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파이어!"
침략군의 방패 위로 영지군의 화력이 쏟아졌다.
"적의 마법 무기가 방패에 막혔다! 진군하라!"
처음에는 방어 마법이 걸려있는 방패가 영지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단발성의 1차 공격에 불과할 뿐.
A2의 공격 뒤로 준비된 A3 기관총이 불을 뿜기 시작하자 공격군의 방패에 걸려있던 방어 마법이 찢겨져 나갔다.
"으악!"
"도, 도망쳐!"
앞열에서부터 화력쇼의 제물로 사그러지는 병력에 하치 남작이 검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진군하던 병사들도 뜨거운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부, 분명 왕국 군의 무기로 실험을 했을 때는 완벽하게 방어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하치 남작이 당황하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공포에 질린 하치 남작은 더 이상 병력을 지휘할 능력이 없었다.
"지, 지원군··· 이대로는 가망이 없어. 지원군을 기다려야 한다."
하치 남작의 도주에 남아있던 병력들도 일제히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쫓을까요?"
헤돈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쫓아가지 않아도 된다.
"괜히 침략군에게 뒷 길을 내줄 필요는 없지."
아렌달에서 뉴렌달로 향하는 길은 딱 하나뿐이다. 지금 나와 영지군이 막고 있는 이 도로 하나뿐.
다른 방향으로 뉴렌달로 향하려면 없던 길을 만들면서 가야 한다.
영지군에 비해 숫자가 압도적인 침략군이 굳이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덴프린스 군을 일거에 정리하려면 지원군이 다 모인 이후에 공격하는 것이 나았다.
괜히 그들을 분산시켜서 전장의 범위를 넓혀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영지군의 화력은 한곳에 모아야 더 강해지니까.
화력을 분산시켜서 침략군에게 기회를 줄 필요는 없다.
후퇴한 하치 남작의 부대와 엔나 영지를 지나 온 크리프 백작의 지원군은 내가 아렌달로 들어가지 않자 조심스레 아렌달 성을 다시 점령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아렌달 성에서 다시 뉴렌달로 진군할 계획을 짜고 있는 것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덴프린스 공작을 기다리는 것 아닐까요?"
"덴프린스 공작이 여길 올 리 없잖아?"
덴프린스는 시키는 사람이지 직접 무언가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추가로 지원군이 온다면 덴프린스 공작이 아니라 이자르 후작이 오겠지."
"설마 이자르 후작님이 직접 이곳까지 올까요?"
"그거야 모르지. 덴프린스 공작과 이자르 후작이 결탁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런데 이자르 후작이 온다고 해봐야 우리군의 화력을 막을 능력이 안 되면 진군이 불가능한 것은 마찬가지야.
자기가 소드마스터라고 무작정 달려들지는 않을 것 아니야?"
"그럼 한동안 이대로 아렌달 성을 점령하고 시간을 끌겠군요."
"그렇겠지."
아무것도 없는 아렌달 성이라고 해도 그 가치는 분명 있었다.
아무리 내가 본거지를 뉴렌달로 옮겼다고 해도 나는 '아렌달' 백작이다.
이름과 혈통을 중요시하는 귀족 사회에서 아렌달 성을 점령했다는 것은 내 명예를 짓밟고 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다른 귀족들이 보기에는 다르겠지.'
"근데 덴프린스가 군사를 움직였는데도 왕도에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건가?"
"국왕 폐하께 무슨 변고가 있다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뿐만이 아니지. 덴프린스를 견제해야 할 벨파스트도 조용히 있잖아?"
덴프린스와 벨파스트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는 나를 건드린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침략군에 새로운 지원군이 들어왔다. 이미 아렌달 성을 점령하고 있던 병력과 합쳐지니 그 수가 무려 5천명에 달할 정도로 대군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진짜로 나타날 줄이야."
"설마 이자르 후작님을 전장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적으로요. 하아-"
볼튼의 한숨에 나 역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베르겐 기사들의 우상이었던 소드마스터가 나를 심판한다는 명목으로 친히 여기까지 걸음을 해주신 것이다.
"이자르 후작까지 나타났다면 더 이상 늘어날 병력은 없겠지?"
"덴프린스 공작이 직접 군을 이끌고 오지 않는 이상 더 이상의 증원을 없을 겁니다."
"그 자식은 겁쟁이라서 여기까지 않오겠지."
"그럼 더 이상의 증원은 없겠네요."
"이자르 후작에게 메세지를 보내. 뭘 바라고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셨는지 알아야겠어."
이자르 후작의 메시지에 볼튼이 검을 뽑았다.
"제가 아렌달 성으로 가서 이자르 놈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기다려 봐."
잔뜩 흥분한 볼튼을 진정시키며 이자르 후작이 보낸 메세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니 굳이 다시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나를 향한 욕설과 비난으로 가득한 메세지였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적혀있던 샤를로트와 아리아를 향한 메세지는 읽는 것만으로도 토악질이 나올 정도였다.
"이자르 후작이 이런 사람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감히 영주님과 백작 부인, 그리고 아리아 아가씨를 모욕한 놈입니다.
영주님의 기사로서 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제가 가서 이자르의 목을 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볼튼의 흥분에 나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열이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전서를 쥔 손이 떨리고 있었으니까.
'이자르 후작. 너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 버렸어.'
"헤돈! 영지군을 진격시켜.
이자르 후작의 얼굴을 봐야겠어."
