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현대인-69화 (69/169)

69화

영지의 봉쇄가 풀리게 되면서 영지는 전염병이 돌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잠시 멈춰 있던 뉴렌달 브랜드의 유통이 다시 시작되었고, 상단과 상인들이 다시 뉴렌달을 찾아왔다.

영지민들도 더 이상 열병이 돌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다시 일자리로 돌아가 이전의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금방 제자리를 찾아 다행이네."

"영지의 기초가 튼튼한 덕분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전염병이 돌았음에도 사망자가 적었던 덕분에 영지민들도 큰 두려움 없이 일터로 복귀했을 겁니다."

세 자릿수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는데도 사망자가 적다는 말이 우스웠지만, 뉴렌달의 높은 위생 수준과 보건 수준 덕분에 세 자릿수의 사망자로 막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왕도나 다른 도시에서 전염병이 터졌다면 훨씬 많이 죽었겠지.'

"그러고 보니 2차 투자를 했던 귀족들은 언제 들어오는 거지?

원래대로라면 진작에 들어와서 새로 점령한 땅을 보고 갔어야 하는 건데."

"아무래도 귀족님들이 도시에 찾아오는 건 조금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긴. 귀족들은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투자금은 미리 받아놨으니 괜찮아진다 싶으면 들어오겠지.

나중에 땅을 확인하고 싶다는 연락이 오면 그때부터 손님맞이 준비를 해도 되겠네."

"네.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대충 회의를 마치고 나니 시간이 붕 떠버렸다.

전염병 사태로 인해 한동안 계획 없이 움직이다 보니 이렇게 스케쥴의 공백이 생기는 부분이 종종 나타났다.

"음- 시간이 비는데 어디 시찰이라도 다녀와야 하나?"

"하루쯤은 먼저 돌아가시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요즘은 별로 쉬지도 못 하시지 않았습니까?"

시찰을 나간다는 말에 볼튼이 걱정스럽다는 듯 나를 말렸다.

확실히 볼튼의 말대로 요즘에는 특히 바빴던 하루하루였을지도 몰랐다.

"오늘 하루쯤은 그냥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래야 볼튼도 오드리와 시간을 보내고 말이야."

"영주님! 저 때문이 아니라 영주님을 위해서 쉬셔야 합니다.

영주님께서 쓰러지시기라도 한다면 아렌달 영지는 완전히 무너지는 것 아닙니까!"

볼튼의 흥분된 목소리에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볼튼경의 충성스러운 조언 잘 알겠네.

그렇다면 나는 이만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돌아가겠네.

볼튼경도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길 바라지."

"저를 생각해주시는 영주님의 마음 잘 알겠습니다.

이런 영주님을 모실수 있으니 저는 정말 축복받은 기사가 틀림없습니다."

"소드마스터를 호위기사로 데리고 있는 나야말로 축복받은 영주가 아닐 수 없네."

"......영주님. 뭐하십니까?"

리오의 태클에 멋쩍은 웃음을 지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리오에게 뒤를 맡긴 나는 곧장 아리아를 찾았다.

"아리아~"

"아빠!"

아리아는 자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즉각 반응을 보이며 달려와 안겼다.

샤를로트의 배가 불러오면서 아리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적어졌기 때문에 부쩍 외로움을 타는지 내 목소리만 들려도 곧장 뛰어오는 아리아였다.

"샤를로트는?"

"공작 부인께서는 지금 주무시고 계세요."

시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아리아를 안아 들었다.

"아리아는 내가 데리고 있지. 샤를로트가 깨어나면 아리아는 내가 데리고 있다고 전해줘."

"알겠습니다."

이제 막 옹알이를 끝내서 아직은 제대로 말도 못 하지만, 그래도 샤를로트를 닮아서 자신의 의사 표현은 확실하게 하는 아리아였다.

"주세요!"

"이게 맛있니?"

내 물음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리아에 나는 스푼을 아리아의 입 앞으로 가져다주었다.

"꺄하-"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입안에 들어가자 아리아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내게서 스푼을 빼앗아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떠주려고 했다.

"읍! 아리아. 아빠는 그거 싫어하는데?"

"이거!"

"아리아. 그거 말고···"

"이거!"

