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현대인-61화 (61/169)

61화

축구대회는 가히 열풍을 일으키며 진행되었다.

눈치 빠른 자영업자들과 상인들은 축구장 인근에 먹거리를 가져와 팔면서 짭짤하게 주머니를 채웠고, 일부 영지민들이 승부에 대한 내기판을 벌이다가 걸려 처벌을 받기도 했다.

그 모습에 스포츠 문화가 활발하게 되면 스포츠 토토를 만드는 건 어떨까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분명 누군가는 내기판을 벌이겠지.'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에서도 로또와 토토는 합법적으로 추가 세금을 뜯어내는 방법이 아니었던가.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영지의 관리 아래서 시스템을 만들어 음지에서 일어날 일을 방지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3일간 진행하기로 한 축구대회는 결승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상인 연합을 이기고 올라온 건설 노동자들과 제철소의 대장장이들을 이기고 올라온 영지군인가?"

결승전에 올라온 두 팀의 경기를 보니 한두 사람 정도는 실려 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당연히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들도 거친 경기에 흥분하며 열렬히 소리치고 있었다.

"망치로 찍듯이 팔꿈치로 찍어버리라고!"

"왕국 최고 정예군의 힘을 보여줘라! 그냥 죽여버려!"

그저 공을 차고 골을 넣는 경기에 상대를 찍어버리라는 둥, 죽여버리라는 둥 응원하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제대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군."

"그, 그런 것 같습니다."

"흥분해서 경기장 안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없도록 잘 지켜봐."

그렇게 지시를 내리며 관중석을 보자 정말 누군가가 경기장으로 뛰어들려는 듯 소리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관중들이 알아서 길을 비켜주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귀족이 왜 저기서 경기를 보고 있는 거야?"

영지민들이 알아서 길을 비켜주는 사람. 체스터 남작이었다.

"영지군이고 뭐고 다 찍어버려!"

한창 건설 쪽 일에 열중하고 있는 체스터 남작이라 그런지 건설 노동자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과연 저 모습을 체스터 후작이 보면 뭐라고 할까 궁금할 정도였다.

귀족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응원을 하니 그의 주위에 있던 영지민들도 열을 올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원래부터 영지에는 건설 노동자들의 숫자가 많았기에 응원하는 목소리 역시 건설 노동자 쪽이 압도적이었다.

"헤돈. 이러다가 영지군이 지는 것 아니야?"

"하하- 영주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 자신만만한데?"

"대회에서 우승하면 전원에게 휴가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지지 않을 겁니다."

"아-"

헤돈의 장담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군인에게 휴가가 걸려있다면 말 다 한 거니까.

아무리 상대방의 응원이 압도적이어도 영지군 병사들의 사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체스터 남작의 열렬한 응원에도 불구하고, 아렌달 공작배 축구대회는 영지군의 우승으로 마무리되었다.

겨우 3일간의 이벤트였지만 도시에 활기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우승한 영지군뿐 아니라 준우승을 거둔 건설 노동자들도 더 활기차게 영지 개발에 힘을 쏟고 있으니 축구대회의 효과에 나는 굉장한 만족을 하고 있었다.

"공작님. 다음 대회는 언제 하는 겁니까?"

"다음 대회?"

"가능하면 저도 영지민들을 데리고 팀을 만들어 볼까 해서···"

"팀을 만들겠다고?"

내 말에 체스터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장에서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스스로 팀을 만들 생각까지 할 줄이야.

정말 축구의 마력에 빠져버린 체스터 남작이었다.

'그런데 체스터 남작이 직접 뛸 생각은 아니겠지?'

"아직 다음 대회는 예정은 없는데."

"그, 그렇습니까?"

"음- 그래도 언제든 다시 축구대회를 열 생각은 있으니까, 그때는 체스터 남작이 꾸린 팀도 출전을 받아주지."

그 말에 체스터 남작이 눈을 반짝였다.

'왠지 체스터 남작에게 붙잡힐 영지민들의 고생이 보이는 것 같은데.'

언제 다시 축구 대회가 열릴지 모르지만, 축구는 완전히 뉴렌달의 생활 스포츠로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이었다.

