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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현대인-48화 (48/169)

48화

아렌달은 동대륙에서도 가장 동쪽, 몬스터의 땅과 붙어있는 영지였지만, 베일리는 외국과 접하고 있는 영지였기에 울드 상단같이 외국을 오가는 상단을 통해 제법 세금을 걷는 영지였다.

거기에 외국의 침략을 대비해서 왕국에서도 신경을 쓰는 영지였기에 아렌달처럼 버려진 영지는 아니었다.

현재는 소드마스터인 영주와 영지의 지정학적 이점 덕분에 베르겐에서도 손에 꼽히는 힘을 가진 영지 중에 하나였다.

"근데 베일리에서 여기까지 오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거야 로즈마리가 알아서 하겠죠."

"그래. 언제든 여유가 있을 때 오라고 해. 나도 베일리 가문의 사람과 인연을 만들면 좋을 테니까."

스톨 백작의 인맥으로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가.

그걸 생각해보면 베르겐과 인연을 만들면 언제라도 쓸데가 있을 것이다.

무려 소드마스터가 주인으로 있는 영지였으니까 말이다.

역시 예상대로 스톨 영지는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리고 엔나 영지 역시 내 지시를 받고 영지민들을 동원해 생산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체스터 남작도 바로 이주를 할 생각인 것 같네.

생산시설을 지어준다고 하니까 바로 제안을 받아들였어."

"체스터 남작님은 왕궁의 문관 대신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왕궁의 대신 자리를 내려놓고 이주를 한다고요?"

"처음에 투자하는 모습이나 가장 먼저 바깥 영토를 사용하려는 것 보면 꽤 도전적인 성격이잖아?

그리고 생각보다 시류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야. 어디가 자신에게 무엇이 더 이득일지 판단을 내린 거겠지."

오히려 왕궁의 대신으로 있으면서 흐름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더 확실하게 읽은 것일지도 몰랐다.

"체스터 남작이 움직이면 금방 다른 귀족들도 눈치를 보기 시작할 거야.

그러니까 체스터 남작에게 최우선으로 일감을 몰아줘."

"어떻게 말입니까?"

"체스터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까지 최대한 밀어주면서 내 쪽에 빨리 붙으면 붙을수록 큰 이득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지.

체스터 남작이 이득을 챙겨가는 걸 보면 다른 귀족들도 더 빨리, 더 많은 영지민들을 데리고 오지 않겠어?

그럼 굳이 뉴렌달의 인구가 증가하지 않더라도 풍부한 노동력을 가질 수 있겠지."

그리고 귀족들이 이주하게 되면 또 한 가지 이점이 생기게 된다.

외부와 갈등이 생겼을 때 나를 지지해 주는 세력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생활 기반이 뉴렌달의 문화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쉽게 나를 등질 수는 없을 것이다.

"최대한 이곳에 투자를 많이 하도록 유도를 해야지. 돈이든 시간이든 사람이든 말이야."

체스터 남작은 이주하자마자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지어주기로 한 생산시설이 완공되기 전부터 데리고 온 영지민들에게 뉴렌달로 가서 기술을 배워오라고 지시를 내릴 정도였으니, 그가 얼마나 이 일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추천하는 건 비누야."

"비누 말입니까?"

"그래. 비누는 생산하기 어려운 물건이 아님에도 부가가치가 높지.

그리고 지금 왕도에서 폭발적으로 소비가 늘어나는 상품이기에 단번이 이득을 내기에도 좋아."

체스터 남작의 부인이 샤를로트의 광팬이었으니 그녀도 책을 읽으며 뉴렌달산 상품을 소비했을 것이다.

당연히 체스터 남작도 그 영향으로 뉴렌달산 상품들을 많이 접했을 테니 상품의 품질이나 가치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뉴렌달이 아니라 체스터에서 만들었다고 팔리지 않으면 어떡하죠?"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확실하게 보증을 할 테니까.

그리고 만약 팔리지 않는다면 내가 전량 회수를 할 테니까 체스터 남작은 그냥 상품만 계속 생산해내면 되는 거야."

"항상 이렇게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체스터 남작이 감사의 인사를 했지만, 오히려 체스터 남작에게 도움을 받는 건 나였다.

체스터 남작이 과감하게 행동해주는 덕분에 내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내가 감사의 인사를 해도 모를 정도였다.

"아렌달 백작님.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부탁?"

"네. 백작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체스터 남작의 긴장한 얼굴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능한 일이라면 들어주지. 말해보게."

'또 샤를로트를 만나게 해달라거나 그런 건가?'

그동안 체스터 남작 덕분에 도움이 된 일도 많았기에 간단한 부탁이라면 들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체스터 남작의 부탁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렌달 백작님 밑에서 배우고 싶습니다."

"내 밑에서 배우고 싶다고? 뭘?"

내가 중앙에서 정치하는 귀족도 아니고, 나에게 배울만한 게 뭐가 있다고 이런 부탁을 하는지 듣고 싶었다.

"사실 저는 건설같이 규모가 있는 산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렌달 백작님 밑에서 일하며 배우고 싶습니다."

체스터 남작도 스톨 백작만큼이나 재밌는 인물이었다.

체스터 영지는 넓은 평야를 바탕으로 식량 생산력이 높은 영지라고 들었다.

즉, 체스터 남작은 농업을 기초로 한 영지 출신이라는 말이다.

분명 어려서부터 그런 쪽의 일들을 배웠고, 왕도에서도 문관 대신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건설이라니.

'도전적인 성격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신기한데.'

이제는 자신의 마을도 가지고 있는 귀족이 다른 귀족 밑에서 일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신기했다.

