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한동안 숨죽이고 있던 나르비크 왕국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뉴렌달이 한창 축구 대회와 문학 공모전으로 축제의 분위기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얼마 전부터 해상에 모습을 보이던 게 나르비크의 함선들이라는 거지?"
"네. 해적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나르비크의 함선이 틀림없다고 합니다."
"국경 쪽에서는 무슨 움직임이 없나?"
"영지군의 보고로는 가끔 척후병들이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국경을 넘어서 들어오는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알겠어. 한창 축제를 즐기는 영지민들에게는 알리지 말고, 영지군만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해."
"네."
"아쉽지만 영지군은 기권으로 처리하고 혹시 모를 도발에 대비한다."
지난번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도발했다가 한 방 먹은 나르비크였지만, 이번에는 뉴렌달의 정보를 얻는 데 성공했는지 나름대로 좋은 타이밍을 노린 것 같았다.
"그런다고 아렌달이 움츠릴 필요는 없지."
나르비크가 도발한다고 해도 영지민들의 일상은 여느 때와 같이 유지할 생각이었다. 굳이 영지민들에게 불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영지에 혼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육지든 해상이든 나르비크에서 선을 넘는 순간 각오해야 할 거야.
분명 나는 경고를 했으니까 말이야."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섣부른 도발은 못 할 겁니다.
이미 500명의 병사에게 당한 경험이 있으니까요. 그때와는 병력의 숫자도 다른데 멍청하게 먼저 도발하지는 않겠죠."
"그래도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만약의 사태에 바로 대응할 수 있게 준비는 해 놓자고."
다행히 영지의 이벤트는 성황리에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해상에서 해적들이 어부들을 위협하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딱히 눈에 띄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나르비크였기에 도시는 평범한 일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아렌달 영지 밖의 사정은 조금 달랐는지 심상치 않은 정보가 나에게 들어왔다.
"나르비크가 국경을 강화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나르비크 왕국이 아니라 아스타나 왕국이 다른 왕국들을 긁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그중에는 베르겐 왕국도 있었기에 왕도에서도 긴장한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영주들에게 군대의 소집을 명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든 군대를 소집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스타나 왕국이 뭘 믿고 저렇게 대놓고 움직이는 걸까?
소드마스터의 숫자나 기사단의 전력이 앞서고 있는 건 알고 있지만, 저렇게 대놓고 움직이는 건 이상한데."
아직 다른 왕국을 압도할 정도의 전력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나로서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냥 안달이 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안달이 나?"
"그렇습니다. 영주님.
지금 생각해보면 동대륙의 평화가 너무 길었습니다."
헤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헤돈경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볼튼은 이해가 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영주님. 지금 동대륙은 20년 가까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왕국 간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확실히 나르비크의 내전이나 나와 덴프린스의 사소한 전투를 제외하고는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왕국들이 힘을 키울 수 있었고, 이제는 그 힘을 밖으로 분출하고 싶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평화가 길어져서 전쟁이 일어난다니.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였지만, 막상 지구의 역사에서도 전쟁이 없던 기간을 찾기가 더 어렵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스타나 왕국도 베르겐처럼 미개척지와 붙어있지 않았나?
전쟁을 일으킬 여력이 있으면 바깥의 땅이나 개척할 것이지 왜 가만히 있는 다른 왕국을 긁고 있는 거야."
"영주님.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것보다 남의 땅을 빼앗는 게 더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특히 귀족 중에는 힘이 있음에도 그것을 과시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죠."
"그렇게 생각하는 영주님이 특별한 것입니다.
다른 권력자들이 영주님과 같을 거라는 생각을 하시면 오산입니다."
두 기사의 말이 어이가 없었지만, 속으로는 나도 납득하고 있었다.
그 순간 베일리로부터 핫라인 통신이 들어왔다.
그리고 아스타나 왕국이 왜 대놓고 다른 왕국들을 긁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렌달 공작님. 아스타나 왕국에서 마법 무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아렌달의 마법 무기와 비교하면 조잡하기 그지없는 허접한 무기였지만, 아렌달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마법 무기가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미 베르겐 왕국에서도 마법 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랍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저런 조잡한 무기를 바로 실전에 배치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베일리에서 작은 전투에서 얻은 정보대로라면 성능은 왕궁에 주었던 A2 소총의 다운그레이드 버전보다 못한 것 같습니다.
다만 대량 생산은 가능한지 마법 무기를 무장한 숫자가 제법 되는 것 같다는 정보입니다."
"근데 마법 무기를 만든 것을 보면 이쪽이 가지고 있는 마법 무기의 정보도 있을 텐데, 왜 다른 왕국이 아니라 베르겐을 공격한 거지?"
"그게··· 아무래도 아렌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렌달? 나 때문이라고?"
"영지에서 만드는 상품들, 뉴렌달 브랜드를 아스타나 왕국의 왕도에서도 볼 수 있다고 상인들이 말했습니다. 마법 무기와 뉴렌달 브랜드의 상품들. 아렌달 영지가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겠죠.
그래서 아렌달과 베르겐 왕국이 더 발전하기 전에 찍어 눌러서 동대륙 최강 국가라는 이름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 겨우 그런 이유로 전쟁을 일으킨다니···"
"왕국으로서는 중요한 이유 아닙니까?"
