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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현대인-43화 (43/169)

43화

왕도에 이렇게 많은 귀족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아니 지방의 영주들까지 모두 모인 것 같네.'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나는 지금 가장 핫한 스타라도 된 기분이었다.

"아렌달 백작. 할 말이 있는가?"

"엔나 남작이 먼저 선전포고를 해왔고, 저는 그에 따라 제 영지를 방어하기 위해 군사를 움직였을 뿐입니다."

내 대답에 벨파스트 후작이 말했다.

"그렇다고 엔나 영지의 권리를 다 빼앗다니. 그건 영주가 가진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 아닌가?"

"아렌달은 그냥 영지가 아닙니다. 자치권을 가진 변경백이지요."

"그렇다면 아렌달이 가진 마법 무기가 비정상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비정상적이라니요? 부족한 영지군의 숫자를 대체하기 위해 조금 다른 무기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다른 영주들도 필요에 따라 무기를 개량하거나 하지 않습니까?"

내 논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국왕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벨파스트 후작이 국왕에게 말했다.

"국왕 폐하. 아렌달의 마법 무기는 베르겐의 위험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당장 회수하셔서 분란의 씨앗을 제거하셔야 합니다."

"벨파스트 후작. 아렌달의 무기가 무슨 위험을 불러온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아렌달은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몬스터를 막아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영지입니다.

겨우 마법 무기 몇 개 가지고 분란의 씨앗이라니? 벨파스트 후작이 나이가 드시더니 겁이 많아지셨나 봅니다."

"뭐, 뭐라고! 덴프린스 공작. 지금 나를 모욕하는 겁니까!"

"모욕이랄게 있습니까? 벨파스트 후작이 나이를 먹은 것도 사실이고, 겁을 내는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하하-"

"이익!"

나를 사이에 두고 덴프린스와 벨파스트의 세력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완전히 나를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보네.'

덴프린스의 도움이 고마웠지만, 어차피 결정은 그들이 아닌 국왕이 하는 것이다.

내가 왕도까지 온 것도 국왕이 아렌달에 대해 입을 다물게 만들기 위함이였다.

"국왕 폐하. 아렌달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른 영지와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마법 무기 또 한 그동안 아렌달에서 만들어낸 마법 용품과 다르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덴프린스 공작님의 말대로 아렌달은 영지의 특성상 언제나 몬스터에 대한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국왕 폐하께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법 무기를 만든 것은 바깥으로의 확장과 몬스터로부터 영지와 베르겐을 지키기 위함이었음을 알아주십시오."

명분으로나 논리적으로나 문제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국왕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뭔가 국왕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게 있다. 그게 뭔지 알아야 국왕이 아렌달에서 관심을 끊을 건데···'

나는 최대한 국왕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 집중했다.

"국왕 폐하. 아렌달 백작의 말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알겠다.'

덴프린스 공작이 의견을 내는 순간 국왕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국왕을 만났을 때마다 느낀 것이 있었다.

'국왕은 무능하지는 않지만, 그릇이 큰 사람도 아니야.'

쉽게 말해서 국왕은 속이 좁다. 그리고 권위적이기까지 한 사람이다.

아무리 덴프린스 공작이 그의 측근이라고 해도 덴프린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동안 왕도 정치계에서는 덴프린스 공작의 세력과 벨파스트 후작의 세력이 서로를 견제하면 성장을 방해했는데 여기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아렌달 영지의 성장이 덴프린스 공작 세력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왕도에서는 나를 덴프린스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덴프린스 공작의 세력이 저렇게 기세등등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

국왕으로서는 왕도 정치계의 균형이 깨지며 한 세력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왕의 오해만 풀어주면 충분했다.

"국왕 폐하. 잠시 폐하와 독대를 할 기회를 주실 수 있으십니까?"

내 말에 국왕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독대를 말인가?"

"그렇습니다. 국왕 폐하께 따로 드릴 말이 있습니다."

