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현대인-83화 (83/169)

83화

"왕이 될 생각이 없다니요?! 어째서입니까!"

"베르겐 왕국을 차지하고 싶었다면 덴프린스와 벨파스트를 축출했을 때도 가능했습니다."

"그, 그런…"

"그리고 베르겐을 물려받는 것보다 아렌달에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낫습니다.

아렌달에서는 제게 반기를 드는 세력이 없을 테니까요."

"하아-"

내 말에 보리스는 허탈한 듯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마나 고민하고, 어떻게 결심을 내렸는데…"

"국왕 폐하께서 큰 결심을 내리셨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베르겐의 왕이 될 생각은 없습니다."

"진심이십니까?"

보리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베르겐의 왕족이라고 해도 적통이 아닌 이상 반기를 드는 세력이 반드시 생길 것이다.

그리고 이세계는 절대 왕권의 세계도 아니었고, 특히 베르겐은 나로 인해 중앙보다 지방 영주들의 권력이 엄청나게 강해져 있었다.

아무리 나에게 호의적인 영주들이 많다고 해도 그건 내가 그들과 동등한 영주였을 때의 이야기였지, 왕으로서 그들보다 상위의 권력자가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즉, 쉽게 말해서 왕이라는 자리는 별로 메리트가 없었다.

오히려 작은 땅에 적은 인구라도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영주라는 자리가 무언가 하기에는 훨씬 좋은 자리였다.

"하지만 아렌달은 이미 내가 품기에는 너무 커졌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바보는 아닙니다.

왕도보다 뉴렌달이 베르겐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왕국의 모두가 뉴렌달의 유행을 따라 하고, 인재들은 뉴렌달에서 일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상인들은 뉴렌달과 거래하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하며, 아렌달 영지군의 전력은 대륙에서 으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저는 허수아비 왕이 되어 조롱받게 되겠지요.

아렌달 공작. 나는 그 조롱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를 올려다보는 보리스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렌달이 베르겐 왕국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렌달은 독자적인 자치권을 가진 연방으로서 베르겐 왕국과 함께하겠습니다."

사실 왕도에 세금만 보내줄 뿐이지 아렌달은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영지였다.

나는 거기에 연방이라는 독립적인 자격을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연방이라는 건 공국과는 다른 것입니까?"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아렌달 영지의 공왕으로서 베르겐 왕국의 일원이 되는 것이…"

"저는 왕이 될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말장난 아닙니까?"

"말장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왕은 귀족들에게 작위를 내려줘야 하고, 영지를 하사해야 했다.

그렇게 한다면 분명 아렌달에서도 내 영향력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나는 내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문명의 수준을 빠르게 올리기 위해서는 나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아렌달은 독립하겠지만, 베르겐 왕국과 많은 것을 공유할 겁니다.

다만 베르겐 왕국에 그 어떤 간섭도 하지 않을 것이며, 베르겐 왕국 역시 아렌달에 어떠한 권한도 가지지 않으면 됩니다."

"베르겐의 속국이지만 속국이 아닌 이상한 모습이군요."

"저는 더 이상 베르겐의 공작이 아닐 테니 국왕 폐하께서도 더 이상 저와 비교하며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비교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신하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겠죠."

그 말에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가지 약속드리자면 아렌달은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공작의 말을 믿어도 되겠죠?"

"예. 베르겐 왕국이 아렌달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달려오겠습니다."

왕의 요람에서 보리스와 이야기를 마친 나는 곧바로 뉴렌달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후 보리스는 왕명으로서 나의 공작위를 박탈하고, 아렌달을 하나의 연방으로서 독립시켰다.

아렌달이 베르겐 왕국에서 독립한다는 이야기에 많은 사람이 혼란을 겪었지만,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기에 혼란은 빠르게 가라 앉았다.

이미 아렌달은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영지였고, 베르겐 왕국과의 교류로 이전과 같았으니 말이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불러야 하는 겁니까?

이제 공작도 아니고 영주도 아니지 않습니까?"

"음- 대통령? 이건 아닌 것 같고. 총통? 공화제가 아니니 총통도 이상하고.

연방의 관리자니까. 총독인가? 이것도 왠지 식민지의 관리자인 것 같아서 조금 별로인데…"

"공국으로 독립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국왕 폐하라고 부르는 게 어떻습니까?"

"왕이 되지 않겠다고 연방이 된 건데 국왕 폐하라고 부르면 이상하지 않아?"

"……"

"됐다. 그냥 이름으로 부르자."

"이, 이름으로요?"

"그래. 뭐라고 부르던 무슨 상관이야. 그게 나라는 것만 알면 되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영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어차피 부르라고 지은 이름 아닌가?"

"……"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그는 꽃이 되었다는 시도 있잖아?"

"그런 시가 있습니까?"

"있어. 그런 시가."

그리고 회사에서도 서로를 직책이나 직함으로 부르는 것보다 이름을 불렀을 때 업무 효율이나 상호 관계가 좋아졌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어차피 나도 모두를 이름으로 부르잖아. 나 혼자 특별하게 불리던 것이, 다른 사람들과 같아진 것뿐이다."

