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중앙의 귀족들이라고 모두 나를 견제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견제하는 세력은 기존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기득권 세력, 덴프린스 공작이나 벨파스투 후작과 깊은 연관이 있는 귀족들이었다.
젊은 귀족들 특히 뉴렌달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귀족들은 나에게 호의를 보이며 중앙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마법 무기를 보내지 않는다고 불만이 많은가 보네."
"국왕 폐하께서는 별다른 말씀이 없습니까?"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걸 보니 앞으로 국왕의 신뢰는 기대하기 어렵겠어."
"그래도 왕도에 가실 겁니까?"
"신뢰가 깨졌다고 해도 관계가 부서진 것은 아니잖아."
그래도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아렌달에는 아직 베르겐이 필요하니까.
왕도의 모습도 많이 변해가고 있었다.
처음 왕도를 찾아 왔을 때는 역한 냄새에 숨이 막힐 정도였는데, 이제는 위생에 대한 개념이 어느 정도는 잡혔는지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체스터 마을에서 생산하는 비누가 왕도에서 엄청나게 팔려나가는 것만 해도 왕도의 백성들이 제대로 씻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밖에도 뉴렌달 브랜드의 상품들이 상점마다 비치되어있는 모습에 베르겐 역시 아렌달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뉴렌달 문화가 왕도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있다.
이젠 아렌달을 배척하거나 함부로 유통을 끊을 수는 거야.'
내가 왕도로 들어왔다는 소식이 알려졌는지 왕궁 쪽에서 분주한 움직임과 함께 내 앞에 왕국기사단이 나타났다.
"오랜만입니다. 아렌달 공작님."
"에이스경. 오랜만이군요."
"아렌달의 이야기는 아버지나 형님을 통해 계속 들어왔습니다. 샤를로트도 잘 지내는 것 같아 참 다행입니다."
나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에이스는 볼튼과 인사를 나누고 내게 말했다.
"공작님. 바로 왕궁으로 가시겠습니까? 국왕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도록 하죠."
내가 왕국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왕궁을 향하는 모습을 왕도의 백성들이 지켜봤다.
"저분이 아렌달 공작님이시래."
"나도 들어봤어. 베르겐 역사상 가장 훌륭한 영주님이라던데."
"맞아. 왕국의 영토를 넓히고, 새로운 기술들로 왕국을 윤택하게 해주셨지.
국왕 폐하도 훌륭하신 군주지만, 아렌달 공작님이 더 훌륭한 군주라는 말이 괜히 들려오는 게 아니지."
"아렌달 공작님께서 국왕이었다면 왕도도 엄청나게 발전했겠지?"
"쉿! 말 조심해. 방금 그 말은 반역으로 들릴 수도 있으니까."
백성들의 목소리에 일부 기사들의 표정이 굳어지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에이스가 내게 말했다.
"아렌달 공작님. 조금 서둘러도 괜찮겠습니까?"
나 역시 불필요한 가십거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 입구에서부터 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왕국기사단의 호위 때문에 쉽게 다가오지는 못했지만, 나와 인연이 있던 귀족들은 내게 눈인사를 건네며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고, 인연이 없던 귀족들은 작은 인연이라도 만들어 볼 요량으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대전으로 가는 건가?"
"그렇습니다. 국왕 폐하께서도 곧 오실 겁니다."
파벌대로 나뉘어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들이 나의 등장과 함께 목소리를 낮췄다.
왕궁 입구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일부 귀족들을 제외하고는 목소리도 내지 않고 내 눈치만 볼뿐이었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데?'
그리고 중앙의 귀족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 치고는 적의를 드러내는 귀족들도 적었다.
극소수의 귀족들만 불편하게 나를 바라볼 뿐, 대부분은 호의와 중립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나쁘지 않은 분위기에서 기다리던 보리스 국왕이 대전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국왕 폐하."
"아렌달 영지에서 보내주는 특산물과 마법 아이템들 덕분에 왕도가 윤택해지고, 외세의 침략도 아렌달 영지군이 가진 마법 무기의 힘 덕분에 걱정이 없으니 잘 지내야지요."
치하의 목적으로 하는 말이 아님은 당연했다.
과거와 달라진 보리스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력한 힘으로나마 왕국과 국왕 폐하의 안위에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미력한 힘… 아렌달이 가진 힘이 미력한 힘이라면 왕국이나 다른 영지들은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판단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 않겠습니까?"
"공작에게는 그 힘도 미력하다는 말인가…"
보리스의 중얼거림에 귀족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렌달은 얼마나 더 힘을 기를 생각인 거지?"
"지금 가지고 있는 마법 무기만 해도 엄청난데, 여기서 더 발전을 시킬 생각인가."
귀족들의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발전을 멈추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런 내 모습에 보리스가 말했다.
"공작에게 마법 무기를 보내 달라 했는데, 마법 무기는 가지고 왔습니까?"
"아니요.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왕명을 거역하는 겁니까?"
"이미 왕국에도 마탑의 마법사들을 동원해 마법 무기를 개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렌달의 마법 무기가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왕국의 마법 무기가 있다고 아렌달의 마법 무기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요!
