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시장에 마나석이 없는 이유는 다른 영지와 왕국에서도 마법 아이템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냉장고나 자동차같이 높은 기술이 필요한 상품들은 따라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선풍기나 아이스박스 같이 간단한 마법 용품들은 일부 영지에서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직까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마법 무기 역시 개발하고 있는 영지가 있을 것이다.
왕궁에는 내가 보내준 마법 무기도 가지고 있었기에 분명 연구 개발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나르비크와 전투로 인해 이세계에서 정보가 얼마나 느리게 흐르는지 확인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인터넷이라도 있었다면 진작에 전 대륙으로 이야기가 퍼졌겠지.'
왕국이나 영지 나름의 정보를 취득하는 방법이 있다고 해도 정보가 이동하는 속도의 단위가 다른 세계였다.
그렇다면 나는 변화하는 상황에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아직 나에게는 사용하지 못한 현대 지식이 많이 남아있으니까.'
도시 시찰을 돌고 있던 어느 날 샤를로트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서둘러 영주관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내가 도착했을 때는 안정을 찾고 잠들어 있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샤를로트의 상태는 어때?"
"아리스 아가씨가 태어나신 이후에 밖으로 나가시지도 않고 작품을 집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너무 영주관 밖으로 나가지 않으신 탓에 쓰러지신 것 같습니다.
조금씩이라도 밖에 나가서 산책이나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하시면 금방 괜찮아지실 겁니다."
"알았네."
의사의 말에 나는 샤를로트의 시녀들을 불러 그동안 샤를로트의 일과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의사의 말대로 아리스가 태어난 이후로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공작 부인께서 새 작품에 푹 빠지셔서… 죄송합니다. 공작님."
스스로 하려는 자립심이 강한 샤를로트였다.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것보다 신작에 대한 열정이 더 컸을 것이다.
지구에서 작가라는 사람들이 종종 과로로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그런지 샤를로트의 상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몸은 챙겼어야지.'
"으음-"
샤를로트가 슬며시 일어나려는 모습에 나는 샤를로트의 곁으로 가서 말했다.
"샤를로트. 괜찮아?"
"무슨 일이에요?"
"과로로 쓰러졌대."
그제야 자신이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샤를로트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나는 일어나려는 샤를로트를 억지로 다시 눕히며 말했다.
"그냥 누워있어."
"……"
"그리고 나한테 혼날 각오 하는 게 좋을 거야."
"정말 혼낼 거예요?"
"응."
혼을 낸다는 내 말에 샤를로트가 어이가 없었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웃음이 나와?"
"어디 한번 혼내 보세요. 어떻게 혼낼지 나도 궁금하니까."
"그래?"
샤를로트의 미소에 나는 시녀들에게 말했다.
"앞으로 샤를로트의 몸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절대로 펜과 종이를 주변에 두지 말도록."
"!"
"책도 금지야."
"그건 말도 안 돼요!"
"돼! 그리고 나랑 매일 같이 바닷가 산책 한 시간.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는 무조건."
"건강이야 마법사들에게 회복 마법을 받으면…"
"스스로 건강을 찾을 때까지 회복 마법도 금지야."
내 말에 샤를로트가 시녀들에게 눈빛을 보냈지만, 시녀들은 시선을 피했다.
시녀들도 샤를로트가 다시 건강해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나는 입술을 삐쭉거리는 샤를로트에게 말했다.
"빠져나갈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을 겁니다. 공작 부인."
"알았어요.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
"조건? 좋아. 말해봐."
"산책에는 우리 둘만 있을 것. 볼튼경이나 시녀들도 없이 딱 우리 둘만. 괜찮죠?"
소녀 시절의 미소로 말하는 샤를로트에 나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로트와 며칠간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면서 느낀 게 있었다.
생각보다 귀족들이 즐길 수 있는 육체적 활동이 없다는 것이었다.
보통 귀족들이 즐기는 육체적 활동이라면 사냥대회를 꼽을 수 있었는데 아렌달에서는 단 한 번도 사냥대회를 연 적이 없었다.
몬스터의 땅에서 사냥대회를 즐기기에는 너무 위험했을뿐더러 영주인 내가 사냥에 관심이 없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것 같았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내가 사냥에 트라우마가 있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사냥에 나갔다가 절벽에서 구른 경험도 있으니까.'
"그리고 체스터 남작처럼 필드에서 볼을 차는 것도 귀족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지."
일단 귀족들은 체스터 남작 같은 별종이 아니라면 일반 백성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굳이 귀족이라는 신분에 얽매이지 않더라도 연극이나 거친 스포츠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많겠지.
조금은 차분한 활동을 즐기고 싶은 사람도 많을 거야."
여자라고 모두 연극이나 드라마를 즐기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스포츠를 즐기고 싶지만, 축구 같이 거친 스포츠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영지민들에게 생활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면 종목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특히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종목들이 말이야."
"자. 이 공을 쳐서 저기 홀 안에 넣으면 되는 거야."
나는 샤를로트에게 말하며 스틱을 쳐서 홀 안에 공을 집어넣었다.
그런 내 모습에 샤를로트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공을 톡 밀어 넣었다.
"오- 생각보다 훨씬 잘하네."
"그냥 공을 쳐서 홀 안에 넣을 뿐이잖아요? 이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지금 여기는 평평한 바닥이니까 쉽다고 느낄 수도 있지.
하지만 골프라는 건 넓은 필드에서 즐기는 스포츠라고. 바닥이 이렇게 고르지 않은 곳에서는 홀 안에 공을 넣는 게 쉽지는 않을 거야."
