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오! 오랜만이야 촌장. 그동안 잘 지냈어?"
"영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해주시는데 어떻게 잘 지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행이네.
근데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 촌장의 모습에 위아래로 살펴보자 촌장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뉴렌달로 이주한 이후로는 농사보다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글자를 배우는 것도 무서워하던 촌장이 공부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배워온 농사법이나 영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농법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려면 조금이라도 공부를 해야 하더군요.
그러다 보니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되어서 지금은 농사보다는 공부에 더 열중하고 있습니다."
촌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농사 전문가로 촌장을 불러온 것이 아니었다.
촌장 외에도 스미스와 자크, 발더, 헤돈, 자하 그리고 리오까지 예전 아렌달 영지의 주요인물들을 비롯해 상인 길드장, 병원장, 조선소의 선목장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부 인물들은 이런 대회의는 처음이라 조금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런 자리에 참석했다는 사실에 살짝 흥분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해 볼까?"
"방금 설명한 전문학교의 경우 영주님의 뜻에 따라 새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계획입니다.
그래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전문학교의 교수로 임명하려고 합니다."
이미 영지에서는 기초교육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전문학교의 개념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중에서도 전문학교의 교수로 뽑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혹시 교수가 된다면 열심히 인재들을 키워주길 바란다."
그 말에 촌장을 비롯한 기술자들이 기대에 찬 얼굴을 보여주었다.
영주에게 직접 자리를 임명받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다들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스미스."
"네. 영주님."
"이제 제철소는 다른 사람에게 물려줬으면 해."
내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스미스에게 모였다.
아렌달 영지의 작은 대장간에서부터 지금의 제철소까지 스미스가 어떻게 이끌어왔는지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은퇴를 했어도 진즉에 했어야 하는 스미스의 나이 때문에 대부분 내 결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 스미스는 아직 더 일할 수 있습니다."
그 모습에 자크가 나서서 말했지만, 오히려 스미스가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왕도에서 영주님을 만난 덕분에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망치를 놓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옛날처럼 모루를 때리려고 해도 잘 안 되더군요."
"···스미스"
"이제 저도 망치를 놓고 쉴 수 있겠군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영주님."
스미스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담담하게 은퇴를 말하는 스미스에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제철소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라고만 했을 뿐이다.
"누가 쉬래?"
"······네?"
"제철소만 물려주라고. 스미스는 새로 만들어지는 전문학교의 학교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 말에 스미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스미스는 절대로 망치를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영지에서 스미스보다 많은 제자를 키운 사람이 있던가?
스미스가 키운 제자들 중에 우리 영지에서 한자리 차지하지 못 한 사람도 없어.
그건 스미스가 기술자로서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굉장히 뛰어나다고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여, 영주님."
"망치를 놓겠다니 무슨 소리야.
내가 강제로 놓으라고 해도 도시 구석탱이에 숨어서 모루를 때릴 사람인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그 말에 스미스가 환하게 웃었다.
스미스는 아마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할 때까지 일할 것이다.
나 역시 스미스에게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혼자 그만둘 생각 하지 마. 나한테는 아직 그대가 필요하니까."
오랜만에 하는 영지 회의여서 그런지 조금 지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분 덕분에 내가 잠시 동안 얼마나 무리를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많은 걸 다 관여해서 이끌어 가려고 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알겠네.'
샤를로트가 제때 나를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나 스스로 폭발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럼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하기로 할까?"
"알겠습니다. 오늘 회의는 이걸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리오의 말에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내게 인사를 남기며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는 상인 길드장에게 말했다.
"상인 길드장은 조금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잠깐 남아."
"저, 저만 말입니까?"
"상단들에게 할 말이 있어."
내 말에 상인 길드장이 당황하며 잠시 눈치를 봤다.
하지만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결국, 떠나는 사람들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네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상단들에게 할 말이 있으시다는 건···"
지금까지 길드를 통해 상단을 지속적으로 제재해 왔기에 상인 길드장은 내 눈치를 보며 말을 끌었다.
"내가 상단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눈치를 보는 거야?
이번에는 상단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이니까 편하게 있으라고."
"상단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것이라면···"
"그동안 영지민들과 거래에 걸려있던 제약을 풀어주겠다."
"허업!"
상단들에게도 골목 상권을 풀어주겠다는 내 말에 상인 길드장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저희들도 상점을 낼 수 있게 해주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맞아.
이제 상단들도 영지와 직거래뿐 아니라 영지민들에게 자신의 상품들을 직접 판매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가, 감사합니다."
상점을 내서 영지민들과 거래가 가능해지면 영지와 협상이 아니라 직접 시장의 가격을 정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당연히 영지의 상업에 더 큰 관여를 할 수 있었기에 상단으로서는 지속적으로 바라왔던 일이었다.
"그래도 무조건 풀어주는 것은 아니야."
