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도시의 예술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뉴렌달에서는 극단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가 퍼졌는지 왕국의 떠돌이 예술가들이 모두 뉴렌달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극단이나 음유시인뿐 아니라 길거리 악사나 화가들까지 맨몸으로 영지의 문을 두드렸다.
물론 문을 두드린다고 다 아렌달 성을 지나올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뉴렌달까지 도착한 예술가들은 도시에 정착하며 뉴렌달의 문화력을 올려주고 있었다.
"오늘은 무슨 공연을 한 거야?"
"기사와 여배우의 이야기였습니다."
"기사와 여배우? 보통 기사는 공주님이나 귀족 아가씨들이랑 엮이는 것 아니었나?"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내 말에 볼튼이 시선을 피했다.
종종 샤를로트가 극장에 갈 때마다 볼튼이 호위를 맡아 함께 연극을 보게 해주었다.
생각보다 연극을 즐기는 볼튼에 대한 내 배려였는데, 알고 보니 볼튼은 연극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드리에게 고백은 언제 할 건데?"
"······"
"도시에서 오드리의 인기가 매일 치솟고 있다고.
들어보니 몇몇 귀족들도 오드리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던데 이대로 있어도 괜찮겠어?"
"평생 검만 잡고 살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보기에 볼튼은 검보다 삽을 더 많이 잡았던 것 같지만··· 그래도 볼튼이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건 나로서는 기쁜 일이었다.
볼튼의 부탁으로 그동안 영지로 오는 청혼서를 되돌려 보냈었기에, 볼튼에게도 짝이 생기면 귀찮은 일이 덜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나야 샤를로트가 알아서 찾아와 줬잖아?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 먼 거리를 혼자 찾아와줬는데 그 마음을 모를까.
그리고 나도 샤를로트에게 마음이 있었으니까 그대로···"
돌이켜보면 처음에는 샤를로트에게 별로 마음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스톨 영지보다 아렌달이 한참이나 떨어지는 영지라고 해도 백작인 나에게 그렇게 틱틱거리는 꼴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 이후 아렌달을 찾아오는 샤를로트와 이야기를 몇 번 나눠보니 그때는 그저 어린아이의 치기였을 뿐, 생각보다 샤를로트는 깨어있는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샤를로트 역시 스톨 가문의 자식답게 보통의 귀족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덕분에 샤를로트와 이야기를 나누고 깨달은 것도 많았다.
특히 책임감에 스스로를 몰아붙이던 걸 샤를로트가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나도 이세계의 귀족들처럼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영주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솔직히 샤를로트는 엄청나게 이쁘잖아?"
"······"
그 말에 침묵하는 사람들에게 살짝 웃어준 나는 체스터 남작에게 말했다.
"체스터 남작은 어떻게 남작 부인과 만난 거야?"
"저는 정략결혼입니다."
"아- 그런가?"
"보통의 귀족들은 다 정략결혼 아니겠습니까?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 특이하신 거죠."
당연하게 대답하는 체스터 남작의 모습에 리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저는 아렌달 영지 최고의 미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
"결혼할 때는 최고의 미인이었습니다."
"그야 뭐-"
리오는 원래부터 영지의 수석행정관이었던 만큼 영지안에서는 권력자였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영지 안에서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상대를 고를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쁜 놈이었군."
"네?"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다."
나는 리오를 한번 노려봐 주고 볼튼에게 말했다.
"아무튼,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도와줄 테니 말이야."
"아닙니다. 영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하긴."
내가 오드리에게 볼튼과 결혼하라고 하면 오드리는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볼튼이 고백을 한다고 해도 오드리가 거절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영주의 말과는 다른 법.
'볼튼은 의외로 순정파였네.'
"그런데 볼튼경···"
"네. 체스터 남작님."
"어쩌면 솔로가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맞아. 볼튼. 솔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이 사람들이 또···'
체스터 남작의 말에 리오도 고개를 끄덕이자 볼튼이 나를 바라봤다.