"그래 봐야 공을 치고 넣을 뿐인데요."
"자신 있나 본데?"
내 말에 샤를로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도 흥미는 있었는지 계속해서 스틱을 흔드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골프라는 새로운 스포츠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졌다.
아렌달 공작과 공작 부인이 함께 즐기는 스포츠라는 사실에 관심을 안 보일 귀족은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소문을 듣고 스톨 백작이 뉴렌달로 달려올 정도로 베르겐의 귀족들 사이에는 대단한 열풍을 일으켰다.
"허허허- 나 같은 사람도 즐길 수 있는 스포츠라니. 아렌달에서는 정말 흥미로운 게 계속해서 만들어지는군."
"다음에 귀족들을 대상으로 대회를 개최해 볼까 하는데, 괜찮다면 스톨 백작님도 참가해 보시겠습니까?"
"이런 재미있는 이벤트에 내가 빠질 수는 없지!"
스톨 백작의 말에 샤를로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저도 참가해도 되나요?"
"샤를로트 네가 대회에 참가한다는 말이냐?"
"네. 분명 제가 아버지보다 더 잘 할 거예요."
"허허허- 자신 있나 보군."
"당연하죠. 골프는 우리 아렌달 공작님이 저를 위해서 만들어준 스포츠인걸요."
서로에게 자신감을 보이는 두 부녀였다.
골프 대회의 개최 소식에 영지로 이주한 귀족들뿐 아니라 지방 영주들도 대거 참가의 메세지를 보내왔다.
아마 아렌달 공작이 직접 주최하는 귀족들의 친목 대회였으니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나와 사이가 틀어져 있는 중앙에서는 극소수의 귀족들만 참가했지만, 충분히 많은 귀족이 뉴렌달을 찾아왔다.
덕분에 볼튼의 호텔은 개장 후 처음으로 만실을 이루며 돈다발을 쓸어 담았다.
"진작에 카지노도 만들었다면 진짜 돈을 쓸어 담는 거였는데."
"호텔에 카지노를 만드실 생각이셨습니까?"
"당연하지. 고급 호텔에는 원래 카지노 하나씩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도박은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왕국에서도 도박을 금지하는데, 음지에서나 만들어지는 카지노를 호텔에 만들어도 괜찮은 겁니까?"
"오히려 양지로 끌어 올려서 관리하는 게 나을걸?
입장할 수 있는 사람이나 시간을 철저히 관리하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내 말에 리오와 행정관들이 흥미롭다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호텔 주인인 볼튼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영주님의 말씀 중에 틀린 것은 하나도 없겠지요.
영주님께서 원하신다면 호텔에 무엇이든 만드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영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는 다 하늘의 뜻이 있다고…"
"볼튼경! 이만 골프 대회에 가야 할 시간이다."
"앗!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모시겠습니다. 영주님."
샤를로트와 함께 새로 만들어진 골프장에 도착한 나는 대회를 기다리는 귀족들에게 인사했다.
"이렇게 뉴렌달을 찾아주어 감사합니다.
오늘 대회는 아렌달 영지의 이름이 걸려있는 만큼 즐거운 시간이 됐으면 좋겠군요."
내 인사와 함께 시작된 골프 대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축구와 다르게 차분한 스포츠였던 만큼 귀족들도 매우 만족하며 대회를 즐겼다.
그리고 볼을 치고 이동하는 거리만큼 대화의 시간이 길다는 것이 귀족들에게 상당한 메리트가 되었는지 곳곳에서 각종 정보가 교환되는 모습도 보였다.
"기르만 남작님. 이번에 새로운 특산품을 준비한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렌달 공작님께서 직접 제안을 주셨다고 하는데 그 정보를 모르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기르만도 뉴렌달 브랜드의 혜택을 받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저희는 뉴렌달 브랜드가 아니라 협업의 형태로 새로운 특산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협업이라니. 대단하군요.
그럼 다음에는 저희 영지와도 경제적 교류를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이렇게 새로운 상품이나 영지 간의 경제적인 교류를 약속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뤘지만, 그 밖에 다양한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했다.
"나르비크에서는 한 방 먹은 이후로 숨을 죽인 모습입니다."
"들어보니 아스타나 왕국도 마법사들의 유출이나 마나석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우리 베르겐의 이야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이번에 왕국에서도 궁정 마법사를 대대적으로 늘린다고 합니다. 가뜩이나 마탑이 문을 닫아서 마법사 영입이 힘들었는데, 이러다가 우리 영지의 마법 아이템 개발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입니다."
"그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벨파스트 후작이 중앙 정치계에 복귀를 노리고 있다고 하던데…"
"아렌달 공작께서 계시는데 벨파스트 후작이 어떻게 정치계에 복귀를 한다고요?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 아닙니까?"
나르비크나 아스타나 왕국 등 외국의 이야기나 어느 영지에서 마법사들을 영입했다는 이야기, 중앙의 정치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이야기 등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종종 이런 귀족들만의 모임을 가지는 것도 좋은 것 같네.'
아렌달 골프 대회는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스톨 백작님."
"내가 몸을 쓰는 대회에서 우승하다니, 이게 다 아렌달 공작이 만들어준 특제 골프 클럽 덕분입니다."
그리고 우승은 특제 골프 클럽과 이 골프장을 가장 많이 이용해왔던 스톨 백작이 차지했다.
샤를로트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샤를로트가 우승을 한다는 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제 샤를로트도 틈틈이 운동도 하겠네.'
특제 그린 자켓을 입은 스톨 백작에게 귀족들의 박수 세례가 쏟아지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