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나는 단 한 번도 이들에게 도시나 마을을 만들어주겠다고 말 한 적이 없다.
처음 투자를 받을 때부터 줄곧 이야기했던 것은 바깥 영토에 대한 권리뿐.
"아렌달 백작님. 그게 무슨···"
"도시나 마을의 건설은 알아서 하셔야 합니다. 물론 그 안에서 살 백성들도 알아서 데리고오셔야 합니다."
"······"
조금 전까지 함박웃음을 짓던 귀족들의 얼굴이 일시에 굳어버렸다.
"물론 제게 의뢰를 하시면 마을은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가진 건설 공법으로 뉴렌달과 같은 도시도 만들어 드릴 수 있죠."
"공짜는 아니겠죠?"
"그거야···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영지의 백성들은 모두 임금을 받고 일하고 있습니다.
영지민들에게 일을 시키는 만큼 임금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
내 말에 귀족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귀족들이 돌아가는 모습에 리오가 나에게 말했다.
"귀족사회에서 영주님의 평판이 떨어지는 것 아닙니까?"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 처음부터 땅에 대한 권리를 준다고 했지 거기에 도시를 만들어주겠다고 한 적은 없는걸.
그리고 아렌달과 뉴렌달의 영지민을 다 합쳐봐야 7천 명도 안 되는데, 여기서 어떻게 영지민을 나눠 줘? 안 그래?"
"그, 그렇긴 하죠."
어떻게 모은 백성들인데 그걸 그냥 넘겨줄 수는 없었다.
'영지민이 필요하다면 나처럼 국왕에게 빈민이라도 달라고 해야지.'
"스톨 백작님께서는 뭐라고 안 하셨습니까?"
"스톨 백작님이야 뭐- 꼬인 게 없는 사람이잖아?
그냥 나중에 자식들에게 땅을 물려줄 때 영지민도 나눠서 물려주겠데."
"와- 진심입니까?"
"놀랍지?"
스톨 백작은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샤를로트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싫어했던 이유도 아버지의 가치관이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의 딸인 샤를로트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었으니 나는 죽을 때까지 그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톨 백작은 우리 영지의 가장 큰 조력자였다.
스톨 백작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은 게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보면 스톨 영지가 아렌달과 이웃 영지였다는 건 나에게는 정말 큰 행운일지도 몰랐다.
만약 스톨 백작이 권력에 대한 욕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아렌달만큼 좋은 먹이감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되면 아마 나는 이세계에서 아무것도 못 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스톨 백작 밑으로 들어가 스톨 영지의 가신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음- 그것도 나쁘지 않았겠는데?'
스톨 백작의 재력을 토대로 공사를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여름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영지민들이 새로운 도시에 완전히 적응할 때쯤 나르비크의 내전에 다시 불이 붙었다.
"남의 불행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참 씁쓸하다는 말이지."
"그래도 챙길 건 챙겨야 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당연한 거고. 지금까지 나르비크의 난민들이 얼마나 들어왔지?"
"거의 3천 명 가까이 들어왔습니다. 이제 아렌달과 뉴렌달의 인구를 합치면 거의 1만 명에 다가갔습니다."
"아직 난민을 더 받을 수는 있지?"
"예. 아직 공사해야 할 시설도 남아있고, 뉴렌달에 빈 땅이야 많지 않습니까. 난민들에게 제공할 일터나 주거지는 문제없습니다."
겨우 2천 명밖에 안 되었던 영지민이 어느새 1만 명에 다가가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영지가 성장했다는 게 확 느껴졌다.
'갑자기 인구가 확 늘어났음에도 일자리가 있다니, 역시 일자리 창출에는 건설업이 최고라니까.'
"국왕에게 빌렸던 20만 셀링도 얼마 전에 이자까지 쳐서 다 갚았으니 영지의 자금도 문제는 없겠네."
"항만과 조선소의 공사도 곧 끝나니 앞으로는 나가는 돈이 더 줄어들 겁니다."
뉴렌달산 해산물이 왕도에서 대유행을 일으키며 엄청난 자금을 가져다 주었다.
특제 냉동 마차에 실려 왕도까지 운송해서 신선도도 매우 뛰어났기에 돈 있는 사람들은 다들 뉴렌달산 해산물을 맛보기 위해 주머니를 열었던 것이다.
그 결과 국왕에게 갚아야 할 셀링도 다 갚아버릴 수 있었다.
