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국왕이 된 보리스 왕자는 내가 베르겐의 중앙 정치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중앙의 귀족들과 왕궁 대신들의 반대와 함께 내가 뉴렌달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비추자 알겠다는 말과 함께 나를 놓아주었다.
나에게 두터운 신뢰를 보내주는 보리스에게 감사함을 담아 몇 가지 선물을 남긴 나는 서둘러 왕도를 떠나 뉴렌달을 향했다.
과거와 달라진 나의 위상 때문인지 영지로 돌아오는 과정은 편하면서도 불편했다.
영주들은 서로 나를 초대하기 위해 경쟁까지 하면서 내 편의를 봐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덴프린스의 명이었다지만, 나에게 잘못까지 저질렀던 기르만은 어떻게 해서든 나를 초대하겠다며 영지민들을 모두 동원하여 귀환하는 길을 꽃으로 장식까지 했을 정도였다.
스톨 백작과 함께하는 길이었기에 영주들의 초대를 거절하지도 못하고 전부 방문하다 보니 시간도 적잖게 잡아먹고 말았다.
"내가 영지의 전문가들에게 내 일을 나누지 않았다면 지금쯤 영지의 업무가 마비됐을지도 모르겠네."
"역시 영주님이십니다. 이런 만약의 사태를 예상하셔서 그렇게···"
오랜만에 듣는 볼튼의 찬양을 들으며 아렌달 성에 도착했다.
성 한쪽에 잘 주차해 놓았던 영주 의전차 '아렌달 원'의 모습에 스톨 백작은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내게 말했다.
"말이 끌지 않는 마차라니? 그래서 자동차라고 하는 건가? 신기하군."
"도로의 사정에 따라 제약을 많이 받기는 하지만, 스톨 영지의 도로 정도는 문제없이 달릴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뉴렌달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달려본 이후 스톨 백작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얼마면 되는가?"
베르겐 최고의 얼리어답터 스톨 백작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신제품을 구매해 주었다.
베르겐에서 스톨 백작 이상의 광고판은 없을 것이다.
이 사람만큼 여러 곳을 다니는 사람도 없으니까 말이다.
'정말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장인어른이란 말이지.'
다시금 샤를로트와 결혼하기를 잘한 기분이었다.
스톨 백작이 금방 돌아가기로 했기에 가족들이 모여 그의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다.
그런데 스톨 백작이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뉴렌달의 영지민들은 영주를 닮아서 그런지 너무 일만 하는군."
"다른 영지의 영지민들보다는 근면한 편이죠."
내 말에 스톨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근면하기는 하지만 도시가 재미가 없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버지께서 느끼기에는 웬만한 곳은 다 그렇지 않나요?"
"음- 그것도 그럴 수 있지만, 그래도 뉴렌달은 도시의 규모나 발전도에 비해 너무 즐길 거리가 없구나."
"바다와 다른 곳에는 없는 특산품도 많고, 콘크리트 건물로 이루어진 도시의 외관도 특이해서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내 말에 샤를로트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하지만 스톨 백작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노는 것이라면 베르겐에서 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 바로 스톨 백작이 아니었던가.
그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지가 궁금했다.
"부족해. 뭔가 부족해. 너무 일만 한다는 말이야."
영지민들이 열심히 일하는 게 무엇이 잘못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느낀 게 있는데 말이네.
이 도시가 재미없는 이유는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서네."
"······"
"내가 이번에 뉴렌달에 와서 즐긴 것은 이전에 왔을 때 즐긴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네.
처음 뉴렌달에 왔을 때도, 다음에 왔을 때도, 그리고 오늘까지도 나는 똑같은 것만 보고 돌아가는 느낌이야."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그동안 바다를 보기 위해 뉴렌달에 들렀던 귀족들은 모두 만족하며 돌아갔기에 이런 이야기는 굉장히 신선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생각해보면 뉴렌달은 딱히 이벤트라는 게 없는 도시였다.
영지민들이 근면하게 일하는 만큼 쌓인 스트레스를 풀 만한 축제나 이벤트가 없었다.
그동안 뉴렌달에서 일어난 이벤트라고 해봐야 처음 식당을 열어주기 위해 기획한 요리 대회와 아리아의 탄생을 기념하며 모든 영지민에게 휴식을 준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영지민들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이벤트를 만들어야 하나?"
막상 이벤트를 만들려고 하니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대부분 영지에서 축제를 벌이는 것은 추수가 끝난 이후였다. 농사를 끝낸 기념으로 영주가 영지민들을 풀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뉴렌달은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곳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특별한 농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축제는 조금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럼 특산품을 주제로 한 축제는 어떨까?"
영지의 특산품 중 축제 거리로 만들기 좋은 것은 단연 해산물이었다.
"이건 괜찮아 보이는데."
뉴렌달은 바다를 가진 유일한 장소였으니 해산물 축제를 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걸로 영지민들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을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해산물이야 먹고 싶을 때 먹자골목에 가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왕도나 다른 영지에서처럼 해산물이 비싼 것도 아니었으니 영지민들에게는 특별함이 덜한 느낌이었다.
다른 영지에서 축제를 보기 위해 관광이라도 오면 좋겠지만, 뉴렌달까지 관광을 올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귀족들과 일부 돈 많은 상인뿐.
"부족해. 뭔가 부족해."
어느새 나도 스톨 백작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현대 지구에서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했던 게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여행?"
이세계에서는 불가능 한 일이다. 뉴렌달의 영지민들은 대부분 이주의 자유가 있는 평민들이지만, 그것도 내가 허락을 해줘야 하는 것.