영지군이 가까이 왔음에도 이자르 후작은 아렌달 성에서 나오지 않았다.
400명을 상대로 5천명이 농성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이자르 후작은 병력을 내보내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영지군이 움직이는 것을 포착하는 순간 군을 움직였어야 한다.
이제는 성에서 나오려고 해도 집중되는 영지군의 화력에 나오는 순간 통구이가 될 테니까.
그때 아렌달 성의 낮은 성벽 위로 단단한 인상을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성벽에 오르자마자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사람이 이자르 후작인가?"
"느껴지는 기운이 이자르 후작이 맞는 것 같습니다."
"소드마스터끼리는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나 봐?"
"네. 아무래도 저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습니다."
이미 소드마스터가 된 지 20년 가까이 된 사람이다.
당연히 그 깨달음의 깊이가 볼튼과 비교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렇게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기사가 그따위 메세지를 나에게 보내다니.
"이자르 후작과 한번 직접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지?"
"영주님의 귀만 더러워질 겁니다."
볼튼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도 죽기 전에 유언이라도 들어주려고."
"······"
"내가 그따위 메세지를 보낸 이자르 후작을 살려 줄 것 같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워 죽겠는데?
이자르 후작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어."
내 말에 볼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옆을 지키겠습니다."
"생각보다 강단이 있었나 보군. 아니 그 옆에 있는 기사를 믿고 있는 건가?"
이자르 후작 역시 볼튼이 소드마스터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너는 소드마스터가 되어서 일개 영지의 신하로 남아있는 것이냐?
같은 소드마스터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군."
"이자르 후작 역시 덴프린스 공작의 개가 되어서 이곳에 있는 것 아니오?"
"크하하하-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그래 소드마스터라면 그렇게 당당하게 나와야지."
내가 옆에 있음에도 나를 개무시하며 볼튼을 떠보는 이자르 후작이었다.
"음- 이자르 후작? 뭘 바라고 여기까지 행차했는지 알 수 있을까?"
"응? 너는 무엇이냐? 어디 버러지 같은 놈이 깨달음을 얻은 기사들의 대화를 방해하는 것이냐?"
"허?"
"아~ 네가 그 주제도 모르고 설친다는 변경 영주 놈인가 보군."
"내가 주제도 모르고 설쳐?"
"덴프린스 공작이 그러더군. 변경의 시골 영주 하나가 이제 조금 살만해 졌는지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중이라고.
그래서 내가 친히 그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기 위해서 왔다.
크하하하- 이렇게 스스로 다가오다니 잘 되었군."
이자르 후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대뜸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나를 노리고 달려드는 이자르 후작의 모습에 볼튼이 화들짝 놀라며 그를 막아섰다.
"영주님. 피하십시오."
"칫-"
"도망치는 것이냐!"
내가 뒤로 물러나자 이자르 후작도 볼튼을 밀어내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
"쉽게 갈 수 있었는데 아쉽군. 쩝."
아쉬운 듯 입을 다시는 이자르 후작의 모습에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자르 후작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미친놈이 틀림없었다.
'이자르 후작은 예측하지 못할 위험이다.'
다시 아렌달 성의 낮은 성벽 위로 뛰어오른 이자르 후작은 굳어있는 내 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렇게 도망치는 꼴을 보니 웃음이 나오는군.
어차피 중앙의 귀족들은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 같으니 내가 충고 하나 해주지."
"······"
"알아서 기어라. 아니면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치던지."
이자르 후작의 말에 중앙의 귀족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실하게 알았다.
덴프린스나 벨파스트나 나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렌달 백작 부인의 외모가 아주 아름답다고 했지? 잘은 모르겠지만 글솜씨도 좋고 말이야.
백작이 원한다면 백작 부인은 내가 거둬 들여주지. 같이 죽는 것보다는 그래도 내가 돌봐주는 게 더 좋지 않겠어? 하하하-"
이자르 후작의 그 한마디 말로 식은땀이 한 번에 증발해 버렸다.
"어떤가? 백작 부인을 내게 보낼 텐가?"
"미친놈."
머리가 확 식어버리며 내가 왜 이자르 후작과 직접 대화를 하려고 했는지 다시 떠올랐다.
"세른 이자르. 기회를 줄게."
"나를 부른 것인가?"
"그래. 마지막으로 네게 유언을 남길 기회를 주겠다."
"유언? 크하하하- 유언이라고?"
"······"
"건방진 놈! 감히 내 목숨을 빼앗을 자신이 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한 번 빼앗아 보거라!"
이자르 후작은 언성을 높이면서도 즐겁다는 듯 웃었다.
역시 미친놈이었다.
"나를 어떻게 죽인단 말이냐? 그 알량한 마법 무기를 이용해서?
아니면 이 아렌달 성이라도 날려버릴 셈이냐?"
"날리지 못할 이유도 없지?"
"···뭐라고?"
"너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너무 넘었어."
내 말에 이자르 후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렌달 성은 내가 제일 먼저 좌표를 찍은 장소다."
"좌표?"
아렌달의 지도를 만들면서 중요 포인트마다 정확한 좌표를 만들어 놨다.
단순히 지도를 정확히 하기 위한 좌표만은 아니었다.
정확한 지점 포격을 위한 군사적인 목표점. 포병 출신인 나에게 좌표란 그런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
"직접 알아봐."
나는 이자르 후작의 의문에 통신 마나석에 대고 소리쳤다.
"포격 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