"윽! 민트초코는···"

내가 민트초코를 거부하자 아리아의 표정이 점점 울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나는 잽싸게 스푼을 입에 물고 아리아에게 돌려주었다.

"꺄하-"

'윽! 도대체 누가 아리아에게 민트초코를 가르쳐 준거지?'

입안 가득 퍼지는 진한 민트 향기에 나는 혓바닥을 굴리며 입 밖으로 최대한 뱉어냈다.

그렇게 민트초코를 처리한 아리아는 폴짝 뛰며 한쪽에 놓여있던 종이 뭉치로 달려갔다.

그리고 종이를 집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아빠!"

"이건 또 뭐니?"

"그림!"

"그래. 그림이구나."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화려한 색상의 그림들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리아는 종이 뭉치 옆에 있던 색연필을 집어 오더니 종이의 빈 구역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완성되어 가는 그림에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어? 이 그림들, 아리아 네가 그린 거니?"

"네!"

"헉!"

아리아와 놀아주는 시녀들이 그려준 줄 알았던 화려한 색상의 그림들이 사실은 아리아의 작품들이라는 말에 나는 아리아를 번쩍 안아서 외쳤다.

"천재! 내 딸이 천재였구나!"

"캬하-"

그렇게 아리아를 들고 뱅글뱅글 돌고 있자 샤를로트가 시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들어왔다.

"위험하게 뭐 하는 거예요?"

"샤를로트! 아리아가 천재인 것 같아."

"네?"

"아리아가 그린 이 그림들을 보라고. 이건 정말 엄청난 재능이 아닐 수 없어.

천재가 틀림없다고."

열변을 토하는 내 모습에 샤를로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이 정도는 다들 그리잖아요?"

"뭐?"

"저도 아리아만 할 때, 이 정도는 그렸는걸요? 로즈마리는 저보다 더 잘 그렸고요."

"······"

아리아의 색연필을 가지고 쓱싹쓱싹 그림을 그려낸 샤를로트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내게 그림을 보여줬다.

"와-"

"왜 그래요?"

"샤를로트는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악기도 다룰 줄 안다고 했지?"

"셈도 할 줄 알아요."

"그래. 그랬지."

별 것 아니라는 샤를로트의 말에 나는 샤를로트의 시녀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시녀들은 샤를로트 만큼 능력이 안 되는지 내 눈을 피했다.

'그냥 당돌한 꼬맹이가 아니라 타고난 재능으로 자신감이 넘치는 거였냐?'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무것도 아니야."

아마 이세계가 지구와 같은 현대 문명을 이룩한 세계였다면 어땠을지 잠시 생각해봤다.

'나는 평범한 일반인 1이었을 테고, 샤를로트는 TV에 나올만한 신동이었으려나?'

신동도 그냥 신동이 아니라 금수저, 아니 다이아몬드 수저를 문 신동이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외모까지 받쳐주니, 정말 다 가진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왜 자꾸 그렇게 쳐다보는 거예요?"

"음- 좋아서?"

"······"

순간 말을 잊은 샤를로트의 귀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끄러운 듯 시녀들을 바라보자 눈치 빠른 시녀들이 고개를 돌려주었다.

아리아를 재우고 돌아오는 내게 샤를로트가 말했다.

"그거 아세요?"

"아마··· 모를걸?"

"오드리가 그러는데 볼튼경은 되게 로맨티스트래요."

"볼튼이?"

"네. 한 번 흥분하기 시작하면 주체가 안 된다고."

"음- 하긴 소드마스터의 체력이라면 주체가 안 되겠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그쪽 이야기가 아니야?"

내 말에 고개를 흔든 샤를로트가 말했다.

"오드리는 볼튼경을 만나기 전까지 기사들은 다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데요.

무서운 무기도 다루고, 사람도 죽이니까요."

기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일반 백성들은 어느 정도 두려워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전쟁을 겪은 사람 중에는 귀족보다 기사들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원래 이야기에서 기사들은 다 로맨티스트 아니었나?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전장에 나가고, 사랑 노래를 부르는 건 다 기사들이잖아?"

"그건 이야기잖아요."

샤를로트의 단호한 말에 나는 속으로 외쳤다.

'그런 이야기를 쓰는 게 너희 글쟁이들이잖아.'

