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총인구 6432명 중 남성 3377명. 여성 3055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주님을 포함한 모든 인구에 대해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했습니다."
총인구가 대한민국의 아파트단지 인구수보다 적어서인지 인구조사는 금방 끝났다.
보통의 영지의 경우 여자가 더 많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이주민이 많은 아렌달은 남자가 10%가량 더 많았다.
"앞으로 난민이나 이주민들이 들어오게 되더라도 하나도 빠짐없이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하도록 해.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사람은 아렌달에서 그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한다고 알려주면 알아서 주민등록번호를 받기 위해 관청을 찾아오겠지."
"알겠습니다."
내 지시에 리오를 포함한 행정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민등록제도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던 행정관들도 사람들에게 고유 번호를 부여하면서 이게 얼마나 행정 업무에 편한 제도였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외부인의 출입에 대한 임시 번호 역시 준비 다 끝났지?"
"예. 현재 리비아 상단과 울드 상단부터 임시 번호를 부여해주고 있습니다."
"좋아. 외부인에 대한 관리가 더 중요해. 앞으로 고유 번호 없이는 아렌달과 뉴렌달에서 거래가 안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시켜서 전부 아렌달 영지에 들어오는 순간 임시 번호를 부여받도록 관리하라고."
임시 번호를 부여하면 외부의 인원 역시 관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등록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추방해버려. 그게 귀족이건 상인이건 상관없다.
영주의 권한으로 내 영지에 한 발짝도 못 들어오게 할 수 있으니까."
내 지시에 어린 행정관 하나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영주님. 국왕 폐하께서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
'국왕은 어떻게 하지?'
순간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당황했다.
"음- 국왕은 어쩔 수 없지 않을까···?"
내 말에 행정관들이 침묵했다.
"그리고 국왕이 설마 이런 변방까지 오겠어? 그래도 국왕한테 물어보기는 하라고.
대충 임시 번호를 받아야 아렌달에서 활동이 편하다고 하면 호기심에라도 받으려 하겠지."
"네~ 알겠습니다~"
"리오. 왠지 대답이 시원찮은데?"
리오가 슬쩍 내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저는 영주님께서 국왕 폐하께도 반드시 코드를 부여하라고 하실 줄 알았거든요."
"그래도 국왕이잖아?"
어쩔 수 없다는 내 말에 리오가 빙긋 웃었다.
"저에게는 국왕 폐하보다 영주님이 더 높은 사람입니다."
반역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지만, 리오는 걱정이 없는 듯 보였다.
나는 그런 리오에게 똑같이 웃어주며 말했다.
"언젠가는 국왕도 반드시 코드를 받게 해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아렌달에서 뉴렌달로 가는 고속 도로가 완성되었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도로였기에 말 그대로 고속도로였다.
아직 뉴렌달 외에는 아무것도 개발되지 않은 바깥의 영토였기에 뻥 뚫린 시야가 정말 시원했다.
"나중에는 여기서 레이싱도 가능하겠는데?"
언젠가 이 고속도로를 달릴 것을 기대하며 뉴렌달로 돌아왔다.
어느새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다.
그리고 드디어 뉴렌달로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도시가 보인다!"
"와- 저게 바다인가 봐!"
여유를 부리며 새로운 환경에 눈이 팔린 영지민도 있었고,
"거기 빨리빨리 좀 갑시다! 이렇게 꾸물거리다가는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다 차지한다니까?"
"먼저 도시로 들어가 봐야 아무것도 없다니까? 우리가 첫 이주민들인데 뭐가 있겠어?"
앞으로의 날들을 염려하는 영지민들도 있었다.
"1차로 들어오는 게 1500명이었던가?"
"그렇습니다. 1차로 들어오는 영지민들은 뉴렌달 공사에 투입되었던 건설 인부들의 가족들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농경지에 파종하기 위한 농부들도 같이 이주를 시작했습니다."
이미 뉴렌달의 환경에 익숙한 건설 인부들과 새 농경지를 경작할 농부들이 1순위로 이주하기로 되어있었다.
촌장을 비롯한 아렌달 원주민 중 일부는 고향에 남고 싶다고 희망했기에 지금 뉴렌달로 들어오는 이주민들은 대부분 아렌달 원주민은 아니었다.
'아렌달 원주민은 지금 인구에 3분의 1밖에 안 되니까.
그리고 아렌달에도 영지민을 남겨놔야 했잖아.'
스스로 남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조금 다행스러운 마음도 있었다.
만약 영지민 전부가 뉴렌달 이주를 희망했다면, 아렌달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농부들은 동쪽 거주지로, 건설 인부들은 남쪽 거주지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거주지는 주민등록번호에 따라 이미 분배가 되었습니다."
"잘하고 있네."
뉴렌달의 농경지는 원래 서쪽 평야부터 늘려갈 생각이었지만, 갑자기 발견된 마나 스팟 때문에 동쪽 구스강 인근으로 옮겨졌다. 농부들이 동쪽 거주지를 받게 된 이유였다.
그리고 아직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되지 않은 항만과 조선소, 제철소 등 바다에 접해서 들어설 시설 공사를 위해 건설 인부들은 남쪽 거주지를 배정하게 되었다.
곧 2차로 이주해 들어올 수공업자들과 기술자들은 공장지대에 가까운 동쪽 거주지를 받을 것이다.
