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전문 학교에서부터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실무 능력을 익히기 위해 공사장에 모습을 보였다.
"어때?"
"아무래도 전문 학교에서 이론 교육을 배우고 와서 그런지 현장에서도 습득력이 좋습니다."
"그래도 현장에서 배울 수 있는 게 따로 있으니까 잘 이끌어 보라고."
"네. 스미스님께서도 학생들을 부탁한다며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현장에서 똑바로 가르치지 않는다면 저도 스미스님께 한 소리를 들을지도 모릅니다."
"이론과 현장은 또 다르니까···
저것 보라고. 저러다가 떨어지면 그대로 딴 세계로 가버리는 거야."
"네?"
나는 손가락으로 시설물 난간에 팔을 기대고 있는 학생을 가리켰다.
"저, 저런! 야!! 정신 안차려!!"
발더의 고함에 학생들이 화들짝 놀라 난간에서 팔을 떼는 모습이 보였다.
"안전에 이상이 없는지 꼬박꼬박 확인하라고. 괜히 안전 미숙으로 사고 나지 않게 말이야."
"죄송합니다. 영주님.
당장 조치하겠습니다."
'그때 안전과장 말대로 똑바로 안전 검사를 했다면 나도 이세계로 떨어지지는 않았겠지.'
안전과장의 말대로 그날 공사를 접고 돌아갔다면, 이렇게 이세계의 영주님이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만 돌아가야겠어."
"벌써 가시는 겁니까?"
"내가 현장에 있어 봐야 내 눈치만 볼 거 아니야?
원래 윗사람이 현장에 자주 얼굴을 비춰봐야 공사에 별로 도움도 안 돼."
"하하- 다른 곳이면 몰라도 건설 현장에서 영주님은 엄청나게 도움이 됩니다."
전문 학교에서 인재가 키워지고 있는 만큼 마탑과 마법 연구 단지에서도 많은 성과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어린 마법사들이 본격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마법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연구 단지의 기술자들이 마법사들의 연구를 통해 새로운 상품과 무기를 개발해 주고 있었다.
"에일렌이 말끔한 모습을 보여주다니. 놀랄 일이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날에만 저렇습니다.
보통 때는 영주님께서 기억하시는 에일렌 그대로입니다."
"그래?"
"네."
마법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영지를 발전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처음 술집에서 얻어터지고 있던 자하를 줍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는데도 지금보다 몇 배의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처음 자하를 영지에 영입할 때 자하에게 사기를 쳤었는데···'
"자하에게 사과를 해야겠군."
"네? 갑자기요?"
"그래. 처음에 자하를 만났을 때 내가 주점 주인에게 자하의 몸값을 줬다고 했잖아?
그때 몸값으로 1만 셀링을 줬다고 말했었는데··· 사실은 100셀링 밖에 안 줬어."
"헉! 100셀링이요?"
"그때는 자하를 우리 영지에 묶어두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거였는데··· 이제야 사과를 하네."
자하는 살짝 당황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랬군요."
"미안해. 그때는 마법사가 정말 필요해서···"
내 사과에 자하는 고개를 저었다.
"영주님께서 미안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때 영주님께서 구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저는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요.
사실 그날 이상하게 마나가 제어되지 않아 마법진을 발동하게 되었고, 덕분에 마나도 꽤 고갈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주점 주인에게 그렇게 당한 거였지요."
"그런 거야?"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가 되어서 겨우 주점 주인에게 대응도 못 하고 끌려 나왔겠습니까?"
생각해보니 그것도 웃긴 모습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저 때문에 1만 셀링이나 쓰셨다는 말씀에 많이 당황했지만, 그래도 제 몸값으로 1만 셀링이나 쳐주셨다는 이야기에 엄청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100셀링이었군요."
그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하자 자하가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겨우 100셀링짜리 마법사였던 제가 마나스팟을 관리하는 마법사가 되다니.
거기에 이런 10층짜리 진짜 마법의 탑 꼭대기를 개인 연구실로 가진 마법사가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저도 정말 성공했군요."
"그, 그렇지?"
"그럼요. 거기에 지금 제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마나석과 연구비가 얼마인데요?
아마 동대륙에서 제일, 아니 다른 대륙을 모두 뒤져도 저보다 마법 연구에 많은 돈을 쓰는 마법사는 없을 겁니다.
저 마법사 자하야 말로 진리에 가장 먼저 도착할 수 있는 마법사 아니겠습니까.
이게 다 그날 영주님을 만난 덕분입니다."
내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자하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하하- 자하님 말씀 대로입니다.
저도 영주님 덕분에 이렇게 소드마스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영주님의 곁에 있으니 모든 것이 다 잘되지 않습니까?
이게 다 영주님께서 하늘의 선택을 받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볼튼경의 말이 맞습니다.
다시 한번 영주님을 만나게 해주신 테이아 여신에게 감사를 올려야겠군요."
"감사의 인사는 영주님께 해야지요.
모든 공은 영주님께서 이루신 것 아닙니까."
"······둘이 뭐 하는 거야?"
"잠시 영주님을 찬양하는 시간을···"
"부끄러우니까 그런 건 내가 없을 때 하라고."
볼튼이나 마법사들이나 지위가 바뀌었음에도 변함없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항구에 본격적으로 배가 뜨기 시작하자 다시 한번 상인들이 뉴렌달로 몰려들었다.
외국에서 물건들이 들어오는 것을 기대하며 시장에서 기회를 잡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미리 시장을 선점하고 있던 상인 길드에서는 새로운 상인들에게 텃새를 부리며 시장을 내주지 않기 위해 자잘한 분쟁을 계속해서 일으켰다.