"참! 커피는 어떻게 됐데?"
"랄프의 말로는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국왕 폐하께서 커피를 마신다는 이야기가 돌아서 금방 유행으로 번질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 국왕이나 대신들처럼 피곤에 쩔어 있는 사람들을 집중공략 하라고 해. 그럼 커피는 무조건 유행하게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리오의 대답에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커피를 홀짝 마셨다.
커피 역시 얼마 전부터 팔리기 시작한 뉴렌달의 특산품이었다. 해산물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존의 아이스크림이나 디저트들만큼의 성과를 내주기를 기대하는 상품이었다.
"울드 상단이 다음에는 지금까지 가지고 왔던 양의 두 배를 준비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울드 상단이 요즘 열심이네."
커피는 카카오와 마찬가지로 울드 상단이 중앙대륙에서 가지고 왔다.
처음 초콜릿을 선물 받았을 때 카카오가 있으니 커피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울드상단에게 커피를 설명하고 찾아달라고 부탁했는데, 얼마 전 정말 찾아서 가지고 온 것이다.
덕분에 지금 울드 상단은 리비아 상단과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요즘 리비아 상단과 경쟁이 붙어서 그런지 이쪽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 같습니다.
지금 창고로 쓸 건물도 신청하는 걸 보면 이제는 왕도보다 뉴렌달을 중심으로 활동하려는 모양입니다."
"울드 상단은 원래부터 외국의 물건을 가지고 오는 상단이잖아?
뉴렌달의 항만이 완성되기 전에 자리를 잡으려 하는 거겠지.
창고가 필요하다고 하면 만들어줘. 대신 세금은 확실하게 받아내고."
내 말에 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거지를 제외한 건물에는 세금과 임대료가 엄청나게 부과되었지만, 그래도 상단들은 큰 반발 없이 건물을 대여하고 있었다.
오히려 돈의 흐름을 볼 줄 아는 상인들이었으니 높은 비용을 치르더라도 먼저 뉴렌달에 입성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을 정도였다.
'귀족들에게 별장을 분양하고, 상인들에게 창고를 대여해주기 시작한 이후로 주머니가 계속 차고 있는 느낌이란 말이야.
역시 대한민국이나 이세계나 재산을 불리는 데는 부동산이 제일이네. 씁쓸하구만.'
행정 보고가 끝났는데도 리오는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또 뭐가 남았나?"
"저기··· 영주님."
조심스럽게 말하는 리오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평소하고 다르게 왜 그래?"
"영주님! 저도 다른 귀족님들처럼 뉴렌달에 건물을, 집을 가질 수는 없습니까?"
"······"
내 침묵에 리오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제, 제가 감히 주제 넘치는 말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영지의 수석 행정관이라고 해도 리오는 본래 귀족이 아니었다.
그러니 스톨 백작이나 다른 귀족과 같이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불경한 행동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리오의 말에 불경함을 느껴서 침묵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분 좋은 놀람 때문이었다.
'의식이 변하고 있다.'
지금까지 평민 중에 이런 생각을 가졌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리오가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싶다는 의식의 변화를 가진 것이다.
나와 가까이 있어서 내가 가진 현대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이미 행정관으로 녹봉을 받아온 리오인 만큼 남들보다 먼저 주머니에 여유가 생겨 욕심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생각이 깊어지며 침묵이 길어지자 리오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영주님. 죄송합니다. 방금 제가 한 말은 잊어주십시오.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도망치듯 집무실을 나가는 리오의 뒷모습에 나는 그동안 놓치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맨땅에서 시작할 때부터 참 고생을 많이 했지.
외부에서 들어온 기술자들보다 먼저 챙겼어야 했는데···'
뉴렌달 북쪽에는 주거지역이 없었다.
동쪽의 농경지, 서쪽의 공장지대, 남쪽의 바닷가와 항만처럼 특색있는 지역이 아니었기에 그 지역에서 일할 영지민이 없어 따로 주거지역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그런 북쪽 지역에 얼마 전부터 새로운 공사가 시작되었다.
뉴렌달의 사람들은 새로 만들어지는 주거지역에 귀족들의 저택이 들어설것이라고 생각했다.
뉴렌달 북쪽에는 영주가 사는 영주관도 있었으니, 왕궁 주변에 귀족들의 저택이 있듯이 인근의 건물들은 귀족들에게 나눠줄 건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뉴렌달에서 첫 추수가 한창 이뤄지고 있던 날, 리오가 나에게 상자 하나를 가지고 왔다.
