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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현대인-54화 (54/169)

54화

이자르 후작이 급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아렌달성 상공에서부터 이질적인 파동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공간이 일렁이는 것과 함께 하늘에서부터 폭발 마법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몬스터 군락을 파괴했던 것과 같은 폭격 마법이었다.

-쾅! 쾅! 쾅! 쾅!

한발 한발이 1급 마나석 1개 분량의 마나를 잡아먹는 폭격에 아렌달성이 짓이겨지기 시작했다.

"으악!"

"살려줘!"

지옥의 울부짖음과 같은 신음이 계속되는 와중에서도 나는 눈을 돌리지 않고 아렌달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데우스 아렌달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집이 폭격에 무너지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몸이 떨리고 있었다.

'기억에는 없어도 고향이라는 건가?'

탈출하려고 발버둥 치는 침략군의 모습에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비명이 잦아들 때가 되어서야 통신 마나석에 대고 말했다.

"포격 중지."

내 지시에 맞춰 아렌달 상공의 파동이 멈췄다.

"커헉!"

그리고 돌무더기 아래서 고개를 드는 인영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소드마스터가 괴물은 괴물인가 보네. 저걸 맞고도 살아있어?"

그 폭격 아래서도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는지 이자르 후작이 돌무더기 아래서 꿈틀거리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폭격의 충격에 몸이 망가졌는지 검은 피를 토해내는 이자르 후작의 모습에 볼튼에게 말했다.

"끌고 와."

"네."

팔 하나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양다리 역시 덜렁거릴 뿐인 이자르 후작은 내 앞에 끌려오고 나서도 계속해서 검은 피를 토했다.

"커헉!"

"다시 한번 기회를 주지. 남길 유언은?"

"······끄윽!"

계속해서 올라오는 찐득한 핏덩이에 이자르 후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며 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이 상황에서도 몸을 움직이는 괴물에 나는 살짝 느껴지는 두려움을 숨기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귀족은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었지. 음- 이걸 어떻게 한다?"

"······"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제는 별로 상관없을 것 같네."

그 말에 이자르 후작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내 신호를 받은 볼튼의 검이 파랗게 물들었다.

"후작도 이렇게 비참한 꼴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잖아? 그러니 자비를 내려줄게."

만약 이자르 후작이 폭격이 시작되기 전에 눈치를 채고 도망쳤다면 폭격의 범위를 피했을지도 몰랐다.

소드마스터의 괴물 같은 움직임이라면 폭격을 피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자르 후작은 폭격을 눈치채지 못했고, 우연히도 처음 폭격이 이자르 후작의 머리 위에서 시작되었다.

첫 폭격의 충격으로 이미 도망치기에 늦은 이자르 후작은 연속된 폭격에 무너지는 성벽과 함께 허물어진 것이다.

동대륙에서도 손에 꼽힌다는 강자가 오만함 때문에 검 한번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죽었다.

스톨 영지를 지나 기르만 영지로 들어가려 할 때 기르만 남작은 저항을 포기하고 내 앞에 나타났다.

공포에 절여져 길목에 나와 있던 기르만 남작은 내 모습이 보이자마자 자신이 영주라는 사실까지 잊어버렸는지 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며 소리쳤다.

"전부 덴프린스 공작의 명령이었습니다! 제발 기르만을 살려주십시오!"

"그동안 기르만 영지와 우리 아렌달 영지는 사이가 꽤 좋았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군."

"아렌달 백작님 잘못했습니다.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내려주십시오."

기르만 남작 뒤로 그의 아들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늙은 영주가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는 그들에게서 분노와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모습에 나는 씁쓸하게 말했다.

"기르만의 사정은 나중에 듣지."

"가, 감사합니다."

기르만 남작을 포함해 나와 영지군을 막아서는 영주는 없었다.

처음 기르만 남작을 그냥 내버려 둬서 저항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영주들은 그저 자신에게 화가 미치지 않도록 다들 눈치만 볼 뿐이었다.

'이렇게 쉽게 길을 열어줄 줄은 몰랐는데.

결국, 영주들은 자신의 것을 지키는 게 최우선이라는 거지.'

생각해보면 이렇게 쉽게 왕도로 갈 수 있다는 건 나에게 있어 대단한 행운이었다.

만약을 위해 달리아를 데리고 오기는 했지만, 아렌달을 벗어난 지역에는 정확한 좌표가 없다.

한마디로 아렌달성을 날려버렸던 폭격 마법은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재수 없으면 내 머리 위에서 터질지도 모르니까.'

아군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는 마법이었기에 나의 전력은 왕도를 향하는 300명의 영지군이 전부였다.

물론 마법 무기로 중무장한 300명의 영지군이 결코 작은 전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영주들의 저항을 받았다면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영주들은 길을 열어줬고, 나는 어느새 왕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봉쇄된 왕도 밖에서 랄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주님! 여기입니다!"

"랄프. 왕도의 상황은 어때?"

"그게, 지금 봉쇄된 지 며칠이 되어서 정확한 정보는 없습니다."

"그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인가?"

"상인들이 이용하는 샛길을 통해서 이야기가 나오는 게 있긴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그 정확하지 않은 이야기라도 해봐."

정확한 정보가 없더라도 대략의 사정은 알아야 했다.

괜히 왕도의 성벽을 날려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아무래도 국왕 폐하께 어떤 변고가 생기긴 한 것 같습니다."

"확실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국왕 폐하께서 덴프린스 공작과 사냥 대회를 나선 이후부터 왕도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럼 덴프린스의 반역인가?"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왕도의 정보를 얼마나 꽉 잡아 놨는지 무엇 하나 확실한 정보가 없었다.

