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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현대인-57화 (57/169)

57화

베르겐 왕국의 상단들은 지금이라도 뉴렌달에 입성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그런데 아직 아렌달 성의 복구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아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전부터 뉴렌달에 들어와 있던 상단들은 덕분에 경쟁 없이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이른바 꿀을 빨고 있다는 것이지."

역시 그중 선두에 있는 것은 리비아 상단과 울드 상단이었다.

도시에 큰공사가 끝났다고 하더라도 투자 귀족들의 마을 건설이 계속되고 있기에 리비아 상단은 끊임없이 자재를 대면서 이득을 취하고 있었고, 영지의 특산품인 커피와 초콜렛의 원자재를 가지고 오는 울드 상단 역시 독점적으로 이득을 취하며 세를 불렸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 두 상단은 베르겐 왕국의 5대 상단 중 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대단한 상단이 되어있었다.

이번에 길드를 함께하는 상단들 역시 그동안 영지와 거래하며 많은 이득을 남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영지와 거래하는 것을 넘어 영지민들의 주머니를 털기 위해 나에게 권리를 주장하고 있으니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동안 상업을 키우겠다고 너무 상단의 뒤를 봐준 걸까?

영지와 우선 거래권도 줬고, 일찍 거래를 시작한 만큼 세금도 많이 감면 해줬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영지민들이 부유해지는 만큼 자신들의 힘이 줄어든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 아닐까요?

지금까지 우리 영지민들 만큼 재산을 가진 백성들은 없지 않습니까?"

"그게 자기들이랑 무슨 상관이야? 상인이나 일반 영지민들이나 똑같은 백성 아니야?

그런데 같은 백성들이 재산을 가지기 시작하니까 배알이 꼴린다 이건가?

자기들이 귀족이야 뭐야?"

지금 시점에서는 귀족들도 내 앞에서 저렇게 자기들 권리를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귀족들도 안 하는 짓을 상인들이 하고 있네."

"그래도 영지가 원활히 돌아가기 위해서는 상인들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한번 상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시는 게···"

"음- 리오. 혹시 상인들한테 뭐라도 받아먹은 거야?"

"네?! 받아먹다니요? 그런 것 없습니다."

당황하는 리오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 생각이었어."

리오의 말대로 영지에는 아직 상인들의 도움도 필요하다. 그들이 외부에서 물건을 들여와 주지 않으면 영지의 생산력이 무너질 수도 있었으니까.

사실상 영지의 특산품 중에 처음부터 직접 생산이 가능한 것은 소금과 해산물뿐.

나머지 특산품들은 거의 2차 가공을 거친 물건들이었다.

'아마 상인들도 그것을 아니까 목소리를 내는 것이겠지.'

어쩌면 귀족들보다 더 상대하기 귀찮은 게 상인들일지도 몰랐다.

상인들에게는 귀족처럼 타고난 배경이 만들어준 힘이 아닌 스스로 얻어내고 길러온 힘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은 하지 않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곳의 권력자는 나였으니까.

"그동안 저희 상단들은 아렌달 영지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해 왔습니다.

부족한 건설자재를 가져왔으며, 특산품이 되는 중앙대륙의 상품들을 들여왔고, 영지에서 생산하는 상품들을 왕도와 다른 영지에 가져다 팔면서 영지의 경제가 원활하게 흐르고 성장할 수 있게 도왔다는 것은 공작님께서도 모르시지 않을 겁니다."

길드의 대표로 발언하는 리비아 상단주의 말에 다른 상단의 관계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들이 지금까지 영지를 위해 얼마나 노력해 줬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공작님께서는 그동안 저희가 한 노력은 뒤로한 채 영지민들만 위하며, 저희의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상단들의 권리라고 하면 무엇이지?"

"당연히 거래에 대한 권리입니다.