"그, 그렇겠죠?"
"당연하지. 기껏 키워 온 자영업자들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상단이 시장을 독점하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상단 쪽에서 원한다면 얼마든지 상점을 낼 수 있게 해주겠어.
상단의 이름을 걸고 여러 개의 상점을 내도 좋다는 말이다.
대신 상단이 내는 상점에는 자영업자들과 다르게 세금을 부과하겠다."
"세금을 말입니까?"
"상점이 일정 금액 이상의 소득을 올리게 되면 세율을 더 높게 측정하겠다는 말이야."
많이 벌면 그만큼 많은 세금을 내라는 말이다.
내 말에 상인 길드장은 잠시 생각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의 상단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인 길드장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최대한 빠르게 이야기를 나누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상단에서 이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영주의 권한에 막혀있던 시장에 개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는데, 가만히 있으면 그건 상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단들이 자신들의 간판을 달고 상점을 열기 시작했다.
일종의 프렌차이즈가 생기기 시작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자영업자들도 새로운 경쟁 상대들의 등장에 긴장하면서 가게의 퀄리티가 높아지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영지민들의 소비도 다시 커지게 되면서 영지의 경제가 활기차게 뛰기 시작했다.
더위가 절정으로 치닫는 여름.
나는 지금 왕도에 와 있었다.
침울한 기운이 도는 왕도의 분위기를 씁쓸하게 느끼며, 나는 왕궁을 떠나는 관을 바라봤다.
결국, 국왕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국왕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렌달 영지는 지금의 모습처럼 발전할 수 없었겠지.'
처음 국왕이 돈을 차관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렌달 영지는 큰 공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국왕이 왕도의 백성을 나눠주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아렌달은 마을 규모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권위적이고 답답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생각해보면 내 부탁은 잘 들어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좋은 곳으로 가십시오.'
"그래도 공작이신데 정치에 너무 무관심하신 것 아닙니까?"
"정치에 무관심하다니요? 영주라면 영지를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우선 아닙니까?
그것이야말로 왕국의 정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중앙의 귀족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내가 중앙 정치에 끼어들면 자신들에게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굳이 중앙에 있지 않더라도 왕국에서 나보다 큰 영향력을 미치는 귀족은 없었다.
그때 내 말에 동의하며 한 귀족이 다가왔다.
"아렌달 공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무릇 영주라면 자신의 영지를 잘 이끄는 것이 최선이자 최고의 정치라고 할 수 있죠."
체스터 후작이었다.
"아렌달 공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체스터 후작님. 요즘 체스터 영지의 발전 속도가 엄청나다고 들었습니다.
체스터 남작에게 들었는데, 곧 새로운 영주성도 만든다지요?"
"그래도 아렌달이나 스톨만 하겠습니까?
발전이라고 해봐야 겨우 아렌달을 모방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전에 체스터 남작을 통해 보내주신 선물은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다음에 뉴렌달에 오시면 잘 대접할 테니, 기회가 되면 시간을 내주시길 바랍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뉴렌달의 발전을 직접 보고 싶었는데 최대한 빨리 시간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체스터 후작에게는 나쁜 감정이 조금 있었다.
벨파스트 후작을 축출할 때 태클을 걸었던 사람이 체스터 후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 체스터 후작이 아들을 통해 꾸준히 보내고 있는 인사와 선물에 그때의 감정은 싹 녹아 없어졌다.
오히려 꾸준하게 뉴렌달을 보고 배우고 싶다는 그의 요청에 호감도가 많이 올라가 있었다.
"대영주님들께서 여기 모여 계셨군."
"스톨 백작. 오랜만입니다."
"백작이라니. 이제는 전 백작이라고 부르셔야지요."
"아- 그랬지요."
체스터 후작의 말에 스톨 백작, 아니 전 스톨 백작이 미소지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공작님의 걱정 덕분에 잘 지냈네."
"다음에 뉴렌달에 오시지요. 아리아가 얼마나 잘 걸어 다니는지 모릅니다."
"허허허- 벌써 그렇게 컸단 말인가?"
활짝 웃은 스톨 백작의 모습에 나 역시 마주 웃었다.
내 장인어른이었지만 정말 신기하고, 또 신기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영지의 관리를 자식에게 맡겼다고 하지만, 작위까지 선뜻 넘겨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기력이 다 떨어져 그런 게 아닐까 했는데, 왕도나 지방 영지들을 순회하는 모습을 보면 그냥 자신이 놀러 다니고 싶어서 그런 것이 분명했다.
샤를로트도 그 모습에 스톨 백작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고 내게 조언할 정도였다.
"음- 국왕 폐하의 즉위식이 끝나는 대로 뉴렌달에 가야겠군."
"그럼 제가 타고 온 자동차를 타고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뉴렌달에서 내 주머니를 열기 위해 또 재밌는 걸 만들어 냈나 보군.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