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가을이 지나 추수가 끝날 때쯤 체스터 마을에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체스터 남작이 추가 선물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투자했던 귀족들이 앞다투어 권리를 받은 영토를 개발하기 위해 찾아왔다.
물론 그들의 마을까지 같이 공사를 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했지만, 급한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
귀족들은 마을로 이주시킬 영지민 일부를 미리 끌어와 마을 공사에 투입하는 행보를 보이며 공사 속도를 올려주었다.
귀족들은 조금이라도 공사비를 아끼겠다고 마을에 들어올 영지민들에게 직접 공사를 시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중소기업에서 인력을 갈아 넣어 작업을 진행하는 것 같아 내게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나도 공사판에서 새벽에 출근해서 야근까지 몸이 갈리도록 일했는데···'
심지어 마을의 주인이 될 귀족들이 목숨줄까지 쥐고 있는 상황. 신분이라는 절대적인 벽에 반항도 못 하는 모습에 안쓰러운 마음이 살짝 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저들이 우리 영지민 대신해서 갈려 나가고 있는 덕분에 뉴렌달의 공사 상황도 좋아진 것이 사실이었다.
부족한 인력을 대체해주면서 그동안 마구잡이로 벌려 놓았던 건설 현장도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가는 모습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귀족들이 끌고 온 이주민 덕분에 제법 소득도 올리고 있었다.
마을이 완성되기 전에 살 임시 거주지를 아렌달과 뉴렌달에 마련했기에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생활비를 귀족들이 대신 내주고 있었다.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었기에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아 내 주머니를 쏠쏠하게 채워주었다.
그리고 왕도에서도 내가 기대하던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샤를로트의 이야기로 왕도 귀족 사회에 반응이 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폭발적으로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영주님. 물량이 감당 안 되겠는데요?"
"마법사들을 전부 투입해도 안 돼?"
"네. 마법의 도움을 받더라도 결국 물건을 만드는 건 사람의 손 아닙니까?
왕도에서 요구하는 물량을 맞추기에는 생산 속도가 안 나옵니다."
"어느 상품이 얼마나 모자란 건데?"
"모든 상품이 많이 모자랍니다."
"······"
왕도에서 뉴렌달산 상품들에 폭발적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특히 샤를로트의 책에 나오는 물건들이 인기가 많았는데, 아기를 가진 이후로 내가 위생에 대해서는 특히 철저하게 했기 때문인지 왕도에서도 위생용품에 대한 소비가 확 늘어난 것 같았다.
"비누 공방이나 타올 공방은 벌써 한계가 와서 이대로 있다가는 영지에서 사용할 물건들도 부족해질 것 같습니다."
"그건 곤란한데."
내가 영지에서 가장 중요하게 퍼트린 문화가 바로 위생을 청결하게 하라는 것이었는데, 정작 영지에서 사용할 위생용품이 부족해지는 일이 생긴다니.
"다른 소모품들도 지금 품귀현상이 일어나기 직전이라 이러다가는 상품들의 가격이 확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다른 소모품들은 상단을 통해 다른 영지에서 들여올 수 없나? 영지에 자금은 충분하잖아?"
내 말에 리오가 고개를 저었다.
"영주님. 우리 영지민들은 다른 영지에서 들여오는 소모품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왜?"
"우리 영지에서 생산하는 물건들의 품질이 제일 좋은데 다른 영지의 물건에 누가 돈을 쓰고 싶겠습니까?
저도 다른 영지에서 오는 물건보다 우리 영지에서 생산한 물건만 사용하는걸요."
"하- 다들 좋은 건 알아 가지고···"
우리 영지에서는 영주가 모든 물건을 배분해주던 시절은 벌써 오래전 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돈을 쥐기 시작한 영지민들이었으니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정말 사람이 부족하다는 걸 이렇게 매번 느끼게 되네."
마법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일손을 줄이고 있는 공방들이었음에도 기본적인 인력이 부족하니 소비에 공급을 맞출 수가 없었다.
"인력이 얼마나 더 있어야 소비 수준을 맞출 수 있을까?"
"적어도 수천 명 이상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수천 명을 어디서 구해?"
당장 하늘에서 필요한 만큼 일꾼이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방법이 없었다.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나를 보며 볼튼이 말했다.
"영주님. 그냥 영지에서 생산할 수 있는 만큼만 팔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 볼튼의 말대로 생산한 만큼만 파는 방법도 있지."
"그런데 왜 그렇게 고민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처럼 수요가 넘쳐날 때 공급이 막히면 어떻게 될까?"
"글쎄요."
"돈 있는 사람들은 웃돈을 주고서라도 가지려고 할 테니 가격이 오르겠지."
"그럼 더 좋은 것 아닙니까?"
"물론, 내 주머니에는 돈이 모이겠지.
그런데 영지민들은? 영지민들을 책임져야 하는 건 결국 나잖아?"
자영업자들을 제외하면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농경지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결국 나한테 임금을 받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결국, 내 주머니로 돈이 들어와도 영지민을 살리기 위해 돈을 풀어야겠지.
만약 내가 돈을 풀지 않으면 인플레이션이 온 영지의 경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겠지."
"어렵군요."
나도 다른 귀족들처럼 영지민 따위는 생각하지 말고 내 상황만 돌보면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그랬다가는 금방 과거로 돌아갈 거다.
기껏 개고생하며 문명 수준을 끌어올린 게 허망할 정도로 금방 무너져 내릴 것이다.
뉴렌달의 문화가 적당하게 왕도에 스며들기를 기대했는데, 이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킬 줄이야.
"저기, 영주님."
"뭔가 방법이라도 생각났어?"