"……"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것 누구든 내 이름을 불러 봐."

그 말에 사람들이 서로를 어색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름 부르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영주님. 조금은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는 게…"

서로 눈치를 보며 쉽게 입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때, 샤를로트가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데우스. 오늘 약속 잊은 것 아니죠?"

"고, 공작 부인?"

"저는 이제 공작 부인이 아닌걸요? 그냥 샤를로트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

"이름 부르는 것 따위야 별 것 아니라니까.

샤를로트. 조금만 기다려 줄래. 이것만 확인 해주고 내려갈 테니까."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집무실의 문을 닫는 샤를로트에 집무실의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 영주님과 공작 부인은…"

"데우스와 샤를로트."

"……데우스님과 샤를로트님은 저희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이해할 필요 없으니 그냥 받아드리도록."

내가 가진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굳이 이해시킬 필요는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언젠가는 나를 이해하는 사람들도 나타날 것이다.

나는 나로서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아렌달이 베르겐 왕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처음 맞이하는 봄.

아리아와 놀아주던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리아는 어떻게 교육하고 있는 거지?"

"아리아의 교육이요?"

대한민국이었다면 마침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이기도 했기에 아리아가 어떤 교육을 받고 있는지 궁금증이 생겼다.

"음- 시녀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제가 책을 읽어주는 정도 아닐까요?"

"그게 다야?"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요? 아리아와 비슷한 나이의 다른 아이들도 다르지 않을 텐데요."

"그래도 아리아같이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라면 뭔가 특별한 교육을…"

내 말에 샤를로트가 웃으며 말했다.

"천재적인 재능이라니… 아무리 우리 아이라지만 아리아의 재능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것 아니에요?"

샤를로트의 냉정한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또래의 아이들과 비교해봐도 아리아는 재능이 뛰어난 아이일걸?

그리고 어릴 때부터 확실하게 배워야 재능이 꽃을 피우는 거라고."

"그래도 아직 어린데…"

"아리아뿐만이 아니야. 아렌달을 위해서도 영재 교육이나 고등 교육은 필요하지."

그렇다. 베르겐 왕국에서부터 독립하면서 아렌달에는 더 많은 인재가 필요했다.

외부로부터 새로운 인구의 유입이 막혔으니 내부의 인적 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좋아. 이참에 아렌달의 교육 제도를 다시 한번 정리해야겠어."

교육 제도를 정리하기 위해 영지의 교육 사정을 알아보는 도중에 재미있는 현상이 눈에 들어왔다.

"돈을 받고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거지?"

사교육.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돈을 받고 교육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은 배워야 한다.

지식도 기술도 모두 배움이라는 이름 아래 전수되는 법.

그리고 당연히 많이 배운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가 제공되는 법.

모두가 기초교육을 받고 있으며, 기술 전문 학교와 행정 전문 학교까지 있는 뉴렌달이었기에 뉴렌달의 백성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중요성을 알고 있기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돈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학교 밖에서 교육을 받아서 새로운 인재가 늘어난다면 좋은 현상 아닙니까?

자신들의 재산으로 교육을 받는 것이니 따로 자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요."

"인재가 늘어나면 당연히 좋지."

"그런데 왜 그렇게 고민을 하고 계십니까?"

"자칫 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

내 말에 리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회적인 문제요? 어떤…"

"돈 있는 사람들만 교육받게 되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 그렇습니까?"

당황하며 대답하는 리오의 모습에 나는 그에게 말했다.

"진작부터 알고 있었군."

"……"

"하긴. 리오야말로 영지의 누구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영지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사람이고.

자식들에게도 분명 사교육을 시켰겠지?"

내 말에 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행정 학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하지만 데우스님.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돈을 쓴 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잘못은 아니지."

"그리고 순수하게 제 재산을 사용한 것이니 그것 역시 문제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리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의 말에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자신이 번 돈으로 자식들을 위해 교육을 한 것뿐이니까. 오히려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자식들에게 투자한 리오의 깬 생각에 손뼉을 쳐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대로 놔둘 수는 없지."

"그럼 앞으로는 사교육을 못 하도록 제재하시는 것입니까?"

"아니, 나는 사교육이 너무 커지는 것을 놔두지 않겠다고 했지, 사교육을 제재하겠다고는 안 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교육에 부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나 역시 어렸을 적 학원에 다녔고, 그 덕분에 제법 성적이 오른 경험이 있었다.

분명 사교육의 도움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교육이 도움이 된다고 해도 그것은 영지의 교육 시스템 아래에 있어야 했다.

"아렌달에서 처음 의무 교육을 시작한 게 5년 전이었지?"

"네. 데우스님께서 '교육이 미래다!'라고 하시며 7살부터 12살까지는 의무적으로 학교에 다니게 하셨죠.

덕분에 아렌달의 아이들은 모두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 7살부터 12살까지는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지.

그 기간에는 사교육을 금지한다."

"그 기간이요?"

내 말에 리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 '의무 교육을 받는 기간'은 사교육을 금지한다.

"고등 교육을 하기에 6년이라는 시간은 조금 짧지 않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