아무리 내가 좋은 영주님이라고 해도 사람이 곧 노동력인 이세계에서 그냥 영지민들을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게임은?"
간단한 보드게임 정도는 만들어서 퍼트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쪽으로는 문외한이라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또··· 뭐가 있더라···"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매일 새벽에 출근해서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했는지.
"아! 해외 축구를 봤지."
밤늦은 시간에 맥주 한 캔을 따서 잉글랜드 프로축구를 보는 게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해외파 선수들의 활약 덕분에 거의 매일 같이 중계를 해줬기 때문에 자주 봤었던 기억이 있다.
"스포츠!
도시의 영지민들에게 스포츠를 즐길 수 있게 만들어주면 어떨까?"
생각해보면 스포츠는 3S 정책 중에 하나로 들어가는 부분이었다.
영지민들에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스며들지는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래 봬도 축구의 룰을 꽤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음- 칼초와 비슷한 놀이군요."
"칼초?"
"어린애들이 이렇게 둥근 물건을 발로 차면서 노는 놀이입니다."
발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공을 발로 차는 놀이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놀이였으니까 충분히 이세계에서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역시 어떤 룰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공을 던져놓고 차고 뛰어다니는 게 전부인 놀이였다.
승패를 가르는 경기가 아니었다.
스포츠에서 중요한 것은 경쟁을 통해 승패를 가르는 것.
"이 축구라는 게임을 일꾼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이죠?"
"그래. 다들 어렸을 때 칼초로 공을 차본 경험이 있다면 금방 룰을 익힐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이걸로 일꾼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줄 수 있다니. 일꾼들의 작업 능력도 좋아지겠군요."
발더를 통해 건설 노동자들에게 축구를 전파하면서 상업지구와 제철소, 그리고 농부들에게까지 골고루 전파가 되도록 조치했다.
룰이 없을 때는 어린애들의 놀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지만, 축구의 룰이 생기면서부터 이건 어른들의 놀이로 금세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추수가 끝나고 영지에 여유가 생기는 시기에 각 산업 분야에 한가지 공지를 보냈다.
아렌달 공작배 축구 대회를 개최한다.
영주의 이름이 걸린 대회의 소식에 영지는 난리가 났다.
요리 대회 이후에 몇 년 만에 생긴 대 이벤트에 영지민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거기에 대회를 위한 새로운 건축물도 지어지고 있으니 이 대회가 결코 가벼운 대회가 아니라는 것을 영지민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열광적으로 반응할 줄은 몰랐는데요. 이러다가 사고가 나는 것 아닙니까?"
"사고가 나지 않도록 관리를 해야 하는 게 행정가들의 일이지.
정 안되면 영지군에 지원 요청이라도 해."
"그래도 됩니까?"
"안 될 건 뭐야? 도시의 치안을 위한 일인데."
"알겠습니다."
한시름 놨다는 표정을 한 리오가 안도의 한숨을 쉴 때 집무실의 문을 열고 헤돈이 들어왔다.
"헤돈이 연락도 없이 영주관에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그건 아닙니다. 그저 영주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부탁?"
"예. 영주님."
부탁이라는 말에 헤돈을 바라보자 헤돈이 자신도 어이가 없었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영지군 병사 녀석들이 자신들도 축구대회에 참가해도 괜찮은지 영주님께 물어봐 달라고 해서···"
"아-"
"죄송합니다. 어디서 배워 왔는지 모르겠지만 영지군에도 지금 축구가 유행해서 다들 축구대회에 관심이 많습니다."
군대하면 축구 아니었던가.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는지.
나는 헤돈의 말에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딱 한팀. 영지군은 딱 한 팀만 참가하는 거야."
영지군의 참가 소식에 다른 산업 지구들 역시 최정예 선수들을 추려 참가를 신청했다.
상인 길드의 후원을 받아 연합을 맺은 상인팀이나 제철소와 대장간의 마초들뿐만 아니라 압축된 노동근으로 무장한 건설 노동자들에 태양 빛을 받아 검게 그을린 농부팀, 뱃사람들이 모인 어부팀 등 각자 자신들의 산업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모여 팀을 꾸렸다.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 역시 새로 완공된 축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우승은 제철소의 마초들 아니겠어? 그들의 근육을 보라고 몸싸움 자체가 안될 텐데."
"쯧쯧쯧. 맨날 앉아서 망치나 두드리는 사람들이 힘은 무슨 힘이야. 흔들리는 배 위에서 그물을 당기는 어부들이야 말로 진짜 힘쓰는 사람들이지."
"둘 다 하나도 모르는군. 상인 길드의 후원을 받으며 체계적으로 훈련한 상인팀이야말로 진짜 우승 후보라고."
저마다의 예측을 놓고 응원하는 영지민들을 보며 행정관들에게 말했다.
"저러다가 흥분해서 싸움이 날 수도 있으니까 관리 잘해. 안전요원으로 투입된 영지군들도 혹시 사고가 나지 않도록 잘 관리하고."
"알겠습니다."
엄선된 8개의 팀이 응원을 받으며 축구장으로 입장했다.
각자 산업의 특색이 보이는 의상과 외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나는 진지한 모습을 연출하며 그들의 앞에 섰다.
"잘 모여주었다.
오늘 축구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팀에게는 상금과 함께 약속했던 혜택을 주도록 하겠다."
내 말에 선수들의 얼굴에 긴장감과 기대감이 떠올랐다.
몇 년 전 요리사들이 보여주었던 것과 닮은 얼굴에 나는 웃으며 소리쳤다.
"그럼 아렌달 공작배 축구대회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