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잠깐의 휴식에서 돌아온 나는 영지 외부에서 진행 중인 도로 공사의 건설 상황부터 확인했다.
"도로 공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체스터 영지 쪽으로 가는 도로는 공사 속도가 제법 붙는 것 같던데?"
"체스터 남작님이 고향 영지로 가는 길이니만큼 열정을 다하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열정적인지 마법사들의 지원도 계속해서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무리하다가 쓰러지지 말고 적당히 하라고 해야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대규모 토목 공사는 절대 날림으로 하면 안 된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벽하게 공사를 마쳐야지 그게 안 되면 수십, 수백 번의 보수 공사를 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영주님의 말씀 현장에 전달하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직접 공사 현장을 한번 봐야겠어."
"영주님께서요?"
"지금까지 영지에서 하던 공사보다 큰 공사니까.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나도 보고 싶어."
잠시 휴식을 보내고 돌아와서 그런지 갑자기 토목인으로서의 피가 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솔직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국가 규모의 토목 공사가 아니었던가.
이제 직접적인 삽질은 안 하더라도, 현장의 냄새만이라도 맡고 싶어졌다.
"아렌달을 나온 것도 오랜만이네."
지난번 국왕의 즉위식으로 왕도에 갔다 온 이후 처음으로 아렌달 영지 밖으로 나왔다.
"가끔은 이렇게 영지 밖으로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이렇게 공사 현장의 냄새를 맡고 나니 없던 힘도 나는 것 같군요."
볼튼의 말에 친위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기사들이 활약할 공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장보다 공사 현장을 편하게 느끼는 이들을 보면 베일리 백작이 말한 대로 기사의 시대가 정말 끝을 향하는 것 같았다.
그런 우리를 발견하고 한 사람이 다가왔다.
"아렌달 공작님. 공작님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르만 남작?"
"저를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얼마 전 영지를 물려받는 기르만 남작이었다.
선대 기르만 남작이 내 앞에서 머리를 땅에 숙이던 날 그의 뒤에서 분을 삭이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영주가 되어 실리를 위해 내게 머리를 숙이는 것을 서슴지 않는 모습이었다.
특히 영지의 공사권을 아렌달에 넘긴다는 메세지는 나 역시 놀랄 정도의 일이었다.
"기르만의 성의는 잘 보았네."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영지의 공사팀이 지금 기르만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안내하겠습니다."
기르만 남작을 따라 조금 이동하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건설 노동자들이 보였다.
뉴렌달 공사 때부터 봤던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공사 현장에 내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시끄러운 현장의 모습에 기르만 남작이 말했다.
"이런! 공작님께서 친히 이곳까지 오셨는데.
잠시 공사를 멈추도록···"
"아니, 괜히 나 때문에 공사가 늦춰지면 안 되지. 그냥 놔두도록 해."
이미 뉴렌달 공사 때부터 내가 현장에 나타나도 공사를 멈추지 말라는 지시가 배어있었기 때문에 공사 현장은 더 시끄럽게, 그만큼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터미널 공사도 잘 진행되고 있지?"
"그렇습니다. 얼마 전부터 건물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좋아. 물류가 머물 수 있을 만큼이 되면 바로 터미널을 이용할 수 있게 상단들에 이야기해 두지."
"감사합니다! 터미널 공사가 늦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상단들이 기르만 영지를 머물러 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말에 기르만 남작이 활짝 웃었다.
드디어 기르만 영지도 낙수 효과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한 것이다.
"공작님께서 방문해 주신다는 말씀에 저녁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만찬을?"
"그렇습니다. 저희 기르만에서 겨울마다 사냥대회가 열린다는 것을 아십니까?"
기르만 남작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톨 백작이 몇 번이나 이야기했던 행사였으니까.
"그때 잡은 산돼지로 만든 햄이 마침 숙성을 마쳐서 최상의 맛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꼭 공작님께 맛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돼지고기를 숙성시켜서 먹는다고?"
"그렇습니다. 공작님께서도 한번 맛보시면 반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 그래도 돼지고기를 숙성시킨 건···"
얼마 전에 뉴렌달에 전염병이 돈 이유가 남대륙에서 가지고 온 돼지 때문이었기에, 돼지고기를 숙성시킨 햄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기르만 남작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
"저희 기르만 영지만의 특별한 보관법으로 숙성을 시킨 햄입니다.
안전이나 고기의 품질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공작님.
꼭 한번 공작님께 저희 특산물인 하몬을 대접할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기르만 남작에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녁 만찬에서 나는 기르만 남작에게 말했다.
"우리 영지에 남대륙에서 가지고 온 돼지가 있는데, 이 돼지로도 하몬이라는 걸 만들 수 있을까?
이 돼지가 고기 보관이 너무 어려워서 그렇지 맛은 정말 기가 막힌 돼지거든.
괜찮으면 잘 키워서 기르만의 특산품으로 만들어도 될 것 같은데?
기르만 남작. 어때?"
"특산품이요? 마, 맡겨만 주십시오!"
이세계 최고의 돼지고기가 만들어진 저녁이었다.
영지군에게서 남은 몬스터 군락을 모두 정리했다는 보고가 왔다.
그 보고에 영토 확장 공사 계획을 짜기 위한 지도 제작과 측량을 시작하려 했지만,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영지군에 이상한 것들이 걸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르비크에서 바깥 영토에 대해 간을 보고 있는 거지?"
