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아렌달 영지에서부터 뻗어 나가는 두 개의 고속도로가 완성되자 아렌달에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었다.
그동안 이주민들은 대부분 왕도와 왕도 인근에서 들어온 이들이었다면, 이번 인구의 유입은 지방 영지에서 살고 있던 자유민들이었다.
영지민의 유출은 영지의 노동력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일부 영주들은 나에게 섭섭함과 함께 불만을 드러냈지만, 아렌달의 영향력과 혜택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자유민의 이동을 강제적으로 막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영지를 봉쇄한 귀족들이 있다는 말이지."
"중앙과 깊은 연을 맺고 있는 영주들이 대부분입니다."
"뭐- 중앙의 귀족들이 나를 싫어한다는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왕도에서는 꾸준하게 우리 상품을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상관없겠지."
새로운 흐름에 저항하는 일부 영주들이 있었지만, 대세는 이미 새로운 흐름을 타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국왕이 나서서 저항을 했다면 모를까, 일부 영주들이 나서서 목소리를 높여봐야 어쩔수 없는 것이다.
지방의 가장 큰 세력들은 이미 흐름에 올라탔으니까.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뭘?"
"베일리에 방문하시는 것 말입니다."
리오의 걱정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진작부터 도로가 완성되면 한 번 달려보기로 했잖아.
그리고 친위대와 영지군, 마법사들까지 함께 이동하는데 나 하나 정도는 지켜주겠지."
"그래도 베일리는 국경이라 걱정이 됩니다."
"우리 아렌달도 이제는 나르비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잖아?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특별한 일이야 있겠어?
왕국의 소드마스터 두 명이 나를 지켜줄 텐데.
그리고 베일리 백작에게 받은 부탁도 있으니까."
내가 베일리로 가게 되면 베르겐의 단 두 명뿐인 소드마스터가 베일리에 모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베일리 영지가 베르겐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될 수도 있었다.
"내 신경은 쓰지 않아도 되니까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뉴렌달을 부탁한다.
나 없다고 농땡이 치지는 말라고."
"농땡이라니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아시는 분이?
저야말로 가장 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냥 집에 돌아가기 싫어서 그런 거잖아?"
베일리로 가는 여정을 함께하기로 한 전 스톨 백작이 아렌달 성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직접 운전을 하시는 거예요?"
"그야 물론이지. 왕국을 관통하며 달릴 기회지 않느냐?"
"오랜 시간 마차를 타는 것도 싫어하셨잖아요?"
"마차와 자동차는 타는 맛이 다르단다. 타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마차와는 다르지.
그리고 나보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도 없단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직접 운전하는 게 가장 안전할 거다. 허허허-"
"그, 그러세요?"
샤를로트의 물음에 스톨 백작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톨 백작이 나에게 자동차를 구매한 후 가끔씩 아렌달을 찾아와 도로를 달리고 돌아갔다는 보고는 계속해서 들어왔다.
"자동차를 운전하다 보면 내가 마법사라도 된 것 같아 더 기분이 좋지."
"그래도 베일리 영지까지 운전하시기에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음- 얼마 전에 체스터 영지에 갔다 온 적이 있으니 문제없네."
"체스터를 갔다 오셨습니까?"
"도로가 완성되었다는 이야기에 바로 달려봤지.
예전이었다면 며칠은 걸렸을 거리인데 자동차를 타고 가니 이틀 만에 갈 수 있더군. 허허허-"
'체스터 후작이 자동차에 대해서 물어봤던 게 그것 때문이었구나.'
바로 어제 체스터 남작을 통해 자동차에 관심을 보였던 체스터 후작이었다. 그 배경에 스톨 백작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광고판이 되어 주기를 바랐었는데, 벌써 내 기대를 충족시켜주고 있을 줄은 몰랐다.
"베일리 영지까지는 그렇게 빨리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도 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너무 느리게 달리면 나 혼자서라도 먼저 갈 거라네."
스톨 백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동차에 올라탔다. 호위 기사들을 뒤에 태우고 당장에라도 출발하려는 스톨 백작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참으며 차에 올라탔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는 마차와는 다른 속도감을 보여주었다.
지구의 고속도로나 자동차와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래도 이세계에서는 남다른 속도감이었다.
그렇게 뉴렌달을 떠난 지 겨우 3일 만에 베일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동하는 인원도 많았고, 샤를로트와 아이들도 있어 속도를 내지 못했음에도 겨우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거 맘먹고 달리면 하루 만에도 도착하겠는걸?'
베일리의 높은 성벽을 지나 성안으로 들어오자 베일리 백작과 가문의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줄지어 들어오는 자동차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에 나는 내 전용 의전차인 '아렌달 원'에서 내리며 베일리 백작의 인사를 받았다.
"아렌달 공작님. 베일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일리 백작."
베일리 백작의 인사를 받은 나는 성안을 둘러보며 뉴렌달과 다른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언제 외적이 침입할지 모르는 국경 영지답게 베일리의 영지민들은 긴장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보이는 병사들 역시 언제라도 전장에 있는 것 같이 날카로운 분위기를 뿜어냈다.
'확실히 뉴렌달과는 분위기가 다르구나.'
베일리 영지에 머무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베일리 영지에 필요한 시설들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베일리 영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전문 병원입니다."
"전문 병원이요?"