영주님께서는 저희 상단들이 영지에 들어올 때 분명 거래에 대한 권리를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자영업자들이 하는 영지민과의 거래를 저희 상단들에게는 인정해주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저희 상단들에게도 영지민들과 직접 적으로 거래를 하며 자영업자들과 경쟁할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상단이 들여오는 물건들은 영지에서 다 사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굳이 영지민들과 직접 거래를 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그것은 저희도 아렌달 영지의 일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아렌달 영지의 일원으로서 자영업자들과 차별 없는 기회를 영주님께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상인답게 아주 유려한 말솜씨였다.

분명 영지에 들어올 때 거래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기도 했고, 그동안 상단들이 해온 일도 있으니 그들 역시 영지의 일원이라 주장할 만했다.

하지만 이것은 말장난이나 마찬가지의 말들이었다.

나도 나름 수년간 영지를 경영한 사람이다.

이정도의 교묘한 주장에 흔들릴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다.

"리비아 상단주. 베르겐의 다른 영지 중 상단이 영지민들과 직접 거래를 하는 영지가 있던가?"

"왕도에서는···"

"왕도는 왕도지, 영지가 아니잖아?

내가 알기로는 그 어떤 영지에서도 상단과 영지민들이 직접 거래를 하는 영지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

당연한 말이다.

우리 영지를 제외한 그 어떤 곳도 영지민들이 개인 자산을 들고 있는 영지는 없다.

뉴렌달로 본거지를 옮기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영지 역시 영지민들의 생활은 영주가 봐주었지, 영지민들 스스로가 생활에 필요한 용품들을 거래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상단들은 영지의 일원이라고는 하지만, 완전히 영지에 귀속된 존재들은 아니잖아?"

"그 말씀은 저희가 그동안 아렌달 영지와 함께한 시간을 무시하시는 말씀 아니 십니까?

저희 상단들이 일반 영지민들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공작님께서 이렇게 차별을 하시니 저희로서는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감정을 호소하는 리비아 상단주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리고 저희 상단들은 편의를 봐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영업자들과 공정한 경쟁할 기회를 달라는 것뿐입니다.

그동안 저희 상단들이 공작님을 위해 일해왔던 것을 생각해주십시오."

리비아 상단주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넘어갈 뻔했지만, 나는 넘어가지 않았다.

"세금이야 상거래를 하면서 당연히 내야 하는 것이고, 그동안 내가 혜택도 엄청나게 줬잖아?

상단이 영지민보다 세금을 많이 낸다고 주장하는 건 너무 웃긴 말 아니야?"

"······"

"그리고 상단이 쪼잔하게 자영업자들하고 경쟁하겠다니···

어디 보따리상도 아니고, 수만 셀링을 거래하는 상단으로서 그게 맞는 말이야?

부끄러워하라고."

내 질책에 리비아 상단주를 비롯한 상인들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이야기에 실망한 모습이었다.

"곧 아렌달 성의 공사가 끝나면 기다리고 있던 상단들이 들어올 거야.

경쟁하고 싶으면 그들과 해.

그리고 지금까지 상단들에게 주던 혜택도 내년부터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고, 공작님!"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는 다 죽으라는 말씀 아닙니까?"

"겨우 그 정도로 죽을라고?

조금 전에 공정한 경쟁을 할 기회를 달라고 하지 않았나?

공정한 경쟁. 그건 체급이 맞는 상단들끼리나 하라고.

괜히 영지민들의 주머니를 털어먹으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내 결정에 상인들이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괜히 나를 들쑤셨다가 그동안 받아왔던 혜택만 잃어버린 꼴이 되었다.

"그래.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나에게 한 방 먹은 상단들은 곧장 대응을 시작했다.

"길드를 조직한 상단들이 담합 해서 영지에 들어오는 물량을 확 줄여버린 듯합니다."

"지금 영지에 남아있는 재고가 얼마나 되지?"

"영주님께서 말씀하신 이후에 재고를 쌓아두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이 상황이 계속되면 뉴렌달 브랜드에 문제가 생길 수는 있습니다."

상인들이 나에게 대응할 만한 방법이랄게 고작 그 정도인 것이다.

'어쩔 수 있나? 그 이상의 대응을 했다가는 목이 날아갈 텐데.'

"상인들을 전부 잡아들일까요?"