"그런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얼굴을 비출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맞아. 영지군이 경계를 서고 있는 곳이 나르비크의 국경과 딱 붙어 있는 위치도 아니고 말이야."
그동안은 몬스터의 땅이라고 생각해서 경계만 지키고 있었던 나르비크에서 경계를 넘어 영지군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나르비크의 스파이들이 바깥 영토로 나오기 시작했다.
-전부 영지군에게 걸려들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스파이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헤돈이 생각하기에는 어때?"
-아무래도 저희 영지군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스파이를 투입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뉴렌달까지 들어가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습니다.
"하- 영지군의 규모를 파악하고 나면 군사를 이끌고 경계를 넘어올 수도 있겠네?
-그럴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일단 알겠어. 왕도에 연락해서 국왕에게 나르비크에 항의하도록 요청하지.
일단은 점령한 영토 안에서 경계만 취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나의 메세지에 보리스 국왕은 곧장 나르비크에 항의의 메시지를 보냈다.
나르비크에서는 자신들은 모르는 이야기라고 발뺌했지만, 점점 노골적으로 바깥 영토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나 역시 헤돈에게 지시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나르비크에서 직접적인 군사의 움직임이 보인다면 핫라인으로 통신을 보내도록."
-저희가 선제공격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이미 영지군이 점령한 땅을 침범한 거니까 명분은 충분하다.
선은 나르비크에서 넘은 것이니까 선제공격을 해도 문제는 없어."
-알겠습니다. 지금보다 큰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나르비크의 스파이는 뉴렌달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저는 스파이가 아닙니다!"
"스파이가 아니기는? 서쪽 구릉지대 위에서 도시를 감시하던 놈이 스파이가 아니야?"
"아닙니다. 저는 그저 왕도에서 뉴렌달의 이야기를 듣고 여행을 온 것뿐 입니다.
저 역시 베르겐 왕국의 백성인데 스파이라니요? 오해입니다."
"그래? 왕도에서 왔다면 아렌달 성을 지나서 여기까지 왔겠네?"
"그렇습니다! 뉴렌달까지 오기 위해서는 당연히 아렌달 성을 지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너에게는 왜 아렌달 영지를 방문했다는 임시 코드가 없지?"
"······"
내 물음에 스파이는 침묵했다.
임시 코드가 무엇인지 모르는지 굳은 얼굴을 한 채로 입을 다문 것이다.
"아렌달 성을 지나왔는데 임시 코드가 없다니. 이상하잖아?
그렇지 않아?"
"······"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스파이에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여기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법이 적용되는 곳이거든.
스파이 짓을 하려면 이곳이 어떤 곳인지 정도는 미리 알았어야지."
나르비크의 메세지가 왕도를 거쳐 뉴렌달에도 들려왔다.
[언제부터 몬스터의 땅이 베르겐의 땅이 되었는가?
겨우 300명의 병력이 바깥을 지나왔다고, 바깥 영토를 점령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겨우 그런 이유로 바깥 영토를 점령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나르비크 역시 수십 년 전부터 바깥을 탐색하고 몬스터를 사냥해 왔으니, 베르겐의 주장대로라면 바깥의 영토는 나르비크의 땅이라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바깥 영토의 권리를 주장하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결국, 나르비크에서는 우리 영지군이 점령한 바깥 영토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이미 영지군의 규모도 파악하고 있다는 메세지를 서슴지 않는 것을 보면 실력행사도 하겠다는 뜻을 대놓고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내전을 겪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런 도발을 하는 거지?"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베르겐 왕국을 상대로 도발하는 게 아니라, 주인 없는 땅이니 자신들이 날름 삼키겠다는 것 아닙니까?"
"주인이 없긴 왜 없어. 이미 내 병사들이 깃발을 꽂았는데!"
"다 저희 영지군의 힘을 무시하고 있어서 아니겠습니까? 바깥 영토에는 겨우 300명 밖에 없으니까요."
"마법 무기로 무장한 영지군이 일반 병력하고 같나?
나르비크는 정보 수집도 똑바로 못하는 건가?"
"스파이로 들어온 놈이 임시 코드가 뭔지도 몰랐는걸요."
영지군이 경계를 서고 있는 앞까지 나르비크의 군대가 모습을 보였다.
그 보고에 나는 영지군 200명과 함께 서둘러 영지군이 있는 곳까지 달려왔다.
영지의 경계를 맡을 일부 영지군을 제외한 영지군 500명이 진영을 만들어 나르비크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대략적인 숫자는 6천이 조금 넘는 것 같습니다."
"아니 이자르도 5천을 끌고 왔는데 겨우 6천?"
"나르비크는 정말로 영지군의 힘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헤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정보 수집 능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소드마스터인 이자르 후작의 목숨을 빼앗은 군대였다.
타국의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동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를 죽인 군대인데, 그 상대로 그때보다 겨우 1천 명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군대라니.
심지어 그때보다 영지군의 병력도 100명이나 더 많았다.
"아마 6천이라는 숫자도 이곳이 바깥이기 때문에 끌고 왔을 겁니다."
"아- 몬스터를 걱정해서?"
"네."
헤돈의 대답에 무시 받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 기분에 나는 멀리 꿈틀거리며 진영을 구축하는 나르비크군을 보며 말했다.
"그래. 모르면 일단 맞아야지.
한번 맞아보면 그때는 알게 되겠지. 주제도 모르고 덤빈 상대가 어떤 상대인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