"그냥 눈 딱 감고 다른 영지의 물건을 사들여서 왕도에 파는 건 어떻겠습니까?
다른 영지에서 만드는 거나 우리 영지에서 만드는 거나 차이가 없는 물품만이라도 다른 영지에서 가져오시는 게···"
"리오님. 그건 사기 아닙니까? 자칫하다가 영주님의 명예에 큰 흠집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영주님. 못들은 걸로···"
"아니야."
"네?"
"리오의 말대로 다른 영지에서 만드는 거나 우리 영지에서 만드는 거나 차이가 없는 물건이라면 굳이 우리 영지에서 만들 필요는 없잖아?
인력을 낭비할 필요 없이 꼭 필요한 공정에만 우리 영지민을 투입하면 되는 거지."
내 말에 볼튼과 리오가 나를 말렸다.
"영주님. 잘못하면 영주님의 명예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 그렇습니다. 영주님. 제가 괜한 말을 해가지고···
제가 한 말은 못들은 걸로 하시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죠."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른 영지에 우리 영지의 상품과 똑같은 걸 만들게 해서 상품에 대한 보증만 해주면 되는 것 아닌가?
"OEM(위탁생산)을 하는 거야. 뉴렌달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만들더라도 상품을 완전히 똑같은 공정으로 만들고, 거기에 내 이름으로 보증한다면 뉴렌달산 상품이나 다름없잖아?
물론 다른 곳에서 만들더라도 품질이 떨어지지 않게 관리를 하는 게 매우 중요하지만."
"그래도 되는 겁니까?"
"안 될 건 또 뭐야? 만드는 방법이 다른 것도 아니고, 내가 보증도 하겠다는데."
현대 지구에서도 많은 기업이 생산을 다른 업체에 맡겨서 제품을 만들고 있다.
그렇다고 그 회사의 제품이 아니라고, 사기를 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건 뉴렌달이라는 브랜드를 만드는 거야."
"과연 다른 영지에서 영주님의 말씀대로 하려고 할까요?
그건 완전히 아렌달 영지의 일을 받아서 하는 거라 다른 영주님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텐데요."
이건 영주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리오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나에게 자존심을 내세우지 못하는 영주가 있지 않은가.
"엔나 영지가 있잖아? 그리고 스톨 영지에서도 말만 하면 들어줄걸?"
"그, 그렇군요."
엔나 남작은 이미 나에게 모든 권리를 빼앗긴 사람이다. 알량한 자존심으로 버틸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기에 그냥 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생산성 없는 영지에 일감을 주겠다는 것이니 엔나 영지의 입장에서도 나쁘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스톨 백작은 자존심을 부릴 사람이 아니었을뿐더러, 지금 영지를 관리하는 라이언도 절대 내 제안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라이언은 오히려 새로운 기술을 배울 기회라고 먼저 달려들 사람이지.'
"그리고 체스터 남작이나 지금 마을을 만들고 있는 귀족들에게도 제안하면 서로 하겠다고 달려들걸?
그 사람들 대부분 급하게 들어 온다고 빚이 어마어마하잖아?
자기 영지민들을 이용해서 돈을 벌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진 않을 거야."
그들은 이제 뉴렌달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영지의 발전을 포기하고 평생 농사나 지을 생각이 아니라면 뉴렌달에서 일어나는 산업의 변화를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내가 공장까지 만들어준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남은 영지민 전부를 끌고 들어 올 사람들이야."
"저 이거 싫어요."
"그래도 몸에 좋은 거야. 임산부에게 특히 좋은 거라고."
"그래도 미끈미끈한 게 기분 나빠···"
샤를로트의 투정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일은 고기를 준비하라고 할게."
"정말요?"
"응."
"소고기 먹고 싶어요."
"알았어. 소고기로, 그것도 특A급으로 준비하라고 할게."
특A급 소고기라는 말에 샤를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미역 특유의 미끈미끈한 식감은 싫은지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런 모습을 보면 아직 어린애 같은데···'
어느새 산달이 다 되어서 엄마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샤를로트가 신기하기만 했다.
"물 가져다줄까?"
"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샤를로트에게 주자 샤를로트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거 아세요?"
"그렇게 주어를 생략해서 말하면 모른다니까."
"로즈마리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제가 쓴 글을 읽고 자기도 남편한테 심부름을 시키고 있데요."
심부름이라고 해봐야 물을 가져와 주거나 타올을 준비해주는 정도의 간단한 일이었다.
그저 집에서 약간의 손을 거들어 주는 일이었을 뿐, 진짜 심부름이라고 부를 만한 일들은 영주관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나 샤를로트의 시녀들이 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귀족이, 그것도 영주라는 사람이 해주다 보니 이런 간단한 심부름도 대단한 일처럼 알려진 것이다.
"베일리 변경백으로 시집간 동생이지? 베일리 백작의 큰아들과 결혼했다고 했던가?"
"네. 맞아요."
'그럼 베일리 변경백까지 그 책이 퍼졌다는 말인가? 여기와는 정반대에 위치한 영지인데.'
베일리 변경백까지 퍼졌다면 사실상 베르겐 왕국 전체에 뉴렌달의 생활이 퍼졌다는 말이었다.
"로즈마리가 뉴렌달에 한번 놀러 오고 싶다고 하는데 괜찮겠죠?"
베일리 변경백은 왕도를 중심으로 아렌달 영지와 정반대에 있는 영지였다.
베일리도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변경백답게 영지에서 잘 나오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이야기만 들었을 뿐 실제로 만나 본 적은 없었다.
사실 같은 변경백이라고 해도 아렌달과 베일리의 사정은 많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