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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현대인-55화 (55/169)

55화

덴프린스 공작은 과연이라고 불릴만한 태도로 끌려왔다.

아니 끌려왔다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왔다.

'아직 정신을 못차린 거야? 아니면 원래 저런 거야?'

덴프린스와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오히려 신기한 모습이었다.

"힘을 숨기고 있었군."

"다들 그렇지 않나?

그냥 나는 너와 다르게 열심히 우물을 판 결과라고 생각해.

어때 네가 가진 우물이 다 말라버린 기분이? 이제는 스스로 우물을 파고 싶어도 기회가 없네."

내 말에 덴프린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거야 뻔한 것 아닌가?

그래도 네 이야기는 확실히 들어줄 테니 억울해하지 말라고."

사냥 대회에서 부상을 입은 국왕은 딱 목숨만 붙어 있을 정도로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베르겐의 국왕이었기 때문에 목숨만 붙여 놓았던 것이다.

"국왕을 죽이면 반역이 되니까 반역자의 타이틀을 피하기 위해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유지해 놓은 거겠지."

그러다가 국왕이 픽- 하고 죽어버리면 그때 일을 치러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보리스 왕자가 있기는 해도 아직은 어렸고, 왕도에서 가장 큰 세력은 덴프린스 공작의 세력이었으니까 말이다.

덴프린스는 여전히 당당했다.

그동안 덴프린스가 살아온 환경이나 모습을 떠올려보면 그가 왜 이렇게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겁쟁이인 네가 왜 이렇게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인지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덴프린스 공작. 너는 네 배경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거냐?

"무슨 소리지?"

"베르겐 왕가의 혈통. 덴프린스라는 대영지의 적통.

공작이라는 작위와 함께 대영지가 가지고 있는 생산력.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권력.

이 모든게 네 자신감의 근원이 아닐까 생각해봤어."

"······"

"네 표정을 보니 틀리진 않은 것 같네."

내 말에 덴프린스 공작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아마 이자르 후작이 그렇게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지.

나에게 볼튼이 있다고 해도 이자르 후작이 한 수 위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고, 병력의 숫자도 아렌달과 비교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압도적이었으니까.

그러니 기회가 생기자마자 거리낌 없이 나를 공격했겠지."

국왕의 지지를 받고 새로운 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나를 제압해 자신에게로 권력을 가지고 오려고 한 것이다.

"이자르 후작은 정말 죽은 건가?"

"그럼? 그가 살아있었다면 내가 이렇게 여유를 부리며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까?"

내 말에 덴프린스가 씨익 미소지었다.

"감히 귀족법을 어기다니. 그게 얼마나 큰 죄인 줄 모르는 건가?

아렌달 백작. 너를 고발하겠다."

"···뭐?"

"귀족법에 분명 귀족은 전쟁 상황이 아니라면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네 녀석도 알고 있겠지.

심지어 네가 죽인 이자르 후작은 이 베르겐 왕국의 영웅이며, 영지를 가진 영주다.

그런 이자르 후작을 죽였으니 너는 귀족법에 따라 벌을 받아 마땅하다."

"이자르 후작뿐만이 아닌데? 하치 남작과 크리프 백작도 같이 죽었지. 크리프 백작도 영지를 가진 영주였고."

"그렇다면 네 죄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을···"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뭐?"

"그 귀족법이라는 거 말이야. 귀족들이 겁이 나서 만든 거잖아?"

"······"

"귀족이 잘못됐을 때를 대비해 살길을 만들어 놓은 게 귀족법 아니었나?

귀족을 죽여서는 안 된다.

영주에게 영지의 권리를 빼앗더라도 영주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재산과 앞으로의 생활은 이전과 다름없도록 해줘야 한다.

뭐- 기타 등등 다른 법들도 있지만, 결국 중요한 건 귀족들이 뒤를 남겨 놓는 거잖아?"

내 말에 덴프린스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덴프린스에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귀족법? 그딴 거 나는 신경 쓰지 않거든."