영지민들이 시간이 생길 때마다 공을 차는 모습을 보며 또 하나의 문화가 퍼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이야기가 나에게 들려왔다.

"공작님. 남자들이 즐기는 축구 말고 저희 여자들도 즐길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이블린!"

"저희 남편이 축구에 빠져서 매일 축구 이야기만 하고 있어요."

그 말에 체스터 남작을 바라보자 그는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체스터 남작이 축구에 빠져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집에 돌아가서 남작 부인에게까지 축구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남작 부인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겠다고 그렇게 떠들어 댔는지.

'도대체 얼마나 떠들어 댔으면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

"공작님. 그냥 무시하셔도 됩니다. 제가 돌아가서 잘 이야기 하겠습···"

"공작님. 부탁드려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귀부인들도 같은 생각이에요."

"다른 귀부인들도 같은 생각이라고? 샤를로트도?"

"···공작 부인께서는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저희와 같이 이주한 귀부인들은 저와 같을 거예요."

체스터 남작 부인의 말을 들어보니 충분히 이해가 될 이야기였다.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특히 외부 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는 귀부인들은 차별이라고 느끼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스포츠가 아닌 다른 즐길 거리가 생긴다는 것 역시, 영지에는 도움이 되는 부분이었다.

"체스터 남작 부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샤를로트도 같은 생각이야?"

"음- 별로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뭔가 새로운 게 있으면 좋을 것 같기는 해요."

"그렇단 말이지?"

사실 스포츠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샤를로트가 곁에 있었기에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바로 샤를로트가 썼던 소설로 연극을 공연하는 것이다.

이미 왕도에서 샤를로트의 소설로 음유시인들이 연극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지 않은가.

'그리고 남자들이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여자들이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것은 현대인으로서 상식이지.'

생각해보면 샤를로트가 소설을 쓰게 된 계기 역시 왕도에서 우연히 봤던 연극이었다.

"샤를로트. 혹시 뉴렌달에서 연극을 하게 되면 어떨 것 같아?"

"연극이요?"

샤를로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굳이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아도 어떤 대답을 할지 얼굴에 다 보였다.

'이런 반응을 보니 이쪽도 스포츠만큼 열풍을 불러올 수 있을 것 같은데?'

뉴렌달에 극장을 만들면서 랄프에게 왕도의 배우들을 수소문했다.

그동안 샤를로트의 소설로 연극을 공연했던 배우들을 뉴렌달로 보내라고 말이다.

그 결과 한 극단이 수배되어 뉴렌달로 오게 되었다.

영주관 앞에 엎드려 머리를 숙이고 있는 극단 배우들의 모습에 말했다.

"너희가 왕도에서 연극을 한다는 극단인가?"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공작님.

다, 다시는 연극을 하지 않겠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공작님."

목숨을 구걸하는 극단장과 배우들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음유시인이나 이런 연극단은 유랑하며 공연을 하는 만큼 이동의 자유가 있었지만, 실상은 천민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고정된 집이나 직업이 없었기에 천민보다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귀족의 앞에, 그것도 왕국 최고 권력가인 공작 앞에 끌려왔으니 이렇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물며 그들이 공연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공작 부인이 아니었던가.

당연히 그 죄를 묻기 위해 끌려왔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라."

내 말에 극단장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어느 정도 체념한 듯한 모습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희에게 죄를 물을 생각은 없으니까."

이세계에는 아직 저작권의 개념도 없는데 죄는 무슨 죄를 묻는단 말인가?

이 극단은 샤를로트의 이야기로 공연을 하면서 귀족들 모독하거나, 샤를로트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도 없다.

오히려 연극을 통해 샤를로트의 이야기를 더 퍼트려줬으니 샤를로트도 좋아했을 것이다.

"그, 그럼 왜 저희를 여기까지···"

"너희가 했다는 연극을 보고 싶어서 말이야."

"네?"

"뉴렌달에서 연극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지. 원작자도 기대하고 있으니 좋은 연기를 펼쳐주길 바란다."

한껏 멋을 부린 귀부인들이 연극을 보기 위해 뉴렌달로 모였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임시극장이었지만, 그래도 공연을 하기에는 그 어떤 장소보다 나은 곳이었다.