"왜 가만히 있는 나한테 그래? 나는 샤를로트랑 좋다고."
"아마 공작님도 한 3년만 더 지나면···"
여기서 넘어가면 안 된다. 특히 오늘은 더욱.
"3년만 지나면 어떻다는 거죠? 체스터 남작님?"
"고, 공작 부인! 허억! 이블린."
볼튼이 돌아왔다는 말은 그가 호위하던 사람들도 돌아왔다는 말이었으니까.
식은땀을 흘리는 체스터 남작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준 나는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나는 먼저 일어날 테니 힘내라고. 체스터 남작."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남작 부인의 모습에 리오와 볼튼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튼의 사랑 이야기는 다행히 해피엔딩이 되었다.
"그러니까 기사와 여배우의 이야기를 만들어준 게 샤를로트였다는 이야기지."
"공작 부인께서 오드리라는 배우를 정말 아끼셨나 보군요."
"그런가 봐. 오드리도 볼튼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어서 후원자인 샤를로트에게 비밀스레 상담했고, 샤를로트는 두 사람을 이어주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 준거지."
"아무리 그래도 천민이나 다름없는 극단의 배우를 소드마스터와 연결해주시다니···"
체스터 남작은 나에게 적응해서 그러려니 넘어가겠지만, 외부의 귀족들이 알았다면 난리가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샤를로트가 볼튼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비난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야기였으니까.
물론 나나 샤를로트는 그런 이야기 따위는 신경도 안 쓸 사람들이지만 말이다.
"그보다 체스터 남작. 건설 쪽 일은 잘 배우고 있는 거야?"
"물론입니다. 이미 제 손으로 올린 건물만 10채가 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도로 공사 쪽 기술도 배우고 있습니다."
"오- 벌써 그 정도까지 배웠단 말이지.
그럼 체스터 남작에게 사업을 맡겨도 되려나?"
"네? 사업이요?"
내 말에 체스터 남작이 눈을 반짝였다.
자신에게 공사의 책임을 맡기겠다는 말이었으니 그가 기대하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 이대로 진행하면 올해 안에 예정된 공사가 대부분 마무리되잖아?
그래서 그동안 미뤄왔던 자원 개발과 영토 개척을 할까 해서 말이야."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시는 겁니까?"
내가 얻어낸 것은 바깥 땅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구스강 너머에는 얼마나 넓은 땅이 있을지 몰랐고, 구스강 안쪽의 영토 역시 모두 정복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나르비크 왕국의 위치를 생각해 봤을 때, 구스강 안쪽의 영토 중 겨우 절반 정도만 개척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새로운 영토라니. 그렇다면 다시 한번 귀족들에게 투자를 받으실 생각이 십니까?"
"왜? 체스터 남작도 한 번 더 투자하려고?"
"아, 아닙니다. 그저 아는 귀족들이 바깥 영토에 관심이 조금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마을을 만드는데 들어간 비용도 다 못 갚았는걸요."
"어차피 체스터 영지에서 빌린 돈이잖아? 이자도 없는 빚이니까 천천히 갚아도 되는 것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아버지께서도 요즘에는 영지 개발에 재미를 들리셨는지 투자를 많이 하셔서 돈이 생기는 대로 갚으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도 체스터에서 만드는 상품들이 잘 팔리고 있으니까 금방 갚을 수 있잖아?"
"다 공작님 덕분입니다."
"내 덕분은 무슨. 열심히 일하는 체스터의 사람들 덕분이지."
내 말에 체스터 남작은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자신을 향하는 공을 영지민들에게 돌리는 모습이 같은 귀족인 그로서는 아직 어색한 듯 보였다.
그래도 체스터 남작 자신도 모르겠지만, 그 역시 귀족의 색이 많이 빠져있었다.