내 미소에 덴프린스 공작의 얼굴에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중앙의 귀족들이 하나둘 왕궁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나타났다.

특히 벨파스트 후작 세력의 귀족들은 어디서 자신감이 붙었는지 미소를 숨기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이 어이가 없었지만, 그들이 왕궁에 들어오도록 가만히 있었다.

"덴프린스 공작. 리카르드 덴프린스의 재판을 시작한다."

바로 덴프린스 공작이 재판을 받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덴프린스 공작을 따르던 세력의 귀족들은 긴장된 얼굴로 자리하고 있었고, 그와 반대 위치에는 미소를 띈 벨파스트 후작 세력의 귀족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스톨 백작이나 체스터 후작처럼 중립 성향의 지방 영주들도 이 커다란 이벤트에 자리를 채워 주었다.

사실상 베일리 백작처럼 국경을 지키고 있는 영주들을 제외한 베르겐 왕국의 모든 권력자가 모여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앞으로 나가 말했다.

"리카르드 덴프린스는 국왕 폐하의 부상을 악화시켰습니다.

사냥 대회에서 충분히 치료할 수 있었음에도 국왕 폐하를 왕궁으로 모시고 왔죠.

이후 왕궁을 자신의 병력으로 봉쇄하며 국왕 폐하의 부상이 깊어지도록 방치해 현재 국왕 폐하의 건강은 몹시 위중한 상태에 빠져있습니다."

내 말에 귀족들이 반응을 보였다. 각자 세력마다 달라지는 표정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는 반역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리카르드 덴프린스가 자신이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이 같은 일을 행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다!"

"아직 너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익!"

처음 맛보는 굴욕에 덴프린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의 얼굴을 뒤로하고 고개를 돌려 말했다.

"또한 그가 이자르 후작과 함께 내전을 일으키려 했음은 여기 계신 모든 귀족 여러분들이 아실 겁니다."

그 말에 귀족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나름 귀라는 게 있다면 누구나 내가 덴프린스의 침략군을 몰살시키고 이자르 후작의 목숨도 빼앗았다는 것을 들었을 테니까.

"다행히 덴프린스 군을 제가 제압할 수 있었기에 내전으로 발전하지 않고 막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그를 제압하지 못했더라면 우리 베르겐 왕국도 나르비크 왕국과 마찬가지로 내전의 고통을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르비크의 내전을 언급하자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이 동조하는 모습에 덴프린스 공작이 그들을 노려봤다. 그 눈빛에 움찔하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소수의 귀족만 그럴 뿐.

벨파스트 후작 세력의 귀족들은 기분 좋은 미소까지 그리며 덴프린스의 눈빛을 마주했다.

그러자 덴프린스 공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반역하지 않았다! 나는 친위기사들의 뜻을 따라 국왕 폐하를 왕궁으로 옮겼을 뿐이다.

또한 국왕 폐하가 위중하시기에 위협으로 지켜드리고자 왕궁을 봉쇄했을 뿐, 다른 뜻을 품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고 보니 덴프린스 공작님께서 반역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잖아?"

"국왕 폐하의 치료 역시 덴프린스 공작님이 아니라 왕궁 대신들의 책임이지."

"대신들의 책임이라니요! 말조심하십시오!"

자신의 말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에 덴프린스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또한 나는 내전을 일으키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렌달으로 들어간 병력은 아렌달에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내전을 일으켰다는 말인가!

그저 비어있던 아렌달 성에 들어가 있었을 뿐.

그 병력은 아렌달 영지의 시설이나 영지민, 하물며 병사들에게도 그 어떤 피해도 주지 않았다."

"음- 그럼 아렌달 영지는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은 것인가?"

피해를 주지 않은 게 아니라 주지 못한 것이다.

교묘하게 비틀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덴프린스 공작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국왕을 보필하지 않은 책임을 친위기사들과 왕궁에 떠넘기고, 나를 공격한 것 역시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으니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덴프린스 공작의 모습에 속으로 생각했다.