"아무튼, 볼튼경이 매일 같이 꽃을 선물해 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고 저한테 이야기하더라고요."

"볼튼이 그렇단 말이지?"

"그리고 말이 되게 많데요.

항상 당신의 뒤에서 조용히 있는 모습만 봐서 볼튼경이 말이 많다는 건 상상이 안 돼요."

볼튼이 말이 많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한번 급발진할 때마다 나에 대한 찬양으로 쏟아 내는 걸 생각해보면 과묵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러는데, 당신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내 주변 사람들?"

"네. 이야기로 쓰면 재밌을 것 같아요."

'재미야 있겠지.

내 주변에 별종들이 얼마나 많은데.'

"음- 그럼 마법사들의 이야기부터 해줄까?"

"마법사들이요?"

"응. 마법사들 만큼 재밌는 사람들도 없거든."

항상 피로에 쩔어 있는 에일렌이나 폭발 아티스트 알비레오, 맨날 어디를 쏘다니는지 모를 달리아만 해도 이야기거리가 한 가득이다.

"근데 내 이야기는 또 안 써주는 거야?"

"당신 이야기요? 당신 이야기는 쓴 적이 없는데요?"

"제우스와 샬···"

"!"

황급하게 자신의 입을 막는 샤를로트에 나는 웃고 말았다.

늦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계절의 이른 아침.

영주성에는 다시 한번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나는 긴장감을 떨쳐내기 위해 닫힌 방문을 두드려 샤를로트의 시녀를 불러냈다.

"방은 너무 덥지 않게 관리하고 있지?"

"네. 혹시 몰라서 마법 용품들도 다 가져다 놨고, 마법사님들도 대기하고 있습니다.

영주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기씨는 아리아 아가씨 때처럼 건강하게 태어나실 거예요?"

"그, 그래. 이번이 처음도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샤를로트의 시녀는 다시 샤를로트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다렸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방 안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 축하드립니다."

들썩이는 영주관에 아리아도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아리아. 동생이 태어났구나."

눈을 꿈뻑거리는 아리아에게 씨익 웃어준 나는 서둘러 복장을 갈아입고 닫힌 문을 두드렸다.

시녀는 내 복장을 보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드, 들어오세요. 영주님."

"좋아."

방안으로 들어오는 내 모습에 시녀들이 시선을 피하고 샤를로트도 한숨을 쉬었다.

"그 이상한 옷을 또 입은 거예요?

"신생아가 태어나면 원래 이렇게 해야 하는 거야."

당당한 내 대답에 샤를로트가 시녀에게 말했다.

"정말이니?"

"···아니요."

시녀의 대답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샤를로트의 곁에 앉았다.

그러자 샤를로트는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미안해요."

"말했지? 나는 딸이 더 좋다고."

"······진심이에요?"

내 끄덕임에 샤를로트는 침대에 스르륵 누우며 말했다.

"고마워요."

샤를로트를 위로한 나는 잠시 생각을 하기 위해 집무실을 찾았다.

'아리아랑 어울리면서 이쁜 게 뭐가 있을까?

음- 의미보다는 부르기 좋은 게 낫겠지?'

그렇게 나는 둘째 아이의 이름을 짓기 위해 생각에 빠져있었다.

"음- 영주님. 다음에는 분명 아들이 태어날 겁니다.

아직 영주님은 젊으시지 않습니까."

"그, 그렇습니다. 영주님!

영주님도 공작 부인도 건강하시니, 아이야 얼마든지 더 낳으실 수 있을 겁니다."

"······"

"어떻게 하죠?"

"어떡하긴 어떡해? 그냥 우리는 우리 일이나 하는 거지."

"하- 이번에도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을 줄이야."

"그래! 아리스가 좋겠어!"

"헉!"

"여,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달려드는 행정관들의 모습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뭐, 뭐야? 왜 다들 여기 있어?"

"네? 그야 출근을···"

"무슨 소리야? 오늘 내 둘째 아이가 태어난 것 몰라?"

"그거야 알죠."

"근데 왜 여기 있냐고?"

"네?"

"퇴근해.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정말이 십니까?"

리오와 행정관들의 멍청한 표정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기억 안 나?

나는 오늘부터 육아 휴직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