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베일리 영지에 도착한 영지군은 바로 베일리 성에 배치되었다.
"이렇게 빨리 지원을 와주다니. 아스타나 왕국에서도 이렇게 빨리 지원군이 올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네."
"다 베일리 영지까지 깔려 있는 고속도로 때문 아니겠습니까?
베일리 백작님께서 뉴렌달까지 직접 오셔서 도로를 건설할 수 있도록 제안하신 덕분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지원군이 도착할 줄은 나 역시 기대하지 못했던 부분이네."
베일리 성에 주차한 수송차를 보며 베일리 백작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지난번 아렌달 공작이 영지에 방문했을 때도 봤지만 정말 대단한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말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속도에 휴식 없이 달릴 수 있으며, 마차나 수레보다 안정성도 뛰어난 이동 수단이라니…
도대체 이런 물건들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 거지?'
생각할수록 놀라운 아렌달의 기술이었다.
"베일리 백작님. 적이 진격하는 루트를 알 수 있을까요?
저희가 가지고 온 마법 무기 중 설치형 마법 무기가 있어서 미리 적들의 진로에 설치하고 싶습니다."
"알겠네. 나를 따라오게."
베일리 백작의 안내에 헤돈이 영지군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성벽 위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일부 병사들은 적들의 진로에 지뢰를 설치해라."
아렌달 병사들이 설치형 마법 무기들을 가지고 움직이는 모습에 베일리의 병사들은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직전의 전투에서 마법 무기의 위력을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베일리가 가지고 있는 무기와 다른 형태의 무기들을 보며 궁금증이 생겼는지, 지크가 기관총을 설치하고 있는 카잔에게 다가와 말했다.
"카잔 대대장. 그 기관총이라는 건 지난번에 우리가 받은 소총이랑 다른 건가?"
"기관총은 연발 능력을 극한으로 올린 무기입니다."
"우리가 받은 A2 소총도 연발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중에 직접 보시면 알겠지만, 화력이 달라요. 이건 100발까지 연사가 가능한 무기니까요."
"한 번에 100발이나 쏜다는 말인가?"
깜짝 놀라는 지크에 카잔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 아스타나 따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베일리 성에 다가올 수도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카잔의 장담은 바로 다음 전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스타나의 병사들이 갈려 나가는 모습에 베일리 백작과 지크는 어이없는 한숨을 쉬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아스타나 왕국은 더 이상의 전투를 포기한 채 국경 밖으로 후퇴한 것이다.
"하- 정말 기사의 시대는 끝이 났구나."
"이게 아렌달의 전투력인가? 이렇게 빨리 전투가 끝나다니…"
"저희 영주님께서 앞으로의 전쟁은 속도전이라고 하시더군요.
가진 화력을 쏟아부어서라도 최대한 빨리 전투를 끝내는 게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렌달이기에 생각할 수 있는 전투방식이로군."
헤돈은 아스타나의 군대가 국경 밖으로 완전히 물러난 것을 확인하고 베일리 백작에게 말했다.
"베일리 백작님. 추격은 하지 않겠습니다."
"음- 이제 아렌달로 돌아갈 생각인가?"
"아닙니다. 아스타나 왕국에서 더 이상 도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베일리를 지키라는 영주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베일리에서 신세를 져도 괜찮겠습니까?"
헤돈의 말에 베일리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렌달 공작님은 마무리까지 확실한 분이시군."
* * *
지방 영지의 병사들이 소집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스타나 군이 물러났다는 소식에 왕도는 다시 시끄러워졌다.
"아스타나가 그냥 물러났다는 게 확실한 정보인가?"
"그렇습니다. 베일리 영지에서 소식이 전해진 정보입니다.
아스타나 군은 베일리에서의 전투로 4천의 병력을 잃고 후퇴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못 들었는데 4천의 병력을 잃고 후퇴했다고?
그럼 베일리 영지의 피해는 얼마나 되지?"
"아스타나 군이 진격하면서 망가트린 농지 일부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합니다.
초기의 전투에서 죽거나 다친 병사들을 제외하면 병력의 손실도 없다고 합니다."
"4천의 적을 죽였는데 병력의 손실이 없다니…"
적국의 침입을 막았으니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 속사정을 알고 있는 만큼 마냥 기뻐하기에도 어색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베르겐 왕국이 아스타나 왕국을 상대로 승리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귀족들은 보리스에게 승리를 축하했다.
"국왕 폐하. 아스타나 왕국의 도발을 막아낸 것은 모두 국왕 폐하의 은덕입니다."
"그렇습니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국왕 폐하."
그런 귀족들의 목소리에 보리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내가 무엇을 했다고 축하한단 말인가?
전부 아렌달 공작이 한 일 아닌가.'
귀족들의 목소리가 전부 자신을 조롱하는 목소리로 들렸다.
"오늘은 이만 끝내도록 하지."
힘없이 대전을 떠나는 보리스의 뒷모습에 귀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무실로 돌아온 보리스는 자신을 따라온 에이스에게 말했다.
"아렌달 공작 부인이 스톨 가문의 사람이었지?"
"그렇습니다. 국왕 폐하."
"그럼 백작도 아렌달 공작을 잘 알겠군.
나와 아렌달 공작을 비교하면 누가 더 나은가?"
"……"
"나도 알고 있네.
당연하지. 아렌달 공작이 지금까지 이루어온 것들을 생각하면 그 누구도 아렌달 공작과 비교될 수 없겠지."
