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이세계는 일부일처제가 법으로 정해진 세계가 아니다.
특히 귀족들, 그중에서도 영지의 주인인 영주들은 후계자를 얻기 위해 부인을 여럿 두는 경우도 많았다.
스톨 백작도 부인을 여럿 두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스톨 백작님은 후계자를 위해서 여러 부인을 둔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귀족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딸이나 친인척을 나의 둘째 부인이나 첩으로 보내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베르겐의 권력자와 혈연이 될 수 있다면 딸 하나쯤이야 아깝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내가 원한다면 하나가 아니라 둘, 셋도 아깝지 않게 보낼 귀족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물론 나도 예전에는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은 있었다. 영주라는 자리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니까.
'그런데 막상 생각을 해보면 그닥 내키지가 않는단 말이야.'
그리고 볼튼과 마찬가지로 나도 꽤나 순정파인 사람이다.
"그게 고민할 일인가요?"
"그렇지?"
"뭐 어때요? 겨우 부인 하나 더 있는 것 가지고."
"응?"
'뭐야 이 괴리감은?'
샤를로트의 말에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다른 여자랑 같이 있어도 괜찮은 거야?"
"그건 싫지만··· 당신은 영주님이시잖아요."
"그게 무슨···"
"당신은 영주님이에요. 영지를 이을 후계자가 필요하다고요."
나름 깨어있는 사고를 하는 샤를로트였지만, 그래도 현대인인 나와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영주에게 후계자는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톨 백작이 여러 부인을 두고 있었기에 거부감이 없는 것도 영향이 있겠지.'
"후계자야 아리아도 있으니까···"
"아리아는 아들이 아니에요."
샤를로트가 아리아를 낳았을 때 나에게 "미안해요."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능력주의자로 기본적으로 능력만 있으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는 사람이다.
그게 귀족이든, 평민이든, 난민이든 심지어 천민까지도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 아리아가 영주로서의 능력을 보인다면 아리아를 후계자로 세워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샤를로트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니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은··· 일단은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샤를로트에 나는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체스터 후작의 딸이 샤를로트만큼 내 기대에 만족하는 사람일지는 두고 봐야지.'
체스터 후작은 노골적일 정도로 자신의 딸을 내게 붙여주었다.
그리고 리사 역시 체스터 후작의 뜻을 따라 계속해서 내 곁을 맴돌았다.
샤를로트와 다르게 순종적이고 조용한 리사였기에 딱히 그녀가 내 곁을 맴돈다고 불편하다거나 거슬리는 점은 없었다.
다만···
'귀족으로서 교양 말고는 아무것도 없네.'
대화를 나눠보면 귀족가의 영애가 기본적으로 익힐 법한 교양 말고는 다른 대화가 전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솔직히 리사와의 대화는 재미가 없었다.
리사는 샤를로트처럼 스스로 무엇인가를 배워가며 노력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체스터 영지가 워낙 부유한 영지고 명문 귀족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스톨 영지 역시 부유한 것으로는 손에 꼽히는 영지였는데도 샤를로트는 스스로 노력을 해왔지 않은가.
나한테 콩깍지가 씌인 것이 아니라 생각해 보면 샤를로트는 정말 능력이 있는 여자였다.
그리고 샤를로트가 가진 명성을 따져봐도 리사와 비교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물론 리사가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귀족 가문의 딸로서 익혀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들은 모두 익히고 있었으니까.
다만 내가 일반적인 귀족들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라는 게 문제였다.
"공작님···"
"체스터 남작.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그게··· 혹시 제 동생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제 동생이라 그런 게 아니라 리사 정도면 외모도 빼어나고, 귀족으로서 갖춰야 할 교양도 부족하지 않은 아이인데···"
"음- 귀족 가문의 영애로서 잘 배운 것 같기는 하더군.
외모야 뭐- 딱히 내가 말할 것도 없고."
"그럼···"
"왜 누가 내 마음을 알아 오라고 시키기라도 한 거야?"
"아, 아닙니다. 그냥··· 그냥 동생의 일이라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빠르게 고개를 젓는 체스터 남작에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근데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궁금한 거요?"
"체스터 남작은 아무렇지 않아?"
"무엇이 말입니까?"
"체스터 남작의 동생이잖아?
이제 겨우 16살의 동생이 정략적으로 시집을 가는 것 말이야.
스스로 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주 부인이 될 거라는 보장도 없이 가문의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되는 데 괜찮아?"
"그거야 귀족 가문의 딸이라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공작님께 가는 것이라면 영주 부인이 아니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체스터 남작도 귀족답게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귀족인 입장에서 어린 동생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게 어느 정도 이해도 되는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체스터 남작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아직 후계자가 없는 공작님의 후계자라도 낳는다면 리사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 아닙니까.
공작 부인께는 죄송하지만, 영주로서 후계자를 갖는 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공작님."
"아리아가 있는데?"