독대를 요청하는 내 모습에 귀족들이 호기심으로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덴프린스 공작도 마찬가지여서 국왕의 눈이 반짝였다.

"좋다. 아렌달 백작의 독대를 허락하겠다."

"감사합니다. 국왕 폐하."

대전을 나오는 내 뒤로 귀족들의 시선이 모였다.

"벨파스트 후작님. 이대로 국왕 폐하와 독대를 하도록 놔두실 겁니까?

이러다가 국왕 폐하께서 덴프린스 공작의 세력에 힘이라도 실어주시면···"

"시끄럽네!"

뜻대로 되지 않아 조급한 벨파스트 후작의 세력이나,

"공작님. 굳이 국왕 폐하와 독대를 시킬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명분은 우리에게 있으니 이대로 밀어붙이면 국왕 폐하께서도 넘어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렌달 백작이 생각이 있나 보지."

그래도 여유를 부리고 있는 덴프린스 공작의 세력이나, 어느 한쪽도 나와 국왕의 독대를 반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전을 빠져나와 시종이 안내해주는 곳으로 가자 다른 지름길이 있었는지 국왕이 기다리고 있었다.

"독대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왕 폐하."

"나에게 독대를 요청한 이유가 있겠지. 그 이유를 말해보게 아렌달 백작."

다시 한번 말하지만, 국왕은 그릇이 크지 않을 뿐,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대전에 모여있던 귀족들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은 국왕도 알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독대의 기회도 준 것이겠지.'

"국왕 폐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저는 덴프린스 공작의 세력이 아닙니다."

내 말에 국왕의 표정이 단번에 변했다. 그 표정 변화에 내가 뱉은 말이 정답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저는 몇 해 전 국왕 폐하께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아렌달 역시 국왕 폐하의 신하이며, 베르겐의 귀족 가문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덴프린스 공작이나 벨파스트 후작도 나의 신하라는 것은 다르지 않다."

국왕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맞는 말이라 할 수도 없었다.

"신하라고 다 같은 신하는 아니지 않습니까?"

내 말에 국왕의 표정이 조금 더 풀어졌다.

"덴프린스 공작이나 벨파스트 후작은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국왕 폐하께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음-"

"하지만 저는 어떻습니까? 제가 명예나 권력을 탐하는 것을 느끼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건···"

"저는 국왕 폐하께 약속드렸습니다.

바깥을 개발해 바다를 가지고 오겠다고.

그리고 국왕 폐하께 베르겐 역사상 처음으로 바다를 가지게 되는 명예를 안겨드리겠다고 말입니다."

국왕의 표정이 또 한 번 풀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렌달 백작 덕분에 나는 바다를 가질 수 있었지."

"그렇습니다. 아렌달이 이룬 모든 명예는 국왕 폐하의 것이지, 아렌달의 영주인 제 것이 아닙니다."

국왕을 계속해서 치켜세워주자 금방 기분이 좋아지는 모습이 보였다. 과연 속이 좁고, 권위적인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분명한 한가지는 저는 덴프린스도 벨파스트도 아닌 국왕 폐하의 신하라는 것입니다."

"···하여 엔나 남작의 처분 역시 아렌달 백작에게 맡기겠다."

"감사합니다. 국왕 폐하."

국왕은 더 이상 나를 위험요소로 생각하지 않았다. 왕도에 온 목적은 이걸로 달성되었다.

국왕의 결정에 벨파스트 후작 세력의 귀족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국왕 폐하! 너무 관대한 결정입니다."

"아렌달 백작에게 무슨 말을 들으셨길래···"

"아렌달 백작에게는 충분한 명분과 이유가 있지 않은가. 나는 그 명분을 인정했을 뿐 다른 어떤 말을 듣고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오."

국왕의 단호한 목소리에 귀족들이 움츠러들었다.

"아렌달 영지의 마법 무기와 엔나 영지와의 분쟁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도록 하겠다.