'길거리에서 공연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정식으로 세트가 지어진 장소가 공연하기에는 좋지.'

그리고 공연의 완성도를 위해서 연극에 필요한 물품들도 지원해줬으니 단장은 한 치의 실수도 없도록 배우들을 준비시켰을 것이다.

"정말 제 이야기로 연극을 하는 거죠?"

기대감으로 살짝 달아오른 샤를로트의 모습에 나는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좋아 해주면 준비한 나도 기분이 좋지.'

"공작님. 공작 부인.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제 부탁을 들어 이런 공연을 준비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공작 부인께서 쓰신 소설을 공연한다니, 저는 너무 기대돼서 한숨도 못 잤답니다."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의 체스터 남작과 한껏 기대하고 있는 체스터 남작 부인의 상반된 표정을 보며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와 샤를로트가 착석하는 것과 동시에 연극의 막이 오르기 시작했다.

'어디 새로운 문화를 한번 즐겨볼까?'

만족의 미소 가득한 샤를로트나 체스터 남작 부인과 다르게 나와 체스터 남작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억지로 하품을 참는 체스터 남작을 보고 나 역시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나랑은 안 맞아. 연극은 샤를로트나 즐기도록 해야겠어.'

TV나 스크린을 통한 화려한 영상에 대한 기억이 있는 나에게 연극은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샤를로트나 체스터 남작 부인과 같은 귀부인들에게는 황홀한 연극이었는지 연신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입을 조잘거리고 있었다.

귀부인들은 모여서 다과회를 이어갈 생각이었는지 남편들을 떨어트리고는 샤를로트를 따라 영주관으로 돌아갔다.

"저는 연극보다는 축구가 훨씬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다 보니 좀이 쑤시네요."

"왕궁의 대신까지 했던 사람이 겨우 이 정도로 무슨···"

"공작님. 왕궁의 대신이라고 전부 왕궁에 박혀 있지는 않습니다."

너스레를 떠는 체스터 남작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멍하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볼튼?"

"앗. 죄송합니다. 영주님. 뭐라고 하셨죠?"

"아무 말도 안 했어."

"······"

"볼튼은 연극이 재미있었나 보군?"

"기사인 볼튼경이 이런 걸 좋아하다니 의외군요."

"아, 아닙니다. 그냥 조금···"

"연극을 좋아할 수도 있는 거지 뭘 부끄러워 하나. 다음에 또 보고 싶으면 친위대에게 내 호위를 맡기고 연극을 보러 와도 좋아.

그래. 샤를로트가 연극을 보고 싶을 때 볼튼이 호위를 해주면 되겠네."

"그렇군요. 볼튼경. 제 와이프도 같이 부탁드립니다."

"그, 그게 아니라···"

당황하는 볼튼을 놀려주며 극장의 정리를 시작한 극단장을 불렀다.

그는 만족스럽게 돌아가는 귀부인들을 봤는지 한결 편한 얼굴로 달려왔다.

"고, 공작님. 연극은 재미있으셨습니까?"

"나쁘지 않았다. 이야기를 잘 표현했더군."

"다 공작 부인께서 명작을 쓰셔서···"

원래 내가 샤를로트에게 준 아이디어는 세계 명작선에 빠지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조금 이세계에 맞게 이야기가 달라졌다고 해도 당연히 명작이 될 수밖에 없지.'

"아무튼, 공연은 잘 봤어. 앞으로 극장이 완성되면 우리 영지민들이 연극을 즐길 수 있게 부탁한다고."

"최,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샤를로트의 이야기로 연극을 할 때는 극본에 대한 저작권료를 받을 테니 그렇게 알아."

"네? 저, 저작권료요? 그게 뭡니까?"

어디서 소설 계약은 7대3 정도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연극은 어떻게 되는 거지?

"좋은 이야기를 써준 원작자에게도 보답을 해야지.

아무튼, 샤를로트도 챙겨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도록!"

극단장이 심하게 당황하는 모습이었지만, 챙길 건 챙겨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이렇게 부인을 생각해 저작권료를 챙겨주다니.

나는 정말 좋은 남편인 것 같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