"아리아 아가씨는 아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
너무나 당연하게 샤를로트와 같은 대답을 하는 체스터 남작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체스터 가문의 방문 일정이 끝나갈 때가 되자 체스터 후작은 나와 리사의 관계가 진척되지 않는 부분에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후작이 노골적으로 자신의 딸을 책망하는 모습에 조금은 안타까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체스터 형제도 동생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나를 이리저리 찔러보곤 했지만, 그들 역시 결국에는 포기하고 동생을 위로했다.
막상 체스터와의 정략혼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나였는데, 책임은 내가 아닌 리사가 지는 모양새였다.
체스터 영지를 무시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거라는 걱정까지 했기에 나로서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즐거우셨다니 다행이군요."
"더 좋은 관계가 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딸을 부족하게 기른 제 잘못이지요."
"아, 아닙니다. 저보다 더 좋은 짝이 있겠지요."
"하하- 베르겐에서 공작님보다 더 좋은 짝이 어디 있다고···"
아쉬움 가득한 체스터 후작의 모습에 이야기가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눈치 빠른 노엘이 나섰다.
"공작님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저희 체스터도 이곳 못지않게 좋은 영지로 만들 수 있도록 앞으로도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아렌달과 체스터는 앞으로도 좋은 관계가 될 겁니다.
체스터 남작도 있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군요.
혹시 공작님의 도움이 필요하면 리암을 통해 메세지를 전달하겠습니다."
노엘의 말에 체스터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시무룩한 얼굴의 리사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아렌달 공작님. 그동안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부족한 제가 주제넘게···"
"그렇게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네?"
"리사가 부족한 게 아니라 샤를로트가 내 기준을 너무 높게 만들었을 뿐이니까."
"공작 부인이시라면··· 그렇군요."
리사도 샤를로트를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왕국의 귀부인 중 샤를로트의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이 없고, 샤를로트의 행동이나 샤를로트가 사용하는 것들을 따라 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 대스타와 자신을 비교하면 리사도 내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음- 이 말이 위로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네 배경이 아닌 너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게 네 삶의 더 도움이 될 거야."
"저 스스로의 가치요?"
"그래."
내 말에 리사는 잠시 생각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그 모습에 체스터 후작이 다시 한번 아쉬움을 보였지만, 더 이상 기대를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서 더 미련을 보이는 것은 체스터 영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지.
체스터가 대영지가 아니었다면 더 귀찮았을 수도···'
체스터 후작이 뉴렌달을 떠나고 샤를로트가 나에게 말했다.
"저도 만나봤어요."
"?"
"체스터 후작님의 딸, 리사라는 아이요."
"샤를로트가?"
"영지의 식구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영지의 안주인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좋은 아이였어요. 예쁘고 똑똑하고, 그 나이 때의 저와 다르게 당돌하지도 않고···"
"샤를로트와 다르긴 했지."
내 말에 샤를로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신 거예요?
체스터 영지와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그 아이는 당신에게 도움이 됐을 거예요."
"굳이 정략혼으로 관계를 개선해야 할 만큼 아렌달은 부족하지 않아."
정치적으로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지만, 굳이 그렇지 않아도 아렌달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영지의 후계자를 생각해서도···"
"그게 샤를로트가 바라는 거야?"
"······"
"샤를로트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니잖아?
내가 다른 여자랑 같이 있어도 정말 괜찮아?"
"아니요!"
샤를로트의 반응에 웃음이 나왔다.
웃는 내 모습에 샤를로트가 입술을 깨물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칫- 내꺼야. 다른 사람한테 양보하고 싶은 마음 없다고요.
당신이 영주님이니까 어쩔 수 없이 양보하려고 했는데 싫은 건 싫어요."
"그치?"
"후계자가 뭐라고!
아들? 필요하면 내가 낳아줄게요."
"뭐?"
왠지 샤를로트의 눈동자가 심상치 않게 빛나고 있었다.
"음- 샤를로트? 잠시 진정하시는 게···"
"몰라요! 이리 와요!"
"샤, 샤를로트! 아니, 공작 부인!"
그런데 둘째는 아들이려나? 나는 딸이 더 좋은데···
영지에서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또 하나의 결실이 만들어졌다.
"뜬다!"
"배가 뜬다!"
마침내 바다 위에 뜨는 대형 선박에 해안가에 자리를 잡고 있던 영지민들이 환호를 보내왔다.
그 환호에 선박위의 선원들이 손을 흔들어주며 보답해주었다.
"아론 선장. 어때?"
"이렇게 큰 배는 저도 처음 봅니다. 거기에 바람이 없어도 순항할 수 있는 배라니.
이 배야말로 기적의 배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이런 배를 제가 몰수 있다니··· 반드시 영주님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남대륙에 가서 최대한 많은 마나석을 가지고 오라고.
그리고 영지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있다면 다 실어 와.
너무 실어서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조심하고."
"하하하- 알겠습니다."
나르비크의 내전 덕분에 영입한 항해사 아론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고는 배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선장이 올라타자마자 동력기관을 단 배는 빠르게 항구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대형 선박이 순식간에 바다 저편으로 사라지는 모습에 항구의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제야 진짜 항구 도시다워졌네."
아렌달에서 바다를 발견한 지 5년 만에 나는 진정한 의미로 바다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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