그 말대로 국가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게 중요한 사항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리고 국가 간의 우열을 가리는데 군사력만큼 확실한 지표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 때문에 촉발된 것이라면 어쩔 수 없지.
베일리 백작의 요청대로 영지군을 파견한다.
아스타나에서 각오하고 도발한 것이라면 소드마스터도 여러 명 모습을 보이겠지?"
"4명 중 2명은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볼튼도 같이 보내야 하나?"
"영지군의 화력이면 소드마스터 한 명 정도는 커버할 수 있을 겁니다.
위험한 상황이 오면 바로 지원 요청을 하겠습니다."
헤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베일리까지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악의 상황에서는 마탑에 폭격 요청도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 * *
아스타나 왕국의 도발에 왕도의 귀족들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아스타나 왕국에서 마법 무기를 만들어 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번 기회에 우리 왕국에서 개발한 마법 무기도 실전 배치하여 위력을 확인해야 합니다."
"아렌달에서 왕궁에 보내준 마법 무기보다 못한 무기를 실전배치 하라니요?
자칫하다가는 망신만 당하고 말 겁니다."
"아스타나 왕국의 마법 무기도 아렌달의 것과 비교하면 허접하기 그지없는 무기라고 합니다. 그럼 된 것 아닙니까!"
"그럴 바에는 아렌달 공작님께 새로운 마법 무기를 보내 달라고 부탁해서 병사들을 무장시키는 게 왕국의 체면을 살리기에 좋을 겁니다."
"아무리 아렌달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렇지, 왕국의 것이 있는데 아렌달에게 부탁을 하라니요!"
그런 목소리를 들으며 보리스는 생각했다.
'왕국보다 아렌달 영지의 기술이 훨씬 뛰어난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구나.'
그동안 왕국에서 마법 무기와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이 투자했는지 생각해보면 허탈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마탑의 마법사를 모두 투입해서 연구했는데도 아렌달의 기술을 모방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보리스는 황당함 마저 느끼고 있었다.
"아렌달 역시 베르겐의 신하입니다.
국왕 폐하께서 아렌달 공작에게 마법 무기를 요청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렌달에서 왕국을 생각했다면 진작에 왕국군을 무장할 마법 무기를 보냈을 겁니다."
"그거야 왕국에서 독자적인 마법 무기를 갖겠다고 요청하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닙니까?"
"왕국에서 마법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것을 아렌달 공작이 몰랐을까요?
알면서도 마법 무기의 개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아렌달 공작입니다."
귀족들의 목소리에 보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만. 왕국군은 왕국에서 개발한 마법 무기로 무장을 하고 베일리로 갈 것이다.
고성능의 마법 무기가 필요하다면 내가 직접 아렌달 공작과 이야기를 할 테니, 마법 무기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게 하라."
"알겠습니다. 국왕 폐하."
"그보다 왕국군의 소집은 얼마나 되었지?
지방 영주들에게 보낸 병력의 소집은 잘 진행되고 있나?"
"영주들에게 서둘러 병력을 소집하라 일렀지만, 영주들의 병력이 왕도로 모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아무래도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영지들 같은 경우는 이제 막 소식을 들었을 테니, 서두른다고 해도 수일에서 수 십일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음- 그때까지 베일리가 버틸 수 있을까?"
"아직 베일리 영지에서는 왕국군의 지원을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베일리는 왕국의 수호자가 아닙니까? 설령 아스타나 왕국에서 먼저 움직인다고 해도 베일리 백작은 영지를 지키며 왕국군을 기다릴 것입니다."
귀족들의 목소리에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국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있다. 외세의 침략에 왕국이 해야 할 일을 말이지.'
지난번 나르비크 왕국의 도발 때와는 다르게 아스타나 왕국의 도발은 확실하게 대응할 생각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발전시킨 베르겐 왕국의 힘을 당당하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때, 대전으로 왕국 기사단의 기사 한 명이 대전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기사 단장인 에이스에게 정보를 건네주고 돌아갔다.
기사가 전해준 정보에 에이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에 에이스는 앞으로 나섰다.
"왕국기사단장. 방금 기사에게 전달받은 게 무엇이오?"
"아스타나 왕국의 새로운 정보를 얻은 것이오?"
귀족들의 목소리에 에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스타나 왕국의 정보가 아니면··· 그럼 무엇인가?"
"아스타나가 아닌 아렌달의 정보입니다."
"아렌달?"
"예. 아렌달 영지군이 베일리 영지로 이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
에이스의 말에 일부 귀족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들이었다.
그건 보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보리스는 귀족들에게 말했다.
"아직 베일리 영지에서 지원을 요청하지도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잘 못 알고 있는 것인가?"
"아, 아닙니다. 베일리 백작은 아스타나 왕국의 움직임만 보고했을 뿐, 왕국군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렌달 영지군이 베일리를 향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어온 거지?"
"······"
보리스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차마 국왕 앞에서 왕국이 아닌 아렌달에 지원 요청을 했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순간 보리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아-"
그리고 한숨과 함께 왕좌에 기대 누웠다.
"왕국보다 아렌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보리스의 말에 귀족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