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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현대인-88화 (88/169)

88화

미리아가 마탑을 떠난다는 이야기는 마법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기존의 마탑을 떠나던 마법사들과는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마탑을 떠날 필요까지는 없는데."

"미리아가 자신은 더 이상 마탑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했어요."

"무슨 자격?"

내 물음에 에일렌이 말했다.

"미리아는 예전부터 자신이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없다고 많이 힘들어했어요.

아렌달에 와서 마법사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어린 마법사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마법사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생각을 많이 했나 봐요.

그렇게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연구 단지에서 자주 보는 마무씨와 친분을 쌓은 것 같아요."

"그렇구나."

"그리고 미리아가 말하길 이제 자신은 진리의 문 너머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어요.

아까 말씀드린 자격이 없다는 말은 미리아가 더 이상 마법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마법사들이 충격을 받은 게 그것 때문인가?"

마법의 힘을 잃은 마법사.

"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마법사는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아가 증명해 주었어요."

에일렌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렌. 너는?"

"……저는 아직 진리의 끝을 보고 싶어요."

에일렌의 대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미리아의 행동에 감화되어 다른 마법사들도 변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다른 마법사들은 진리를 버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마법사가 아니라고 해도 지금까지 쌓아 온 지식이 없어진 것은 아니잖아?

마법사가 아닌 그냥 연구원으로라도 괜찮다고, 원한다면 마탑이나 연구 단지에 남아도 좋다고 미리아에게 말해줘."

"감사합니다. 데우스님."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마법사가 아닌 과학자나 연구원으로 미리아의 지식을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말에 에일렌은 웃으며 돌아갔다.

"보통 사람의 삶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힘을 잃어버리다니 신기하네요."

"그러게."

"저라면 결코 보통의 삶을 선택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 결혼은 무덤이라서?"

내 말에 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큼- 결혼은 무덤이 맞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래?"

"마법사는 아무나 될 수 없는 선택받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우도 좋고, 존경도 받으면서, 기적까지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니까요.

일반 백성들처럼 힘든 일을 하며 치열하게 살아갈 필요도 없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하지만 마법사도 마법사 나름의 고민과 어려움이 있지 않겠어? 범인들은 모르는 고충이 있겠지."

그 말에 리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볼튼을 바라봤다.

볼튼은 우리의 시선에 웃으며 말했다.

"소드마스터가 마나 소드의 힘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단련하지 않아 힘을 잃는다면 모를까, 누군가가 강제로 힘을 빼앗아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데우스님의 호위는 걱정이 없겠군요."

"그건 다행이네."

멋지게 날아가는 티샷을 보며 스톨 백작이 미소지었다.

"역시 아렌달에서는 내 실력이 제대로 드러나는군. 허허허-"

"다른 영지에서도 자주 골프를 치시는 겁니까?"

"요즘 베르겐의 영주 중 골프를 치지 않는 사람이 없다네. 대부분 영지에서 골프장을 만들었지."

귀족들 간의 친목이나 정보 교환을 위해 골프만큼 좋은 스포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이 들으셨겠군요."

"흥미로운 이야기? 물론이지."

내 물음에 스톨 백작이 웃으며 말했다.

"아렌달에서 흥미를 느낄만한 이야기라면… 그래 마법 무기의 이야기는 어떨까?"

"주제만으로도 관심이 생기네요."

"아스타나 왕국에서 새로운 마법 무기를 개발했다더군.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꽤 괜찮은 무기인 것 같더군.

그래서 다시 한번 다른 왕국에 시비를 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아직도 다른 왕국을 긁으려고 하다니… 아스타나의 국왕은 생각보다 더 욕심이 많은가 보군요."

"자신의 대에서 이렇다 할 업적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조바심을 내는 거겠지."

베일리에서 한 방 먹고도 포기하지 않았는지 아스타나 왕국에서 또 전쟁을 일으키려는 모양이다.

"그래도 생각이 있다면 베르겐은 건드리지 않겠죠?"

"그건 모르는 이야기지 않겠나?

아렌달은 이제 베르겐 왕국이 아니니까.

만약 아스타나가 접근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아스타나는 아렌달에서 너무 멀지 않습니까?"

내 대답에 스톨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중앙 대륙에서도 마법 아이템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더군."

"그 이야기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울드 상단에서 말하더군요.

중앙 대륙에서 아렌달의 마법 아이템을 모방한 물건들이 거래되고 있다고요."

"맞아. 모방품이 나오고 있지.

근데 아직은 말 그대로 모방품에 불과해."

"그렇습니까?"

"아주 조잡한 수준이네. 아마 아렌달의 기술을 따라오려면 몇 년은 더 필요할 거야."

"그동안 열심히 도망쳐야겠군요."

그 외에도 베르겐 왕국의 중앙 정치나, 지방 영지들의 변화 등 제법 쓸만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아렌달에서 내게 해줄 이야기는 없나?"

"음- 스톨 백작님의 흥미를 끌만 한 이야기라면… 한가지 있군요."

"?"

"뉴렌달에 백화점이 들어설 겁니다."

"백화점?"

"네. 이세계의 모든 상품을 거래할 수 있는 만물상이죠."

그 말에 스톨 백작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르비크 왕국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개방됨과 동시에 상단들이 몸집을 불려 나갔다.

상업지구에는 더 이상 새로운 가게나 창고가 들어설 공간이 없었기에 상단들은 나에게 거래를 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요구했고, 나는 그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백화점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마음 급한 상인길드에서 부족한 건설 인력을 끌어오는 것으로 하면서, 뉴렌달 외곽에 새로운 건물을 만들고 있었다.

