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직접 찾아오라고 전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벨파스트 후작이 찾아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잘도 내 아들의 팔을 부러뜨려 놨더군."
"제 호위 기사가 조금 힘이 쎄서 말이죠."
내 대답에 벨파스트 후작이 잠시 볼튼을 바라보고는 나에게 말했다.
"그동안 잘도 비밀을 숨기고 있었어."
"아렌달 같은 변방에는 관심도 없지 않았습니까?"
내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벨파스트 후작이 입술을 씰룩였다.
"그런데 엔나 영지의 일 때문에 오신 겁니까?"
"엔나 영지 따위 어떻게 되던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럼 벨파스트 후작께서 저를 찾아올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다른 말은 하지 않겠네. 아렌달에서 움직이지 말게.
변경백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왕국을 지키라고 있는 것이라는 걸 잊지 말라는 말이네."
"그건 충고입니까? 경고입니까?"
"자네가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다르겠지."
벨파스트 후작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요."
"착각?"
"아렌달은 지금까지 외부의 일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움직이지 말라니.
벨파스트 후작께서 엔나 남작을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나는 영지에 가만히 있었을 겁니다."
"......"
"그러니 더 이상 아렌달을 긁지 마십시오."
내 말에 벨파스트 후작의 주름진 얼굴이 일그러졌다.
"참고로 이건 충고가 아닌 경고입니다."
"이 놈!"
내 말에 벨파스트 후작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검을 뽑지는 못했다.
"검을 뽑는 자는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볼튼이 먼저 검을 뽑아 기세를 뿜어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사들은 주인과 다르게 눈치가 조금은 있나 보네요.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조심해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벨파스트 후작님."
"벨파스트 후작을 너무 긁은 것 아닙니까?"
"이렇게 긁어놔야 덴프린스가 안심하고 우리를 내버려 두겠지.
나중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덴프린스 공작이라는 쓸만한 우산을 벗어날 필요는 없지 않겠어."
"그렇군요."
국왕이나 덴프린스 공작이나 내가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놔두고, 나는 멀리서 다른 이에게 휘둘리지 않을 만큼 힘을 키우면 되는 것이다.
새로운 봄과 함께 아렌달 확장 3개년 계획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시멘트의 발견과 나르비크의 내전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만한 성과를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르비크의 내전이 격화되면서 난민들이 유입되었고, 그만큼 아렌달의 인구도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르비크의 내전이 오래가지는 않겠지?"
"왕도로부터 오는 정보대로라면 곧 내전이 종식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완전히 기울어지기 시작했으니까요."
"국왕과 덴프린스도 바빠지겠네."
"한동안은 중앙에서 이쪽에 관심을 가지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리오의 말대로 중앙에서 아렌달 영지로 신경 쓸 여력은 없을 것이다. 아렌달 영지보다 외부에 더 큰 고기가 있으니 그걸 먹어치우기 위해 힘을 써도 모자랄 판이니까.
"그럼 오늘 보고는 이걸로 끝이지?"
"네. 끝입니다."
"그래. 그럼 나는 이만 퇴근이다. 나머지는 알아서 정리해."
"영주님, 오늘은 외부 시찰은 없는 겁니까?"
"오늘은 샤를로트와 약속이 있어서 시찰은 없어."
내 말에 리오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영주님. 지금을 즐기셔야 합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러면서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영주님. 결혼은 무덤입니다."
"......"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샤를로트의 표정이 안 좋았다.
"왜? 어디 안 좋아? 아니면 요리가 맛이 없어?"
"음- 아니에요."
아니라고 하면서도 스푼을 내려놓는 샤를로트의 모습에 나 역시 스푼을 내려놓았다.
"식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케이크라도 가져다줄까? 아니면 아이스크림?"
내 말에 샤를로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은 뭘 먹어도 안 될 것 같아요."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니지?"
"제가 몸 관리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아시잖아요?"
오래전부터 도시로 시집을 가겠다고 몸 관리를 해오던 샤를로트였다. 그 습관은 아직까지 빠지지 않아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있는 샤를로트였다.
평소에 이렇게 맥이 없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샤를로트가 걱정이 되었다.
걱정하는 내 모습에 샤를로트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정말로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게 아니니까요."
"······"
몸이 안 좋은 것도 아닌데 식사도 제대로 못 한다니. 뭔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샤를로트는 내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제가 기쁜 소식 하나 알려드릴게요."
"기쁜 소식이라고?"
"네. 아주 중요한 이야기니까 잘 들으세요."
"······"
중요한 이야기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샤를로트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샤를로트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저 아이가 생긴 것 같아요."
"?"
대단히 중요한 말이었지만, 머리에 남지 않는 말에 나는 샤를로트에게 말했다.
"방금 뭐라고···"
"아이가 생긴 것 같다고요. 저와 백작님의, 우리 아이요."
"!!!"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순간적으로 세상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저, 정말이야? 정말로 아이가 생겼다고?"
"네. 그렇게 좋으세요?"
"어? 다, 당연하지."
내 대답에 샤를로트가 활짝 웃었다. 그런 샤를로트를 보니 나도 모르게 광대가 올라가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더라? 내가 가진 현대 지식 중 육아와 출산에 대한 지식이 있었나?
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지?
그래! 아이가 생겼을 때는 산부인과에···
잠깐만. 이세계에 산부인과가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 그전에 산모와 아이를 위한 의료 시설이 있던가?