'건설 노동자들이랑 같이 공을 차고 있으니 말 다 했지.'
"그러고 보니 체스터 후작이 뉴렌달에 한번 방문하기로 약속했는데."
"그렇습니까?"
"저번에 왕도에서 만났을 때 최대한 빨리 시간을 내보겠다고 했었어.
음- 언제쯤 오려나?"
체스터 후작이 뉴렌달을 찾아왔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체스터 남작이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마침 여유가 생길 시기였는지 체스터 후작은 뉴렌달에 방문하겠다는 메세지와 함께 가문의 사람들을 데리고 뉴렌달을 찾았다.
"어서 오세요. 체스터 후작."
"환대해줘서 고맙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렌달 공작님. 체스터 영지의 노엘 체스터입니다.
공작님의 이야기는 동생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체스터 남작의 좋은 형님이자 체스터 영지의 차기 주인인 노엘까지 데리고 왔다는 것으로 체스터 후작이 나와 뉴렌달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알 수 있었다.
"아렌달 성에서부터 느꼈지만, 과연 이야기로 듣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도시로군요.
특히 뉴렌달로 이어지는 도로는 저희 영지까지 연결하고 싶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영지간의 도로를 연결하고 싶다는 말은 나와 친목하고 싶다는 말.
내게 호의를 보내는 노엘에 나는 옆에 있는 체스터 남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침 체스터 남작이 아렌달의 도로 공사 기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체스터 남작에게 도로 공사를 맡기는 것도 좋겠군요."
"리암이 말입니까?"
살짝 놀라는 노엘의 모습에 체스터 남작이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겠구나. 먼 여행길에 조금 피곤하니 쉴 공간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렌달 공작님."
"물론입니다. 영지를 방문해 주신다는 말씀에 따로 준비해 놓은 공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방문한 귀족들 모두 만족한 공간이니 체스터 후작님도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귀족들이 만족했다니. 기대되는군요."
볼튼에게 준 바닷가 호텔을 본 체스터 후작과 노엘은 꽤나 충격을 먹은 표정이었다.
나름 베르겐 북부에서는 가장 힘있는 도시의 주인과 후계자였기에 10층짜리 건물과 그 안에 만들어진 시설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저 엘레베이터라는 걸 체스터 성에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얼마면 됩니까?"
"엘레베이터는 공간 마법의 정수로···"
"2만··· 아니 3만 셀링정도는 내겠습니다."
체스터 후작이 내 주머니를 불려주고 있을 때 체스터 가문 사람들은 창을 통해 보이는 오션뷰에 눈을 뺏기고 있었다.
"오라버니. 저길 보세요. 너무 예뻐요.
이 아름다운 걸 오라버니 혼자서만 보고 계셨던 거예요?"
"아니, 이 호텔은 비싸서 나도 못 오는 곳이야."
"그래도 이런 곳이 있었다면 말씀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저도 진작에 왔을 거예요."
"리사. 네가 여길 어떻게 와?"
어린 동생에게 붙잡힌 체스터 남작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집에서만 잡혀 사는 줄 알았더니, 동생에게도 저런 모습이라니.
체스터 남작은 천성이 그냥 여자들에게 약한 듯했다.
"오라버니. 저도 여기서 살고 싶어졌어요."
"뭐?"
"저도 뉴렌달에서 살고 싶어요."
체스터 남작에게 그렇게 말한 리사는 창밖으로 보내던 시선을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를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 체스터 후작과 노엘도 나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그저 관광을 위해 가문의 사람들을 데리고 온 게 아니었나 보네.
조금 귀찮겠는데···'
그동안 영지에 온 청혼서가 볼튼의 것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소드마스터인 볼튼은 귀족 가문에서 혈연을 맺고 싶어하는 사람이 분명했지만, 이곳에는 볼튼보다 더 혈연을 맺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아렌달 공작.
바로 나.
나에게도 볼튼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청혼서가 날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