마탑과 해안가 호텔을 제외하면 뉴렌달에서 세 번째로 높은 건물이었다.

"아렌달의 건설 기술은 정말 말이 안 나오는군.

마치 요새처럼 보일 정도야."

"저걸 만드는데 상인들이 돈을 때려 붓는다던데…

도대체 몇만 셀링이나 썼을까?"

오직 자본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백화점에 백성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상인길드와 상단의 대표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관청을 오가고 있었고, 그 덕분에 행정관들이 다른 일에 여력을 나누기 힘들 정도였다.

"지금까지 백화점에 입점하기로 한 상단이 몇 개지?"

"아렌달 상단을 제외하면 총 32개 상단입니다. 그중 9개는 나르비크에서 들어온 상단입니다."

"32개라… 조금 부족한 느낌인데…"

"아렌달에서 거래하는 큰 상단들은 전부 들어가는 것입니다."

백화점에 공실이 생길까 걱정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아렌달의 명성이 올라가서 외국의 새로운 상단들이 찾아오게 되면 그때 새로 입점을 받는 수밖에.

그동안 공실은 뉴렌달 브랜드의 상품들로 채우면 어느 정도 백화점의 모양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명품관의 준비도 잘 되고 있지?"

"귀족님들께 보여줄 물건은 착실하게 모으고 있습니다."

백화점은 일반 상점들과는 달랐다.

스톨 백작과 같은 큰손들이 한 번에 크게 크게 질러줘야 한다.

베르겐의 왕도나 나르비크의 왕도에서 모으고 있는 장인들의 작품과 아렌달의 마법 아이템들을 같이 두면 명품관의 모양새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상인길드에서 요청한 게 있습니다."

"길드에서?"

"아무래도 상단주들이 백화점에서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모양입니다.

상인길드에서 중재한다고 하는데 잘 안되는 모양인지 데우스님께 중재를 요청해왔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길드에서 알아서 하라고 할까요?"

"그렇게 놔두다가는 백화점 다 지어져도 싸우고 있을걸?

상단주들에게 모이라고 해. 정 안되면 내가 제비뽑기라도 해서 배정할 테니까."

며칠 후, 길드로 상단주들이 모였다.

"데우스님! 이렇게 중요한 사안을 제비뽑기로 한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동안 저희가 아렌달에서 함께한 시간이 얼마인데.

설마 저희와 나르비크 왕국의 상단을 같은 선상에 놓고 계신 것은 아니시죠?"

"데우스님. 아렌달이든 나르비크 왕국이든 장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아렌달에 많은 이득을 줄 수 있는 상단에 좋은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헛! 무슨 상관이라니! 로슈 상단은 장사만 된다면 왕국도 팔아치울 상단이었군."

로슈 상단의 도발에 상단주들이 비난했지만, 이들도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데우스님. 저희 로슈 상단에서는 좋은 자리만 내어주신다면 30%의 수수료를 내겠습니다."

"로슈상단이 원하는 자리가 있나?"

"저희는 1층 입구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1층 입구. 최고의 명당자리 중 하나였다.

"데우스님. 저희 역시 1층 입구를 내어주시면 30%의 수수료를 내겠습니다."

그 제안에 다른 상단들 역시 명당자리를 빼앗길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같은 자리를 모두에게 내줄 수는 없는 법.

"길드장. 그거 가지고 와."

"그거요?"

"우리 행정관이 길드에 보내준 백화점 내부 지도 있잖아?

상단주들에게 안내할 때 쓰라고 준 것."

"아! 알겠습니다."

상인 길드원이 서둘러 백화점 내부 지도를 가지고 왔다.

나는 지도를 펼쳐두고 그 위에 펜으로 선을 쭉쭉 그었다.

"음- 이 정도면 됐지?"

"데우스님. 그 선들은 도대체…"

"A등급부터 E등급으로 나눠진 배정표다.

상단의 주인이라면 어디가 A등급이고 어디가 E등급인지는 알겠지?"

내 물음에 상단주들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저, 정말 제비뽑기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처음부터 제비뽑기는 아니지.

A등급부터 E등급까지의 거래 수수료가 다르게 적용될 거야.

높은 수수료를 내기 싫으면 A등급 자리를 포기하면 되는 것이다.

만약 각 등급에 입점할 수 있는 상단의 숫자가 넘어가게 되면 그때부터 제비뽑기야."

내 설명에 상단주들의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데우스님. 중요한 사항인 만큼 회의를 할 수 있게 조금만 시간을…"

"이미 회의는 할 만큼하고 온 것 아니야? 분명 꽤 많은 시간을 기다려줬는데?

밖으로 나갔다가 상단끼리 담합을 할 수도 있으니, 오늘 이 자리에서 결정한다."

"……"

"A등급의 수수료는 35%, B등급 25%. C, D, E등급은 5%씩 수수료를 낮춰주겠다."

"헙! 35%라니요? 그건 너무 높지 않습니까?"

"높다니? 아렌달 밖, 특히 왕국들의 왕도에서는 그것보다 더 높은 세금을 내기도 하잖아?

수수료가 부담스러우면 E등급으로 들어가라고. E등급 수수료는 백화점 밖의 상점보다 낮은 수수료잖아."

"……"

"앞으로 아렌달 백화점을 찾을 손님들을 생각해보라고. 분명 귀족들이나 왕족들도 찾을 거야.

그들에게 상단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고."

그 말에 로슈 상단이 가장 먼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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