"베일리는 언제 전투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국경 영지지 않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아스타나 왕국의 병력과 사소한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렇게 사소한 시비가 붙을 때마다 부상을 당하는 병력을 전문적으로 치료할 병원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병사들의 부상은 영지의 여유가 되는 한 늦지 않게 치료하고 있습니다."
"아니요. 영지의 여유가 되지 않더라도 병력을 치료할 의사들이 항상 대기해야 합니다."
"……"
"베일리는 왕국을 지키는 영지 아닙니까?
그러니 사소한 전투로 일어나는 병력의 이탈도 최소화해야 하는 곳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봐야겠군요."
"생각만으로 그치지 말고 꼭 병원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필요하다면 우리 아렌달 영지의 병원 시스템을 가르쳐 드릴 수도 있습니다."
베일리를 떠나기 전 영지군이 가지고 온 마법 무기와 통신 마나석을 넘겨주자 베일리 백작은 내게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동안 해주신 조언에 이런 선물까지 주시는 겁니까?"
"정말 급한 상황에 통신을 보내시면 영지군을 보내겠습니다.
그럼 베일리 백작의 부탁은 이걸로 되는 것이겠지요?"
"감사합니다."
베일리 백작은 왕국보다 나를 더 믿는다며 영지까지 비우면서 찾아온 사람이었다.
나는 그 신뢰에 대한 자그마한 보답을 했을 뿐이다.
"저 역시 베르겐의 왕족으로서 왕국의 수호자를 마땅히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르겐의 왕족… 그렇군요."
"앞으로도 아렌달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부탁하셔도 좋습니다.
가능하다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리죠."
베일리 영지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내게 스톨 백작이 말했다.
"베일리는 베르겐 왕국에서 아주 중요한 영지라네.
그런 베일리를 아렌달 공작은 어떻게 하고 싶은 건가?"
"글쎄요. 지금 이대로 베르겐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맡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음- 그런가? 아직은 베르겐이라는 이름 아래 있을 생각인가 보군."
"……"
"하긴,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게 말한 스톨 백작은 웃으며 말했다.
"아렌달 공작. 내 이야기를 들어보게나.
내가 아주 재미있는 걸 생각했는데."
"?"
"바로 자동차로 경주를 하는 거야.
이 멋진 도로를 달려보고 나니 이 도로에서 경주를 해보는 건 어떨까 생각이 들었네.
아렌달에서 베일리까지, 아니면 아렌달에서 체스터까지도 좋지."
"그런데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 없지 않습니까?"
"분명 자동차를 사는 사람이 늘어날 거네."
"대신 팔아주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물론이네. 이렇게 좋은 건 다 같이 즐겨야 하지 않겠나. 허허허-"
조금 전의 이야기는 잊어버리고, 자동차 랠리를 이야기하는 스톨 백작을 보며 생각했다.
'가능하면 이대로 있고 싶지만, 조금씩은 생각을 해보는 게 좋겠지.'
새로운 흐름을 거부할 마음은 없었다.
뉴렌달에 돌아온 내게 리오가 서류 뭉치를 보여주었다.
"이게 뭐지?"
"행정관 하나가 만들어온 계획서입니다."
"뉴렌달 신도시 계획?"
"네. 지금 뉴렌달에 밀집되어있는 영지민들을 새로운 도시로 이주를 시키자는 계획서입니다."
"도시계획을 만들어 왔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지금 아렌달 영지는 문제없이 잘 굴러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도시계획을 짜오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 계획서 누가 만든 거야?
"어반이라는 녀석입니다."
"어반?"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아- 생각났다. 나한테 뉴렌달의 도시 구조를 물어봤던 학생이다."
"알고 계십니까?"
"지난번 특강에서 나에게 뉴렌달을 어떻게 설계했는지 물어봤는 학생이 있었지. 그 학생의 이름이 어반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 맞을 겁니다. 얼마 전 학교를 졸업하고 영주관에 들어온 녀석이니까요."
그 말에 나는 도시계획서를 펼쳐서 읽어봤다.
"오- 주거만을 위한 위성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그리고 외부의 관광객을 받아들이기에는 도시의 미관이 아름답지 않아?"
"재미있지 않습니까?"
리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서가 아니라 직접 듣고 싶어졌다. 어반을 불러와.
이 도시계획에 대해 한번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내 부름에 허겁지겁 달려온 어반은 내 책상에 놓인 자신의 도시계획서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내가 왜 자신을 부른 것인지 눈치챈 것이다.
나는 뜸 들이지 않고 어반에게 말했다.
"위성도시가 필요한 이유는?"
"아렌달 영지에는 놀고 있는 땅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더 효율적으로 영지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영지민들을 이주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주해오는 이주민을 뉴렌달이 아닌 새로운 도시로 들어오도록 해야 도시의 기능이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아직 뉴렌달은 이주민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은 있는데?"
"영주님의 말씀도 맞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뉴렌달에서만 이주민을 받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왕도를 생각해보십시오.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 도시의 기능이 떨어지게 되면 도시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들로 인해 어두운 구석-빈민가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아직 뉴렌달에 빈민가가 생기기 전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도시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좋아."
내 대답에 어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렇다면 도시의 미관은 무슨 뜻이지?"
"뉴렌달은 바다를 가진 도시입니다.
바다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생동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