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나르비크군은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래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바깥 영토를 그냥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긴, 병력의 차이가 10배가 넘어가는 데 그냥 물러서는 것도 말이 안 되기는 하지."
"기사단이 전투를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기사의 숫자가 많지는 않네. 정보대로 내전 중에 기사가 많이 죽기는 했나 봐."
천천히 앞으로 나서는 기사들의 모습에 나도 조금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나르비크에서 슬슬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에 영지군 역시 전열을 가다듬으며 공격을 대비했다.
"기사단 뒤로 마법사도 보이네.
진짜 전쟁을 각오하고 군사를 움직인 것 같은데?"
"왕도에서는 아직 다른 메세지가 없었습니까?"'
"계속 외교적 항의만 하는 것 같더라고. 아무리 중앙에서 나를 싫어한다고 해도 왕국의 영토가 공격을 받는 건데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해."
"국왕 폐하께서는 영주님을 신뢰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일단 나르비크에서 본격적으로 군사를 움직이기 전까지는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아직도 눈치를 보다니···"
"뭐- 그래도 저 모습을 보면 눈치를 보는 것도 오늘로 끝이지."
"그렇겠군요."
오늘 나르비크군이 공격을 시작하면 베르겐 왕국도 왕국군 움직일 것이다.
사실 베르겐의 국력이 나르비크보다 나으면 나았지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렇게 시간을 주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중앙의 정치꾼들이 나를 싫어하는 건 분명했기에 그러려니 하고 기다려주었다.
그때 나르비크군에서 한 사람이 말을 달려왔다.
"나는 나르비크 왕국의 리프네 남작이다.
사령관인 하스타드 백작님의 메세지를 가지고 왔다."
"메세지?"
"그렇다. 나르비크 왕국에서는 베르겐 왕국과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 왕국군이 바깥 영토로 진출을 할 수 있도록 군사를 뒤로 물리기를 바란다."
"이미 바깥 영토는 우리 아렌달 영지군이 점령했다.
그러니 바깥 영토로 진출하겠다는 말은 베르겐 왕국을 침범하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내 주장에 리프네 남작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렌달 영지군이 이제 겨우 탐색을 마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탐색을 마친 정도로 점령이라니. 겨우 300명의 병사로 바깥의 몬스터를 다 정리했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나르비크 왕국은 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앞으로 1시간 안에 나르비크가 바깥 영토로 진출할 수 있도록 군사를 뒤로 물리지 않는다면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실력행사를 시작하겠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군사를 뒤로 물리지 않는다면 바깥 영토로 진출하려는 본국을 방해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 책임을 묻도록 하겠다!"
긴 연설을 마친 리프네 남작은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나르비크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겨우 300명이라니. 뉴렌달로 진출할 때보다 100명이나 더 늘어났는데.
하- 저 자식들 진짜 외국의 정보망이 완전히 무너진 것 아니야?"
"아무래도 내전의 여파를 회복하느라, 나르비크 왕국 밖의 정보는 하나도 못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짜 웬만해서는 좋게 넘어가고 싶은데···
저쪽에서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지."
나르비크 군은 정말 1시간을 기다린 후에 진군을 시작했다.
가장 선두에서 속도를 붙이는 기사단의 모습에 영지군에 명령을 내렸다.
"기사단이 사거리에 들어오는 대로 공격을 시작한다."
내 명령에 발사 준비를 마친 기관총 사수들이 기사단을 향해 총구의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기사단의 돌입과 함께 불을 뿜어냈다.
-쾅 쾅 쾅
터져 나오는 폭음에 나르비크의 마법사들이 서둘러 방어 마법을 시전 했지만, 이미 돌격하던 기사단의 속도는 완전히 죽어버렸고, 영지군 병사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나르비크의 기사들은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며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러자 나르비크의 마법사들이 혼란을 겪는 기사들을 구호하기 위해 영지군을 향해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프로텍트 쉴드 가동!"
하지만 영지군에는 이미 마법 공격에 대응하는 방어 아이템이 있었다.
영지군을 완전히 덮고 있는 마법 보호막의 성능에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법 공격에 대한 방어 능력은 진작에 준비해 놨지.'
마법 공격마저 쉽게 막아버리는 영지군에 나르비크 군이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기사들의 숫자가 적었다고 해도 한 번의 공격으로 기사단을 잃어버렸다.
우리 영지군에는 접근조차 못 한 채로 말이다.
"기사단이 갈렸으니까 다시 군을 뒤로 물리려나···
는 아니네."
군을 물릴 것이라는 내 기대와 다르게 나르비크 병사들의 발이 빨라졌다.
하스타드 백작은 영지군의 화력을 보고도 공격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하스타드 백작이라는 놈은 하치 남작보다 더 멍청한 놈인가 보네."
하치 남작은 그래도 영지군의 화력을 맛보고 곧장 군을 물렸는데, 하스타드 백작은 그 반대로 병사들을 밀어 넣고 있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무모한 진군이었다.
"···X발!"
영지군의 화력에 목숨을 잃는 나르비크 군의 모습에 욕이 나왔다.
굳이 죽지 않아도 될 목숨이 멍청한 지휘관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다.
"볼튼경!"
"네. 영주님!"
"하스타드 백작. 그 새끼를 잡아 와!"
내 명령에 볼튼이 나르비크 군을 향해 달렸다.
볼튼을 막으려고 몇몇 병사들이 달려들었지만, 일개 병사들이 소드마스터를 막을 수는 없는 법.
볼튼의 돌입과 함께 도주하는 지휘관들에 결국, 병사들도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귀, 귀족들이 도망친다!"
"도망쳐!"
도망치는 나르비크 군에 헤돈이 말했다.
"영주님. 추격할까요?"