뉴렌달에도 큰 병원은 없잖아?'
이세계에도 나름의 의술을 가진 의사는 있지만, 체계화된 시스템은 없었다.
'산부인과는 커녕 이세계에서 어떻게 아이를 받는지도 모르잖아?
지금까지 그런 것도 모르고 뭘 한 거냐!'
사실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많은 일을 했음에도 기초 의료시스템에 대해서는 놓치고 있었다.
영지민들의 치료는 소수의 의사들과 민간요법으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고, 마법을 통한 치료도 가능했기에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영지의 식량 상태나 위생 상태가 좋아진 이후, 크게 병에 들거나 하는 사람이 없어서 의료시스템의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세계에서 한 번도 다치거나 잔병치레를 한 적이 없었지.
급하게 의료시스템의 도움을 받을 일이 없었으니, 깊이 파고들지 않았던 것도 한가지 이유겠지.'
내 주변 사람들 중 병이나 큰 부상을 당한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 이렇게까지 의료영역을 뒤로 미루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누구보다 의료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말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 아니야.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에게 좋은 일만 생기게 할까 생각하느라."
"아직 잘 태어날지도 모르는데요?"
"잘 태어날지 모른다니! 무조건 건강하게 태어날 거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알겠어요."
이세계에서는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는 것도 힘든 일이라는 걸 깜빡했다.
그리고 이곳이 현대 지구와 같이 아이를 낳기 좋은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세계에서는 어린아이까지 성장하기도 전에 죽는 아이들이 제법 많다는 사실도 말이다.
'당장 병원부터 만들어야겠다!'
항만이나 조선소 등 지금 진행하는 공사도 급하기는 하지만, 의료 시스템을 갖추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아니, 지금의 나에게는 다른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나도 내 가족을 위해 욕심 좀 부려도 되겠지? 무조건 병원부터 건설해야겠어!'
날이 밝자마자 발더가 영주관으로 불려왔다.
"아니 영주님. 이게 무엇입니까?"
"병원. 일단 생각나는 대로 그렸어."
"이 설계도를 영주님께서 직접 그리신 겁니까?"
"그래. 다른 공사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최우선으로 병원부터 지어 줘."
"아, 알겠습니다."
발더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사에 지원이 필요하면 뭐든지 말하도록. 영지에서도 최우선으로 지원을 해줄 테니까."
"······"
"무조건 빠르게. 하지만 부실 공사는 안 되는 거 알지?"
"아, 알겠습니다."
살짝 당황하며 대답하는 발더를 내보내고 생각을 해봤다.
'음-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병원을 다 지을 수는 있나?
에이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지어 놓으면 다 쓸 곳이 있겠지!'
"근데 귀족의 아이는 어떻게 교육을 받지?"
아이가 태어나도 어떻게 육아를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이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성인이었고, 영주였으니 어렸을 때 어떻게 교육을 받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이참에 교육 시스템도 확 바꿔버려?"
생각해보니 어떻게 교육을 받아 왔는지는 별로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앞으로 어떻게 교육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이전과 같은 방법을 고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지금 아렌달 영지의 교육은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공통으로 받는 교육뿐.
기초가 되는 글자와 숫자를 배우는 것이 사실상 교육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내 아이에게도 그런 교육만 할 수는 없지."
당장 초, 중, 고등학교로 이어지는 교육 시스템까지 구축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초등 교육만이라도 영지의 아이들에게 가르친다면 어떨까?
최소한의 교육을 위한 공교육 시스템을 도입할 생각이었다.
지금 있는 학교에서도 임시로 글자나 숫자를 배우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미 알고 있었다.
과거 대한민국에서도 아무리 힘들고 어렵던 시기라도 교육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수십 번도 더 들었던 이야기 아니었던가.
그 결과가 반세기 만에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틀림이 없었다.
'아이가 생기니까 그동안 놓치고 있던 게 보이네.'
"리오. 영지의 교육 시스템을 손봐야 할것 같아."
"교육 시스템이요?"
"그래. 이제 우리 영지는 어린아이들까지 일하지 않아도 문제없잖아.
앞으로 7살이 넘은 아이들은 12살까지 5년간 의무적으로 기초 교육을 받도록 할 거야."
"의무적으로, 그것도 5년이나요? 그러면 일손이 부족한 가정이 생길 수 있지 않습니까?"
"아직 힘도 없고, 성장도 끝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인 거지.
그리고 어린아이의 손까지 빌려야 하는 가정이라면, 그건 그 가정에 문제가 있는 거다.
생각해보라고. 다른 행정관이나 우리 주변의 사람들 중 어린 자식을 일터에 보내는 경우가 있어?"
"음- 없군요."
"우리 영지는 자식을 10명, 20명씩 낳지 않는 이상 부모의 역량으로 충분히 아이를 부양할 수 있는 곳이라고."
지금 우리 영지는 일자리가 많아 원한다면 누구나 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임금 역시 밀리지 않는다.
내가 임금 체불 같은 것을 절대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무 교육으로 인해 어린아이들이 담당하던 일손이 줄어들면 일자리가 생기면 생겼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교육이 미래다! 라는 말도 있잖아?"
"그, 그런 말이 있습니까? 저는 처음 듣는데···"
"있어. 아무튼,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철저하게 영지의 미래를 육성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