'타고난 배경에 이런 말빨로 지금의 권력을 가진 것인가? 겁쟁이는 맞지만, 머저리는 아니다?'

자신의 주장에 귀족들이 귀를 기울이자 덴프린스 공작은 나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오히려 죄인은 아렌달 백작이다!"

"?"

"아렌달 백작은 귀족법을 어기고 귀족들을 죽였다.

하치 남작과 크리프 백작, 그리고 베르겐의 영웅인 이자르 후작까지.

크리프 백작과 이자르 후작은 영지까지 가지고 있는 영주.

그런 것을 알면서도 아렌달 백작은 그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나는 이자리에서 귀족법을 어긴 아렌달 백작을 고발하겠다!"

덴프린스 공작의 말에 일부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덴프린스 공작은 기세가 오르는 듯 말했다.

"내 잘못이 하나도 없다고는 주장하지 않겠다.

하지만 아렌달 백작 역시 귀족법을 어긴 죄인. 이것은 귀족 사회에 대한 도전이며 오만이다."

귀족 사회까지 들먹이며 나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덴프린스의 화법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리카르드 덴프린스."

"나는 덴프린스 공작이다! 예의를 갖춰 말하라!"

"아니- 리카르드 덴프린스."

"이익!"

"내가 너에게 발언권을 주었던가?"

"뭐?"

"나는 너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았으니 그만 닥치고 있어."

"······"

내 말에 자리에 있던 귀족들이 일시에 얼어붙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힘을 가지고 있는 건 나였으니까.

나는 그런 귀족들을 보며 말했다.

"일련의 죄들을 물어 덴프린스 공작을 처벌하려고 합니다. 그 죄가 결코 가볍지않으니 덴프린스 공작의 작위를 파하고 그의 영지를 몰수하겠습니다."

"뭐! 이 미친 자식이!"

"그럼 귀족들의 의견을 묻겠습니다. 덴프린스 공작에게 심판을 내리는 것에 의견을···"

그 말에 벨파스트 후작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덴프린스 영지를 몰수하겠다는 말은 아렌달 백작이 집어삼키겠다는 말이오?"

"그럴 리가요. 왕국에 죄를 지었으니 마땅히 주인은 왕국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왕 폐하께 되돌려 드리려 합니다."

내 말에 귀족들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덴프린스 영지가 국왕령으로 바뀐다는 말은 왕국에 남는 땅이 생긴다는 말. 자신들에게도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변하는 귀족들의 눈빛에 덴프린스 공작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내가 누구인줄 아느냐! 나는 베르겐의 왕위계승권을 가진 왕족이며, 대영지 덴프린스의 주인이고···"

"반역을 하려고 했던 죄인이지."

"!"

"국왕 폐하와 귀족들의 뜻을 따라 리카르드 덴프린스에게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반역과 내전의 주동자인 리카르드 덴프린스의 죄가 막중하니 죄인에게 심판을 내리겠다.

리카르드 덴프린스. 마지막으로 너에게 유언을 남길 기회를 주지."

"나는 죄인이 아니다! 모든 잘못은 내가 아니라 아렌달 백작에게, 저자 데우스 아렌달에게 있다!"

발악하는 덴프린스가 안쓰러웠지만, 이미 귀족들은 덴프린스의 편이 아니었다.

그저 덴프린스라는 고깃덩어리를 나눠 먹기 위한 승냥이가 되어 있을 뿐.

"끝까지 구차하네."

"······뭐?"

"볼튼경. 그래도 공작이었던 자였으니 곱게 보내주도록."

"예. 영주님."

내 명령에 볼튼이 검을 뽑아 들었다.

파랗게 물드는 볼튼의 검에 귀족들이 놀랄 새도 없이 덴프린스는 나에게 소리쳤다.

아니 소리치려고 했다.

"사, 살려···"

설마 내가 이 자리에서 덴프린스를 죽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귀족들이 다시 한번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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