"외부에서 물품을 못 구해서 들여오지 못했다는데 무슨 이유로 상인들을 잡아?"

"괘씸하지 않습니까?"

"괘씸죄로 잡아들일 거면 이런 대응을 하기 전에 잡았어야지."

철저한 신분제도 아래서 영주에게 이 정도의 대응을 했다는 것도 큰 결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단에 손뼉을 쳐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리오. 행정관 중 일부를 뽑아서 길드에 대한 감사를 시작해."

"저번에 말씀하신 그것 말입니까?"

"그래. 길드 쪽에서 먼저 빌미를 줬으니 잡아야지."

영지의 감사에 털리면서도 상단들은 들여오는 물량을 늘리지 않고 있었다.

"영주님. 이제 슬슬 재고가 바닥이 날 것 같은데요?"

"아직 반응 없어?"

"슬슬 기미가 보이지 않겠습니까?"

영지의 특산품 중 커피와 초콜릿의 주 소비자들은 귀족이다.

귀족들이 그동안 즐기던 기호품들이 갑자기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난리가 난다.

그렇다고 현재 왕국에서 나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귀족은 없다.

그럼 귀족들은 그 책임을 누구에게 지우게 될까?

어쩌겠는가? 이세계의 신분 사회에서 상인들은 결국 귀족들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울드 상단을 시작으로 길드의 상단들이 백기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영주님. 그냥 상단들을 제압했어도 되는 것 아닙니까?

어차피 그들을 대체할 상단들은 많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먼저 길드를 만들어줬잖아?"

내 말에 볼튼은 이해가 안 되는 눈치였다.

"힘으로 길드를 제압했으면 기껏 만든 길드가 와해 됐을걸?

그럼 상단들을 관리하기 귀찮아져. 하나하나 상단을 터는 것보다는 길드를 털어서 한꺼번에 관리하는 게 영지로서는 편하다는 말이다."

"그런가요?"

"이제 우리 영지는 급속도로 성장할 거야.

그만큼 외부에서 들어오는 상인들도 늘어나겠지.

그런데 그들을 일일이 관리하기에는 영지에 관리자가 없어.

물론 영지를 관리하기 위한 행정가를 키워야 하겠지만, 당장에 밀려오는 상단들이 훨씬 많을 거라고.

그래서 관리를 위해 한곳에 몰아넣을 필요가 있다는 말이야."

앞으로 외부의 상단들이 밀물처럼 몰려오기 전에 영지의 시스템을 확실하게 잡아놔야 했다.

그리고 영주가 만든 수직적인 길드보다는 같은 상단이 만든 수평적인 길드가 있는 것이 그들을 더 빠르게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살기 위해 상단들끼리 알아서 경쟁하겠지.

앞으로 담합이나 독점만 할 수 없게 관리하면 영지의 상업은 길드의 아래에서 알아서 굴러갈 거야."

"만약에 문제가 생기면 길드만 털면 되는 것이고요."

"그렇지. 나는 길드만 털면 되는 거지."

아렌달 성의 복구와 함께 영지의 인구가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밀려드는 사람들에 체스터 남작을 비롯한 귀족들이 나에게 관리를 요청할 정도였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상단들은 이미 자리를 잡은 기존의 상단들과 경쟁하며 내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내 주머니를 채워주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덴프린스 공작이 가지고 있던 자원들이었다.

"마나석은 잘 들어오고 있나?"

"네. 마나석을 비롯한 과거 덴프린스 영지에서 생산되는 자원들은 모두 문제없이 영지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덴프린스 영지는 왕국령으로 귀속됐지만, 그곳에서 나오던 자원들의 권리는 내가 차지했다.

그리고 덴프린스에게 넘겨주었던 바깥 영토의 자원에 대한 권리도 나에게 돌아왔다.

자원을 독식하는 내게 약간의 반발은 있었지만, 결국 내가 차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덕분에 마나석 수급이 좋아지면서 마탑도 다시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솟아오르는 불기둥만 봐도 마탑에 얼마나 활기차졌는지 알 수 있었다.

"잠깐만···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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