부의 움직임이…"
"체스터 영지를 중심으로 북부가 결집하고 있다는 건 눈치채고 있습니다."
내 대답에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의 영주들은 더 이상 왕도에 가지 않습니다.
북부 안에서 모든 게 해결될 정도로 몸집이 커진 상태죠."
"체스터 영지의 투자가 효과를 보고 있군요."
"맞습니다. 왕도는 이제 북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북부의 생산량이 중앙을 넘어섰을 뿐 아니라, 북부에서 필요한 것이 생기더라도 왕도가 아닌 아렌달에 요청을 하면 되니 굳이 왕도를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죠."
거리상으로 훨씬 멀다고 해도 왕도보다 아렌달에서 출발하는 물건들이 더 빨리 북부에 도착한다.
아렌달에서 체스터까지 뚫려있는 고속도로뿐 아니라 아렌달에는 다른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뛰어난 운송 수단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북부와 베르겐의 뜻이 달라질 때 늦지 않으려면 저희도 미리미리 몸집을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톨도 이 흐름을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베르겐 왕국은 이 흐름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스톨은 아렌달과 함께 하겠다고요."
"......"
"영지의 시스템을 아렌달과 비슷하게 바꾸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까 말씀하신 인구의 이동은 조금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빙긋 웃는 라이언의 말에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한 지방을 지배하는 권력자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음에도 라이언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엔나도 비슷한 생각일 겁니다."
"마르코는 뭐-"
열렬한 아렌달의 추종자인 마르코는 자신이 영지를 물려받는 순간 나에게 엔나를 바치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인질로 데려왔더니 아렌달의 문물에 빠져서 돌아가라고 풀어줘도 돌아가지 않은 녀석이 엔나의 차기 영주인 마르코 엔나였다.
물론 마르코와 함께 데려왔던 마티아 엔나 역시 아렌달의 열렬한 추종자로서 아렌달을 위해 일하고 있었으니 엔나 영지의 미래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스톨의 뜻은 알겠습니다. 그럼 아렌달은 그 흐름을 기다리도록 하죠."
"그런데 데우스님. 동대륙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스톨 영지가 가진 정보력이 생각보다 뛰어난 듯했다.
"스톨에서는 얼마나 확인했습니까?"
"아스타나 국왕이 아직 확장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나르비크 왕국도 내전으로 입었던 손해를 외국으로부터 만회하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이 베르겐 왕국은 아니라는 것."
생각보다 자세한 정보에 놀라자 라이언이 내게 물었다.
"아렌달에서는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스톨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더하자면, 전장이 동대륙은 아니라는 것 정도겠네요."
"그게 진짜입니까? 동대륙이 아니라면…"
내 말에 라이언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왕국들의 칼날이 타 대륙을 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동대륙의 왕국들은 지금 너나 할 것 없이 마법 무기를 개발하는데 총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앙대륙이나 남대륙에서는 아니죠."
시장에서 마나석의 거래를 막은 것으로 보아 중앙대륙이나 남대륙이나 무기개발은 시작했을 것이다.
다만 동대륙에서처럼 총력을 기울이며 개발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미 실전 배치를 시작한 동대륙의 왕국들과 전면전으로 들어가면 분명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렌달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가만히 있을 생각입니다."
"다른 왕국들처럼 움직이실 생각은 없는 겁니까?"
"굳이 남의 것을 빼앗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역시…"
"그리고 정복하지 않아도 충분히 지배할 수 있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내 말에 라이언은 즐거운 듯 크게 웃었다.
"그럼 더 이상 이야기 해봐야 의미가 없겠군요."
현재 이세계에서 가장 비싼 재료. 어느새 같은 질량의 금보다 더 비싼 값으로 거래되는 광석.
오랜 시간 마모된 유리 같은 푸른색의 돌을 손바닥 위에서 굴리며 나는 중얼거렸다.
"마나석이란 건 도대체 뭘까?"
그 중얼거림에 자하가 나에게 말했다.
"마나석이 마나석이지 무엇입니까?"
"아니, 마나석은 어떤 특별함을 가지고 있길래 마나를 담을 수 있을까 하는 말이다."
"마나석의 특별함이요?"
"다른 어떤 금속이나 보석에도 마나를 담을 수 없잖아?
오직 이 투명한 돌에만 마나가 담긴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요."
자하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나를 이해하는 마법사가 마나석에 대해 이렇게 관심이 없다니."
"……"
"왜 이 마나석이라는 돌에만 마나가 담기는지 알고 싶다는 말이야.
마나가 특징적으로 이 돌을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이 돌에 어떤 특성이 있어서 마나를 붙잡아 두는 건지 말이야."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하신 겁니까?"
"그래야 인공 마나석을 만들 수 있을 것 아니야."
마나석 광산에서 캐낼 수 있는 마나석은 한계가 있었다. 어떤 조건에서 마나석이 만들어지는지 몰랐기에 광산을 찾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만약 인공 마나석을 만들 수 있다면 마나석 광산을 찾는 어려움을 덜 수 있을 것이다.
"인공마나석이라니… 그게 가능합니까?"
"인공적으로 보석도 만드는데, 마나석이라고 못 만들까?
한 번도 해보지 않았으니까 아직 가능성은 열려있잖아?"
"아-"
"만약 인공 마나석을 만들 수 있다면 마법 연구에 도움이 되지 않겠어?
지금은 마나석이 너무 비싸서 예전처럼 막 쓰지도 못하고 있잖아."
불과 몇 년 전에는 마법사들이 로브 주머니에 수십 개씩 마나석을 쟁여놓고 사용하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마나석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겨우 몇 개의 마나석만, 그것도 마나가 떨어질 때마다 충전하면서 사용하고 있었다.
산업 분야에서도 마나석의 소비량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단순히 마법 연구를 위해 제공되는 마나석은 점점 물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나석을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마법사들이 주머니가 아니라 캐리어에 마나석을 쟁여놓고 사용해도 될 것이다.
"인공 마나석의 도움으로 마법 연구가 더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다면, 진리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 말에 자하가 벌떡 일어났다.
"이건 저 혼자만의 고민으로 풀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마법사들의 생각을 모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자하의 호출에 마탑의 마법사들이 모두 모였다.
"달리아는?"
"모르겠어요. 지금 마탑에 없는 것 같은데."
"……또 어딜 간 거야?"
방랑벽이 도져서 마탑을 비운 달리아를 빼고 마법사들이 모두 모였다.
"자하님. 무슨 일인가요?"
에일렌의 물음에 자하가 말했다.
"데우스님께서 엄청난 숙제를 주셨다."
"수, 숙제요? 그것도 엄청난?"
숙제라는 단어가 주는 거부감에도 일부 마법사들이 눈을 반짝였다.
숙제를 완수하면 그 보상만큼은 확실하게 챙겨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대단한 숙제길래 마탑의 전원을 모이라고 하신 거예요?"
"설마 또 자동차나 기차 같은 걸 만들라는 건 아니죠?"
"다른 영지로 파견을 나갈 바에는 차라리 자동차를 만드는 게 낫지 않아?"
궁금증에 목소리를 높이는 마법사들에 자하가 손을 들어 마법사들의 시선을 모았다.
"이번에 만들어야 하는 건 마나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