이 이야기가 더 이상 나온다면 국왕인 나의 결정에 반하는 것으로 알고,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

완전한 입막음에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왕궁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덴프린스 공작의 호출을 받았다.

"어떻게 한 것이지?"

"무엇을 말입니까?"

"국왕 폐하와 독대를 나눈 이후 폐하께서 백작의 손을 들어주었잖아?

도대체 무슨 말을 나눴길래 폐하께서 저렇게 단호하게 아렌달 백작의 손을 들어준 거지?"

"별것 없었습니다. 저에게 명분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국왕 폐하께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내 말에 덴프린스 공작이 눈을 반짝였다.

"약간의 도움? 아렌달 백작의 도움이라니, 그게 뭐지?"

"국왕 폐하께 마법 무기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내 대답에 순간 덴프린스 공작의 눈에 탐욕이 보였다.

그 역시 아렌달 산 마법 무기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 모르는 게 이상하지.'

"그 마법 무기. 나에게도 보내도록 해."

"덴프린스 공작님. 그건 곤란합니다."

"뭐?! 곤란?"

"그렇습니다."

내가 거절을 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듯 덴프린스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국왕 폐하께 드리기로 한 마법 무기만 해도 무려 20개에 달합니다.

그것을 다 생산해 내려면 생각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렌달 영지군은 모두 마법 무기를 가지고 있잖아? 일단 그 마법 무기 중 일부를 나에게 보내면···"

"아렌달은 몬스터를 상대해야 한다는 걸 덴프린스 공작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지군이 사용하고 있는 마법 무기를 보내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리고 아렌달 영지군이 모두 마법 무기를 무장하고 있다는 것은 와전된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엔나 남작의 기사단을 막는 것도 매우 어려웠습니다."

덴프린스는 의심의 눈초리를 계속 보냈지만, 일단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국왕 폐하께 약속한 마법 무기를 만든 다음은 나에게 마법 무기를 만들어 주도록 해."

"조금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아니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관없다! 시간은 얼마가 걸리던 나에게도 마법 무기를 보내라."

덴프린스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데프린스에게 마법 무기가 갈 일은 없을 것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다.

'이번엔 내가 아니라 네가 우물을 파야지.'

물론, 그 우물에서 물이 나올지 말지는 덴프린스 공작이 해결할 문제다.

덴프린스 공작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처음 보는 귀족이 앞을 막으며 다가왔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귀족에 볼튼이 나를 보호하며 귀족을 제지했다.

"멈춰라! 그 이상 다가오면 위협으로 간주하겠다."

"감히! 한낱 기사 따위가 무례하구나!"

"무례는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게 무례라고 하는 거야.

누구인지 정체도 밝히지 않고 그렇게 다가오면, 자객이라고 의심하고 주인을 지켜야 하는 게 기사가 해야 할 일이다."

내 말에 귀족이 흠칫 놀라며 입을 열었다.

"큼- 아렌달 백작님께서 중앙의 귀족이 아니라 저를 모르고 있다는 걸 깜빡했군요.

저는 클라이브 벨파스트 남작입니다. 벨파스트 후작님이 바로 저의 아버지시죠."

자신을 소개하며 고개를 한껏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니 자신의 배경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 것 같았다.

'중앙의 귀족이라는 놈들은 전부 권위적인 생각에 똘똘 뭉쳐져 있는 건가?'

"벨파스트 후작의 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유가 뭐지?

나와 벨파스트 후작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말이야?"

"관계라면 지금부터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음흉하게 말하는 클라이브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칫- 쓸데없이 시간을 빼앗겼네."

"자, 잠시만!"

나에게 무시당하자 클라이브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를 향하는 손짓을 볼튼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크악!"

볼튼에게 붙잡힌 팔을 잡고 뒹구는 클라이브의 몸부림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벨파스트 후작에게 전해.

나를 만나고 싶으면 심부름꾼을 보내지 말고 직접 찾아오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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