"영주님. 스미스님이 영주님께서 의뢰하신 물건이 완성됐다고 보내 왔습니다."
"벌써 만들었나 보네?"
"근데 이게 뭡니까? 꽤 무거운데."
리오의 물음에 나는 그냥 씨익 웃으며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럼 나가 볼까?
리오. 따라와."
"네? 저도요? 오늘은 외부 일정이 없지 않습니까?"
내 말에 리오가 볼튼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러자 볼튼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볼튼에게도 말하지 않은 일정이었으니, 그 역시 모르는 게 당연했다.
"영주님. 상자는 제가 들겠습니다."
"괜찮으니까 가자고. 그리고 친위대는 안 따라와도 괜찮으니까 쉬라고 해."
"아, 알겠습니다."
리오도 데리고 가는데 친위대를 놓고 간다는 말에 둘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영주관에서 나와 조금 걷자 북쪽 지역에 지어지고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네요."
"영주님. 그런데 여기 지어지는 저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음- 리오도 모르는 겁니까?"
"영주님께서 나에게도 말씀해주시질 않으셔서···"
리오와 볼튼의 대화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저택의 앞에서 스미스가 보낸 상자를 열어 물건을 꺼냈다.
은색으로 빛나는 명판.
나는 그 명판을 들고 리오에게 말했다.
"이 저택의 주인이 누구인지 물었지?"
"네?"
"이건 내 선물이다. 리오."
명판에 적혀있는 자신의 이름에 리오는 말을 잊고 나와 명판을 번갈아 봤다.
"명판은 주인이 직접 거는 게 좋겠지?
어서 걸으라고. 이 저택은 리오의 것이니까."
명판을 받아든 리오가 말없이 명판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사람 같네.'
자신의 명판이 걸린 저택 입구를 떠나지 못하는 리오의 모습에 볼튼이 미소지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그 옆에 지어지고 있는 저택은 볼튼과 헤돈 거야."
"저, 정말입니까?"
"당연하지. 그리고 저기 지어질 저택은 나인의 것, 그리고 친위대 기사들에게도 하나씩 지어줘야겠지."
내가 이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나와 함께했던 2명의 행정관과 8명의 기사 모두에게 저택을 지어줄 생각이었다.
누구보다 오래 나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었으니 충분히 그만한 대우를 받아도 될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그동안 못 해준 게 부끄러울 만큼 내 주변 인물들에게 해준 게 너무 없었다.
내 말에 볼튼은 정말 감동했는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를 떠나 국왕에게 갔으면 영지까지 받았을 사람이 겨우 저택 하나에 감동하는 거야?"
"겨우라니요. 주군께 받는 선물인데 겨우라는 말은 당치도 않습니다."
"그리고 볼튼에게는 선물이 또 하나 있어."
"이렇게 멋진 저택을 받게 되었는데 또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저는 이 저택으로 충분합니다."
볼튼은 저택으로 충분하다고 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 하는 게 맞다.
아렌달로 이주해온 기술자들에게는 모두 그만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소드마스터에게 겨우 저택 하나뿐이라니. 다른 귀족들이 들으면 당장이라도 볼튼을 영입하려고 달려들 것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볼튼에게 뭘 해줄 수 있나 생각해봤는데, 별게 없더라고.
땅을 주자니 국왕에게 충성했다면 받았을 영지보다 못할 것 같고, 셀링을 주자니 소드마스터라는 가치를 무시하는 것 같고."
"······"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볼튼에게 해안가 호텔을 줄게."
"네?"
"해안가 별장 지대에 짓고 있는 10층짜리 호텔. 그 호텔을 볼튼에게 줄게."
아무리 볼튼이 행정관이 아니라도, 나를 호위하면서 그 호텔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물건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웬만한 소규모 영지보다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해 낼 수 있는 게 해안가 호텔이었다.
"대신 부탁 하나만 하자."
"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꼭대기 층에 대한 권리만 내가 가지면 안 될까?
볼튼도 알지? 내가 호텔 꼭대기 층을 별장 대신 쓰려고 했던 거?"
"···그 꼭대기 층이 제일 비싸게 받을 수 있는 층 아닙니까?"
"······그럼 우선 예약권만이라도···"
내 말에 볼튼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하핫- 언제라도 쓰실 수 있게 비워 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