"그런데 국왕의 상태가 이상하다면 왕국 기사단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왕국 기사단은 지금 왕궁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아무래도 국왕 폐하의 변고를 알아채고 왕궁을 빠져나온 것 아닐까요? 보리스 왕자님의 신원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 같던데."

왕국 기사단이 덴프린스와 결탁을 한 것이 아니라면 왕도에 들어가기 위해 그들의 힘이 필요했다.

왕도에서 싸움을 벌여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그들과 연락을 할 방법은 없나?"

"글쎄요. 저도 왕국 기사단과 연결된 줄이 없어서."

"왜 없어?"

"네?"

"샤를로트의 오빠인 에이스가 왕국 기사단의 부단장이잖아?"

"아!"

"최대한 빨리 수소문해서 왕국 기사단이 어느 쪽의 세력인지 알아봐. 가능하면 나와 연결될 수 있게···"

그때. 나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그리고 그 목소리 뒤로 익숙한 얼굴이 내가 인사를 해왔다.

"아렌달 백작님. 오랜만입니다."

"에이스경?"

조금 전까지 수소문해서 찾으라던 왕국 기사단이 직접 나를 찾아왔다.

"그렇다면 기사 단장인 칼릭스 백작은 국왕 폐하의 곁에 남고, 에이스경과 일부 기사들만 보리스 왕자님을 모시고 왕도를 빠져나왔다 이말 입니까?"

"그렇습니다."

"국왕 폐하의 생사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 거로군요."

내 말에 에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이 덴프린스와 사냥 대회를 즐기다가 말에서 떨어지며 큰 부상을 당했다고 했다.

'사냥 대회를 하다가 말에서 떨어지다니··· 역시 사냥 대회는 위험한 거야.'

그런데 덴프린스 공작은 그 자리에서 바로 마법사들에게 국왕의 치료를 맡기지 않고 왕궁으로 국왕을 데리고 왔다고 했다.

그와 함께 사냥 대회에 자신이 끌고 온 병력도 왕궁으로 들어와서는 국왕의 치료를 빌미로 왕궁을 봉쇄해버렸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칼릭스 백작은 급히 왕궁으로 들어가며 에이스에게 보리스 왕자를 맡으라고 이야기를 남겼다고 했다.

"사냥 대회에 국왕 폐하를 따라간 친위대 기사들은 뭘 한 거지?"

"아무래도 친위대는 덴프린스 공작의 세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친위대가 똑바로 행동했다면 왕궁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마법사들에게 국왕 폐하를 치료하도록 했겠지요."

"그럼 보리스 왕자님은 어디에?"

"왕자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제 부하들이 모시고 있습니다."

보리스 왕자에 대해서는 걱정하고 있지 않지만, 명분을 위해서는 보리스 왕자가 꼭 필요했다.

그놈의 명분 없이는 왕도를 공격할 수는 없으니까.

"그럼 지금 왕도는 덴프린스 공작 손에 넘어간 건가? 벨파스트 후작의 세력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왕도를 고스란히 넘겨준 거야?"

"왕도를 봉쇄한 것은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

"?"

"사실 왕도의 백성들은 왕궁의 이상을 전혀 몰랐을 겁니다. 아렌달에서 전투가 있었다는 소문과 함께 왕도를 봉쇄하기 시작한 것이니까요."

"아-"

아렌달 영지에서 예상치 못한 패배에 왕도를 봉쇄했다는 말이다.

거기서 이자르 후작이 당하지만 않았어도 왕도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굴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자르 후작과 침략군이 몰살을 당하자 덴프린스 공작은 왕도에 숨어 버린 것이다.

자신의 손에 국왕이 있으니까 말이다.

"겁쟁이 새끼가 국왕을 방패로 숨어있다는 말이네."

"······"

"왕도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까?"

"비밀 통로가 있기는 한데, 그곳을 뚫을 수 있을지는···"

"볼튼이 있으니까 문제없을 겁니다."

내 말에 에이스는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볼튼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스경. 왕궁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주세요."

비밀 통로 역시 기사들이 봉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실력 있는 기사들이라고 해도 소드마스터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순간에 돌파해내는 볼튼의 뒤로 마법 무기로 무장한 영지군이 왕궁을 파고들었다.

"무기를 버려라!"

"무기를 버리지 않는다면 적으로 간주하고 사살하겠다!"

영지군의 경고에 대부분의 왕궁 병사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무기를 버렸다.

하지만 덴프린스를 따르는 일부 병사들은 저항하다가 영지군의 화력 아래 목숨을 잃었다.

솔직히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정리되는 왕궁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굳이 비밀 통로로 들어올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는데.'

"덴프린스는 어디 있어?"

"아직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찾아. 그 자식만 잡으면 끝일 테니까."

그때 왕궁으로 들어간 왕국 기사단이 내게 국왕의 신원을 확보했음을 알렸다.

"아렌달 백작님! 국왕 폐하의 신원을 확보했습니다."

"국왕이 살아있었어? 그럼 덴프린스는 같이 없었나?"

"예. 덴프린스 공작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 겁쟁이 새끼가 벌써 도망친 건가?"

덴프린스를 놓치면 귀찮아진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플 때쯤 다행히도 덴프린스 역시 잡았다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영주님! 덴프린스 공작을 찾았습니다."

"그 새끼 어디 있어?"

"동쪽의 비밀 통로로 도망치려던 것을 잡아 지금 이곳으로 끌고 오고 있습니다."

"이 겁쟁이 새끼. 공작이라는 새끼가 끝까지 구차하게 구네."

조용히 있던 나를 건드린 책임은 져야지.

"어딜 도망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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