이미 아스타나 왕국에서도 마법 무기를 개발해 실전에 배치했다는 것은 그들을 상대한 아렌달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요?
그리고 나는 분명 왕국을 수호하기 위해 마법 무기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분명 나에게 도착한 왕명에는 그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마냥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었다.
"왕국의 마법 무기는 아렌달을 제외한 그 어디의 마법 무기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왕국을 수호하기에는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내 말에 보리스는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
"왕국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마법 무기가 필요하다고…"
"누구로부터 왕국을 수호하기 위한 무기입니까!"
"!"
내 말에 대전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조금 전까지 작게 중얼거리던 귀족들마저 입을 다물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대전을 감돌았다.
"국왕 폐하께서 왕국을 수호하겠다는 대상이 정말 외세뿐입니까?"
"허업!"
"아, 아렌달 공작님! 그 말씀은…"
당황하는 귀족들의 목소리만큼 보리스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보리스를 보며 말했다.
"왕좌가 아닌 왕국을 위함이라면 마법 무기를 드리겠습니다."
"왕좌가 아닌 왕국…"
"확실한 답을 내려주신다면 저 역시 답을 드리겠습니다."
3일간 침묵하던 보리스가 나에게 왕궁으로 들어오라는 메세지를 보냈다.
3일이나 고민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자기 나름의 답을 내린 것 같았다.
왕궁으로 가자 에이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왕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은 대전이 아니군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에이스에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왕궁 가장 안쪽까지 들어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깊은 장소에 나도 조금씩 긴장되기 시작했다.
'설마 최악의 답을 내린 것은 아니겠지?'
왕궁의 가장 안쪽. 백색의 작은 건물 앞으로 나를 안내한 에이스는 걸음을 멈추고 볼튼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볼튼경도 못 들어갑니다."
"?"
"영주님의 호위는…"
"이 안에는 국왕 폐하 한 분 만 계시니까 호위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에이스의 말에 둘러보니 보리스의 근위기사단과 왕국기사단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어딘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왕의 요람입니다."
"아-"
왜 아무도 못 들어간다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베르겐의 왕족 말고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왕실의 무덤이었다.
"영주님.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볼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왕의 요람으로 들어갔다.
고요한 요람의 안쪽에는 에이스의 말대로 보리스가 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렌달 공작."
"오래 기다리셨나 보군요."
내 말에 보리스는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 무덤이 아버지의 무덤입니다.
아버지께서 조금만 더 오래 살아계셨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랬다면 저도 이렇게 어린 나이에 왕이 되지 않았겠죠.
어쩌면 젊은 귀족들처럼 뉴렌달에 유학가서 공부를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전혀 생각지도 않은 말이었다.
"제가 뉴렌달로 유학 간다는 말이 이상합니까?"
"조금."
"그런가요? 왕궁의 젊은 대신들과 이야기를 자주 나누곤 합니다.
아무래도 노귀족들보다는 또래들이기에 말도 잘 통하고, 새로운 정책이나 기술을 도입하기에도 젊은 대신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주기에 왕국 운영에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중에는 뉴렌달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대신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뉴렌달이라는 도시가 얼마나 발전된 도시인지 직접 보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보리스에 나는 가만히 들어주었다.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가 어떤 것인지. 그동안 왕으로서 자신이 어떤 일을 해왔는지, 앞으로 어떤 일들을 해보고 싶은지를 한동안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 보리스가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렌달 공작. 나는 공작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공작처럼 베르겐을 위해 많은 것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공작처럼 되기에는 너무 어렵더군요."
"……"
"나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작이 이룬 것에 비하면, 내가 이룬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공작을 질투하게 된 것 같습니다."
"질투입니까?"
"네. 질투였습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인정하는 보리스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왕으로서 더 잘하겠다는 마음.
그런 마음이라면 국왕 폐하는 더 좋은 왕이 되시겠군요."
내 말에 보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좋은 왕은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
"베르겐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봤습니다.
왕좌가 아니라 왕국을 위해서 말입니다."
"……"
"아렌달 공작. 베르겐의 왕이 되어 주세요."
보리스의 말에 나는 침묵했다.
"아렌달 공작은 베르겐의 왕족이니 내가 선위를 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왕국의 귀족들이나 백성들도 아렌달 공작께서 베르겐을 이끌어주기를 바라고 있을 겁니다."
"……"
"아렌달 영지를 이끈 것처럼 베르겐 왕국을 이끌어주세요.
공작의 능력을 다 발휘하기 위해서는 아렌달 영지는 너무 작지 않습니까?
일개 영주가 아닌 왕으로서 그 능력을 사용해주세요.
공작이라면 그 어떤 왕국보다 베르겐 왕국을 위대한 왕국으로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왕이 아닌 신하로서 공작의 힘이 되겠습니다."
보리스의 목소리는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그 결단에 한 점 거짓도 없다는 듯 당당한 목소리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내 웃음에 보리스도 활짝 웃었다.
"그럼 베르겐 왕국을 잘 부탁합…"
"저는 왕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