"아렌달 백작님께서는 건설의 신이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꼭 아렌달 백작님께 배우고 싶습니다."

내가 건설의 신이라니? 누가 그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그래도 무작정 받아들이기에는··· 체스터 남작이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확실하게 파악을 해야지.'

나에게 배우고 싶다는 말에 의심부터 해야 한다니 씁쓸하지만, 체스터 남작도 일단은 외부에서 들어온 귀족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덴프린스 공작과도 친분이 있는 귀족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근래에 들어 덴프린스 공작이 나를 압박하려는 움직임도 보여주고 있으니, 체스터 남작에게는 미안하지만 어느 정도 검증은 해야겠지.'

"일단은 이제 이주를 했으니 이곳에 적응하는 게 먼저인 것 같은데?"

"그, 그렇지요. 일단은 백작님께서 주신 일부터 하는 게 맞는 거겠죠."

단번에 실망하는 얼굴이 되어버리는 체스터 남작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했다.

"체스터 남작의 부탁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테니 그렇게 실망하지 말라고.

일단은 비누를 생산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부터 해야지."

"알겠습니다."

검증만 확실하게 된다면 체스터 남작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서 나쁠 게 없었다.

이래 봬도 체스터 남작은 명문가 출신의 귀족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샤를로트의 방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아직이야?"

"아이고. 영주님.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어젯밤부터 계속 이러고 있잖아?"

"백작 부인께서는 첫 아기씨시잖아요. 처음에는 다들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에요."

깨끗한 물을 준비해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산파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런 내 모습에 볼튼이 말했다.

"영주님께서 이렇게 초조하신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다들 그렇지 않아?"

"저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볼튼도 얼른 결혼하라고. 소드마스터가 된 지가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혼자야?

내가 스톨 백작님께 좋은 아가씨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해 볼게."

"리오님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결혼은 무덤이라고.

다른 행정관들도 그러더군요. '절대 하지마'라고.

될 수 있으면 최대한 오래 솔로를 즐기라고 말입니다."

"그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도 헤돈은 잘 지내는 것 같던데."

"헤돈경은 영지군의 관리 때문에 거의 집에 안 들어가십니다."

"······"

유부남들이란··· 이런 걸 보면 현대 지구나 이세계나 참으로 비슷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그때 방안에서 샤를로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기씨가 나오시려나 봅니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를 몇 분. 샤를로트의 비명 소리가 잦아들면서, "응애." 하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그리고 방문이 열리며 산파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기는? 아니, 샤를로트는 괜찮아?"

"예. 백작 부인과 아기씨 모두 건강하세요."

"다, 다행이다."

"영주님.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영주님."

"아하하하-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축하는 샤를로트가 받아야지."

아기가 태어났다는 말에도 직접 보지 않았으니 솔직히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런데 안에서부터 작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흐흑-"

"샤를로트?"

샤를로트의 흐느낌에 나는 산파에게 말했다.

"들어가도 되지?"

"예? 아기씨께서 태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안에 에일렌 있지?"

"마법사님이요?"

"응. 나오라고 해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미리 불러 놓았던 에일렌이 방 밖으로 나왔다.

"영주님 부르셨어요?"

"이거 세척 마법으로 깨끗하게 해줘."

위생 장갑과 위생 마스크. 그리고 전신에 뒤집어쓸 수 있는 위생복까지 미리 준비해 놓고 기다리던 내 모습에 에일렌과 산파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결국, 위생복으로 무장한 나는 산파의 저항을 물리치고 샤를로트의 방 안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괴상한 꼬라지를 하고 들어온 내 모습에 산파와 시녀들이 슬며시 나에게서 멀어졌고, 샤를로트도 흐느낌을 멈추고 내게 말했다.

"영주님이 되셔서 그 이상한 옷은 뭐예요?"

"만약을 위해 준비한 위생복이다. 그보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괜찮다는 샤를로트의 옆에 앉아서 그녀의 손을 잡아주자 샤를로트가 내게 말했다.

"딸이래요··· 미안해요···"

"그게 왜 미안할 일이야? 고마운 일이지.

그리고 샤를로트를 닮은 딸이면 더 좋지."

내 말에 샤를로트가 나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맞아요. 저를 닮았으면 정말 이쁘겠죠?"

"······"

오랜만에 나온 샤를로트의 도끼병에 나는 안심이 되어 웃음이 나왔다.

'아까는 흐느끼던 것 같던데. 역시 샤를로트는 샤를로트네.'

나는 샤를로트의 머리맡에 통신 마나석을 놓고 일어났다.

"이거 옆에 놓고 갈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불러. 알겠지?"

행정관들이 모여있는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리오가 내게 말했다.

"영주님도 이제 고생 시작입니다."

"내가 고생이랄게 뭐가 있나? 영주관에서 일하는 시녀들과 사용인이 있는데."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더군요."

"몰라. 나중에 생각하고 오늘은 다들 퇴근해."

내 말에 행정관들의 눈이 돌아갔다.

"그리고 외부의 급한 공사가 아니면 다들 그만 퇴근하라고 해.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정말이 십니까?"

"어. 나도 오늘은 일 안 할 거야. 아니 앞으로 며칠 동안은 육아휴직이야."

"그, 그게 뭡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영주의 명령으로 갑자기 생긴 휴일에 광장에서는 축제까지 일어났다.

멀리서 들려오는 환호 소리에 나 역시 들뜨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 내가 지켜야 할 게 또 늘었구나."

점점 무거워지는 어깨였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세계에 더 다가온 것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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