"국왕 폐하께서도 훌륭한 왕이십니다."
에이스의 위로에도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베르겐을 위해 가장 나은 방법일까?
백작의 말대로 훌륭한 왕이 되기 위해 나는 어떤 답을 내려야 하는 걸까?"
"지금처럼만 하셔도 충분히 훌륭한 왕이십니다.
지금의 베르겐은 누구보다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과거보다 커진 영토와 해상으로의 진출뿐 아니라 다른 왕국과 비교할 수 없는 기술과 마법 아이템들, 그리고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베르겐은 발전했습니다."
"그렇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아렌달 공작이 만들어 준 것이지."
"아렌달 역시 베르겐의 신하입니다."
에이스의 말에 보리스는 피식 웃었다.
"내가 부탁하면 아렌달 공작이라도 죽여줄 텐가?"
"……"
"대답을 못 하는군."
"국왕 폐하께서는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왕국기사단의 부단장 때부터 10년 넘게 폐하의 곁을 지켜왔습니다.
저는 폐하께서 그런 부탁을 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하- 그렇지. 나는 그런 부탁을 하지 않겠지.
백작, 아니- 에이스경. 나는 두렵습니다."
"……"
"그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았을 텐데… 아니, 오히려 내가 더 나았을 환경인데… 아렌달 공작처럼 해내지 못하는 내가 너무 비참합니다.
나도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아렌달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아렌달 공작과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초라해지는 내 모습이 너무 싫습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쏟아내는 보리스를 에이스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보리스가 자신의 감정에 먹혀 섣부른 짓을 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 * *
베일리에서 전해진 승전보에 나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베일리 백작의 부탁을 성공적으로 들어주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제법 성취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아스타나 왕국에서 다시 도발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기 전까지 헤돈은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동안 영지군은 발트 대대장이 이끌면 되니까 딱히 걱정거리는 없는 거지?"
"어부들을 건드리고 있는 해적들만 처리하면 안보는 문제없습니다."
"해적들은 조금이라도 선을 넘으면 바로 가라앉혀 버려.
아니면 아론 선장이 돌아오면 동력선을 끌고 가서 다 침몰시켜 버리면 되겠지."
며칠 지나지 않아 베일리에서 다시 한번 통신이 왔다.
"아스타나 왕국에서 나를 찾는다고?"
-그렇습니다. 영주님.
"아스타나 왕국이 나랑 이야기할 게 뭐가 있다고 나를 찾아?
이야기하고 싶으면 내가 아니라 국왕을 찾아야지."
왕국 간의 분쟁이 일어났는데 왕도가 아닌 나에게 연락하는 것부터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중앙 정치의 권력자였다면 그래도 이해하겠는데, 나는 베르겐 중앙 정치에는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전투가 일어난 곳도 아렌달이 아니라 베일리잖아.'
거리상으로 아스타나 왕국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아렌달을 불러낼 이유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아스타나 왕국에서 뭔가 수를 쓰고 있는 것 아닐까요?"
"국왕과 나를 이간질하려고 한다는 건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왕도에 국왕 폐하께서 계신 데 영주님께 이야기를 나누자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국왕 폐하를 무시하고 영주님을 띄워주어 왕도와 아렌달을 이간질하려는 계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다고 국왕과 내 사이가 틀어지겠어?
국왕이 나에게 보내는 신뢰는 확실하잖아?
그리고 내가 베르겐의 왕족이라는 걸 아스타나 왕국에서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영주님. 어떻게 할까요?
"베일리 백작은 뭐래?"
-베일리 백작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 자체가 계책이라고 했습니다.
아스타나 왕국에서 역공을 당할까 봐 시간을 끌기 위한 수인 것 같습니다.
"하긴. 아스타나에서는 우리가 반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모르니."
말 몇 마디로 시간도 끌고, 왕국도 흔드는 계책을 낸 것이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머리 잘 썼네.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내가 아니라 국왕과 이야기를 나누라고 해.
그리고 중앙에서 협상을 잘할 수 있도록 아스타나 왕궁에 위협 정도는 해 주고."
-알겠습니다.
내가 아닌 국왕과 이야기를 하라는 메세지를 보냈음에도 아스타나 왕국에서는 다시 한번 왕도가 아닌 나를 찾았다.
"뭐 하자는 거지?"
-아스타나 국왕이 왕국과 별도로 아렌달 영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전했습니다.
"나랑?"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마법 무기의 위력를 직접 경험한 게 큰 것 같습니다.
"아렌달의 마법 무기를 원하는 건가?"
-소드마스터인 루드니 백작이 베일리 성으로 온 것을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소드마스터를 홀로 적진에 보낸 것을 보면 아스타나 왕국에서도 안달이 나기는 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소드마스터까지 보내다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버릴 필요는 없지. 나는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돌아가라고 해.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국왕과 협상을 마친 이후라는 것도 확실하게 말해줘."
-알겠습니다.
왕도에서 온 메세지에 한숨을 나왔다.
왕도에서도 나에게 마법 무기를 보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아스타나 왕국의 계책이 성공한 건가?"
"영주님. 어떻게 합니까?"
"일단, 국왕과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선왕에게 보내주었던 마법 무기는 연구한다고 다 뜯어 버린 것도 알고 있었기에 더욱 왕도의 요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왕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마법 무기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아렌달의 것을 제외하면, 왕국에서 개발한 마법 무기가 성능은 제일 뛰어날 텐데…"
나에 대한 국왕의 신뢰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왠지 기분이 찝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