그러다 보니 행정관들의 일에 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에라이. 나도 더 이상은 못 해 먹겠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다르지 않았기에 결국 폭발해 버렸다.
"영주님. 그래도 영주님께서 해주셔야 하는 게···"
"그동안 내가 왜 행정 쪽의 인재들을 많이 영입하지 않았을까?"
"그야 인구도 적었고, 인구가 늘어나도 영주님의 명령에는 절대적으로 복종을 했으니까요.
덕분에 영지민들간의 분란도 거의 없었으니 저희 행정관들로도 충분히 감당 가능했지 않습니까."
"그래도 갑자기 너무 일이 몰리는 것 같아.
벌써 3일 동안이나 돌아가면 아리아의 얼굴을 보는 게 고작이라고."
"······영주님. 저는 일주일째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데요?"
"리오는 아이들도 다 컸고, 집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잖아?"
"그래도 집에는 돌아가야죠."
그 말에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곧 있으면 수확기라서 행정관이 더 필요한데 어떻게 하지?"
"영주님. 이제라도 행정 일을 할 수 있는 인재들을 키워야 할 것 같습니다.
기술자들을 양성하는 전문 학교처럼 행정가들을 양성하는 학교도 만들어주시지요."
리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내가 공돌이 출신이라고 너무 기술 쪽으로만 투자를 해왔었다.
이공계열의 교육기관이 있으면 당연히 인문사회계열의 교육기관도 필요했는데, 나름 영지가 잘 돌아가는 것 같아 그쪽을 무시한 감이 있었다.
이과뿐 아니라 문과도 역할이 있는 법.
"좋아. 법과 행정 등 인문계열의 인재를 양성할 학교를 만들어야겠어.
당장은 어쩔 수 없지만, 외부에서 인력을 빌려오든지 해야지."
외부에서 행정관들을 수급한 덕분에 영지의 행정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영지의 정보와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하는 거 알지?"
"외부에서 들어온 행정관들은 절대로 영지의 중요 자료와 마법 연구 단지나 제철소 등 주요 시설에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만약 영지에서 내린 조치를 어기는 놈이 있다면 바로 잡아서 가둬버려."
"귀족들도 말입니까?"
"그래. 귀족이고 평민이고 가리지 말고 일이나 잘하라고 해."
그리고 그중에는 당연히 귀족 가문 출신의 행정관들도 있었다.
물론 순수하게 행정을 도와주기보다는 아렌달의 정보를 빼가거나 나와의 친분을 만들기 위해 왔겠지만, 나는 그들을 이용해 영지에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사용하려고 생각 중이었다.
"잘하면 엔나 남작의 두 아들처럼 열렬한 추종자로 만들 수도 있겠지."
과거 엔나 영지에서 강제로 끌고 온 엔나 남작의 두 아들은 현재 뉴렌달 문화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있었다.
가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엔나 영지로 돌아가는 것보다 그냥 뉴렌달에 남는 게 훨씬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하는 듯했다.
나중에 영지를 물려받으면 나에게 엔나 영지를 바칠지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외부인들도 그와 같은 생각을 품게 만들 수 있으면 나나 영지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돌아가서 뉴렌달의 문화를 전파해주는 역할을 맡아주는 것도 좋았고, 뉴렌달에 남아서 일꾼이 되어주는 것도 좋았으니까.
"아예 학교에 유학생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오랫동안 영지에 머물면서 교육을 받으면 우리 영지에 애착이 생길 테니까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왕국의 젊은 세대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 효과는 굳이 계산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수확기가 지나며 여유가 생겼는지 관광을 위해 뉴렌달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잠시나마 뉴렌달의 행정을 도왔던 귀족 가문 출신의 행정관들이 확성기 역할을 잘 해주었는지, 이전보다 훨씬 많은 귀족이 뉴렌달을 찾아왔다.
그리고 샤를로트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손님도 뉴렌달을 방문했다.
"로즈마리!"
"샤를로트 언니! 둘째를 가지셨다면서요. 축하해요."
"고마워."
샤를로트와 가장 닮은 동생이자 베일리 변경백의 차기 안주인인 로즈마리가 가족들과 함께 뉴렌달을 찾아온 것이다.
"아렌달 공작님. 그리고 공작 부인.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누가 봐도 기사의 외모를 가진 베일리의 후계자, 지크 베일리의 인사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먼 곳까지 잘 와 주었어."
"감사합니다. 공작님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내 덕분에?"
내 물음에 지크는 로즈마리의 눈치를 살짝 보며 말했다.
"공작 부인께서 보내신 편지에 공작님의 이야기가 많이 있더군요. 그 이야기를 보고 로즈마리가 공작님을 배우라고···"
"아-"
귀족답지 않게 투박한 미소를 짓는 지크의 모습에 나는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샤를로트와 닮은 로즈마리라면 굳이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내 미소에 지크는 씨익 웃고는 내 곁을 지키고 있는 볼튼에게 말했다.
"경지에 오른 기사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가르침을 청해도 괜찮겠습니까?"
"저도 베일리의 검술을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기사로서 통하는 게 있는지 심상치 않은 눈빛을 교환하는 둘이었다.
"듣기로는 스톨의 별장을 이용하기로 했다고 하던데."
"맞습니다. 로즈마리가 스톨 백작님께 부탁해서 스톨 별장을 이용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서요."
"스톨 별장이라면 뉴렌달에서 가장 좋은 오션뷰를 자랑하는 곳이지. 탁월한 선택이야."
"다 좋은 처가를 가진 덕분 아니겠습니까?"
지크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크와 나는 같은 처가를 가진 동서지간이었으니까 말이다.
"공작님. 이따가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따로?"
"네."
그렇게 말한 지크가 주변을 살피고는 나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아버지께서 함께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