"아니- 추격은 하지 않는다."
고개를 젓는 내 모습에 헤돈이 영지군의 사격을 중지시켰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내 눈앞에는 1천이 넘는 시체가 쌓여있었다.
하스타드 백작은 자신의 호위 기사들을 희생시키며 도망쳤다.
그래서 볼튼은 어쩔 수 없이 리프네 남작을 내 앞에 잡아 왔다.
"정말 아렌달 영지군이 어떤 군대인지 정보도 없이 전투를 시작한 거냐?"
내 물음에 반쯤 정신을 놓고 있던 리프네 남작이 말했다.
"어떤 군대라니··· 군대가 다 똑같은 군대지, 누가 이런 군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오?"
"그럼 내 곁에 소드마스터가 있다는 것도 몰랐겠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리프네 남작에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나르비크는 어떻게 왕국을 유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내 눈치를 보고 있는 리프네 남작을 보고 말했다.
"이 녀석. 어디서 허튼짓 못 하게 가둬놔."
"가, 가두다니!
나는 귀족이오! 포로가 되더라도 귀족은 귀족법에 따라 귀족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하··· 그놈의 귀족법.
리프네 남작. 내 앞에서 귀족법을 들먹이던 놈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줄까?"
내 말에 리프네 남작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목숨이라도 붙어있고 싶으면 그냥 닥치고 있어."
나르비크 군의 공격은 곧바로 왕도에 전달됐다.
침략군이 왕국의 경계를 넘어 아렌달 영지군을 공격했다는 말에 보리스 국왕도 심각하게 받아들여 귀족들에게 병력을 모을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대규모 도로 공사에 참여하고 있었던 지방 영주들은 그 지시에 불만을 터트리며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로 인해 기대보다 적게 모인 병력에 국왕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고, 중앙의 정치가들은 영주들을 비난했다.
그 비난의 대상에는 당연히 나도 포함되었다.
나 역시 왕도로는 단 한 명의 병력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근데 아렌달은 나르비크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데 왕도로 병력을 어떻게 보내!
그럼 아렌달은 누가 지켜주는데?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솔직히 말해서 아렌달 영지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지금 영지군의 숫자는 영지를 지키기에도 모자란 숫자였다.
6천의 나르비크 군을 상대로 훌륭히 방어했는데, 내 보고에도 늦장 대응을 해놓고 비난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영주님. 왕국군이 나르비크의 국경을 압박할 것 같은데 저희 영지군은 어떻게 합니까?
왕국군과 함께 나르비크의 국경을 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지금 이쪽 국경으로 모여있는 나르비크 군이 1만 명 정도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는 국경을 지켜야지. 함부로 국경을 넘었다가 뒤로 돌아오는 나르비크 군을 놓칠 수도 있으니까.
뒤처리는 국왕과 왕국군에게 맡기자고."
그리고 원래부터 나는 사람을 상대로 힘을 쓰는 상황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마법 무기를 만들고, 영지군을 키운 이유는 모두 지키기 위함이지 빼앗기 위함이 아니었다.
나르비크군이 다시 한번 바깥 영토를 넘보지 못하게 막는 것으로 아렌달의 역할은 충분했다.
"왕도에 전해. 아렌달은 경계를 지키고 나르비크의 병력을 붙잡고 있겠다고.
이쪽으로 넘어오는 나르비크군은 우리가 확실하게 막을 테니, 괜히 지방 영주들에게 헛소리나 늘어놓지 말고 중앙에서 해야 할 일을 하라고."
영지군은 국경을 지키며 움직이지 않겠다는 메세지에 왕국군 역시 움직이지 않겠다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렌달이 아니라 베르겐 왕국이 공격당한 것이라는 생각을 못 하는 건가?"
"소집된 왕국군의 규모도 크지 않고, 그때 이후로 나르비크 군의 움직임도 전혀 보이지 않아서 흐지부지 넘어가려는 것 같습니다."
"그럼 나르비크에서 우리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상은?"
"나르비크에서는 바깥으로의 진출을 한 거지 우리 영지군을 공격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 그때 도망치던 걸 추격했어야 했나?"
순간 열이 확 올랐다.
"기껏 왕국을 지키고, 영지군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더니···
리프네 남작은 지금 어디 있어?"
"교도소에 들어가 있습니다."
"리프네 남작을 풀어준다."
"그냥 풀어주는 겁니까?"
"아니, 리프네 남작에게 경고의 메세지는 가져가게 해야지.
마탑에 준비하라고 해."
교도소에서 나온 리프네 남작은 처음 겪는 시련에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나를 어쩌려는 것이오."
"어쩌긴? 풀어주려는 거지."
내 말에 리프네 남작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왕국에서 내 몸값을 지불했나 보군.
그렇다면 이제부터 귀족법에 따라 귀족으로서의 대우를···"
"나르비크에서 네 몸값을 지불한 게 아니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따라와."
내 말에 리프네 남작은 입을 꾹 닫은 채 나르비크의 국경까지 끌려왔다.
나는 호시탐탐 도망치려고 눈을 굴리는 리프네 남작을 풀어주며 말했다.
"잘 봐. 그리고 네가 본 것을 나르비크에 전해."
"무엇을 말이오?"
"아렌달의 힘."
"아렌달의 힘?"
리프네 남작의 의문에 나는 마탑에 신호를 보냈다.
대기를 흔들며 움직이는 마나의 파동에 리프네 남작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떨어져 내리는 폭격 마법에 말을 잊고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멀리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나르비크 군을 보며 리프네 남작에게 말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않겠지?"
멍하니 바라보는 리프네 남작에게 씨익 웃어주었다.
"돌아가서 전해.
다시는 내 영지를 넘보지 말라고."
내 경고에 리프네 남작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나르비크를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