나는 공사가 마무리되어가는 공장지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산업의 틀을 한 단계 올릴 시간이다.
이세계의 기본 산업은 당연히, 농업이다.
만약 영지가 초원을 가지고 있다면 목축업을, 산이나 숲을 끼고 있다면 임업, 바다를 끼고 있다면 어업을 주 산업으로 할 수는 있지만 그래 봐야 다 1차 산업일 뿐이다.
가끔 영지에 광산 자원이 많아서 그 자원을 팔아 영지를 운영하는 영주도 있지만-황금파는 스톨 백작-, 그들 역시 자연의 자원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가공 산업. 즉, 2차 산업의 기틀이라도 만들어진 곳은 왕도를 비롯한 극소수의 도시들뿐.
그마저도 내가 가지고 있는 현대 지식의 산업형태와 비교하면 한참이나 뒤떨어져 있었고, 그 산업들을 농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현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1차 산업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
자연에서 오는 자원은 언젠가 고갈이 되는 법.
'1차 산업의 생산자는 영지가 굶지 않을 정도만 되어도 좋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아렌달은 진작에 2차 산업으로 넘어간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아렌달은 이미 건설업이 주 산업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화폐를 사용한다.'
그동안은 영지민들에게 건설 일을 시킬 때 임금보다는 식량이나 생활에 필요한 도구, 의복 등을 분배해줬었다.
상단들이 들어온 이후에도 상가는 몇 개 없었고, 거의 모든 시설이 영주의 권한 아래 있었으니 영지민들이 돈을 쓸 일이 없었다.
영지의 경제는 대부분 내가 시키는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식량이나 물건을 받아가는 것뿐.
상단에서 들여오는 물건의 거의 모든 대금을 내가 지불하고 그 이후에 영지민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대부분의 지방 영지도 아렌달과 같은 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아니다.
한 농부가 자신의 손에 쥔 금속쪼가리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게 뭡니까?"
"오늘 일한 만큼의 임금이에요."
"임금이요? 오늘은 밀가루를 주는 날이 아니었습니까?"
"이제부터 밀가루나 고기를 임금으로 주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앞으로의 임금은 모두 셀링으로 받게 될 거니까요."
행정관의 말에 농부는 깜짝 놀라 말했다.
"이 이상한 게 셀링이라는 말입니까?"
"네. 그게 바로 셀링, 이 베르겐 왕국에서 융통하는 돈이죠."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셀링을 만져본 적이 없던 농부는 그저 신기한지 셀링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말했다.
"근데 이걸 어떻게 쓰는 겁니까?"
"상점에서 거래할 때 쓰면 돼요. 물건을 사고 그에 맞는 셀링을 지불하는 게 돈의 사용법이죠."
"상점에서 거래할 거면 셈을 할 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셈을 할 줄 모르는데요."
"아렌달의 영지민은 모두 기초 교육을 받게 되어있는데 셈을 못 한다고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은 것 아닌가요?"
"죄, 죄송합니다."
지난겨울 기초 교육을 받았던 것을 떠올린 농부는 행정관의 말에 잔뜩 주눅이 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만약 자네를 대신해서 셀링을 사용해 줄 사람이 없다면 하루라도 빨리 셈을 익히는 게 좋을 거야."
"여, 영주님!"
"앞으로 내 영지에서는 모두 그 셀링을 이용해서만 거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내 영지에서 계속 살고 싶다면 이곳의 규칙에 적응해야지. 안 그래?"
"아, 알겠습니다."
농부는 그렇게 대답하고 달아나듯 집으로 돌아갔다.
"셀링을 받으면서 방금 농부처럼 반응하는 사람이 많았나?"
"아니요.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영지민들 중에 기본적인 셈도 못 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서, 오히려 돈을 가지게 되었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다행이네."
그동안 영지민들을 대상으로 했던 기초 교육이 빛을 발했는지, 영지민들은 금방 화폐 사용에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래에 외부에서 이주해 온 영지민들 역시 기초 교육을 이수하면 점점 화폐 사용에 익숙해질 것이다.
산업의 틀이 바뀌어 가면서 영지의 경제 체계 역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제 아렌달은 더 이상 시골이 아니었다.
"겨우 5천 명이 살기에는 너무 좋은 도시 아닐까?"
영주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콘크리트 건물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왕도보다 뉴렌달이 훨씬 더 도시의 모습에 가까웠는데 인구는 왕도의 30분의 1 수준이라니.
인구가 적으니 경제력도 쉽게 올라가지 않는 것 같아 생각할수록 아쉬웠다.
"뉴렌달에 들어올 상단들이 광고를 잘 해줬으면 좋겠는데."
사실 이렇게 걱정할 필요도 없이 상단들은 광고해줄 것이다. 아렌달에 돈이 흐르는 데 어떤 상단이 두 손 놓고 있겠는가?
흐르는 돈을 조금이라도 많이 주워 담기 위해 상단들이 몰려들 것이고, 그로 인해 아렌달이 부유하다는 것이 광고될 것이다.
"최소한 2만 명 정도는 있어야 북적북적한 느낌이 들겠지?"
"영주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분명 곧 2만 명이 아니라 20만 명이 넘는 인구가 뉴렌달에 살게 될 겁니다."
"소드마스터 볼튼께서는 행정관도 아니신데 잘 알고 계시는군."
"하핫- 깨달음을 얻고 나니 미래가 보이는 듯합니다."
능청스러운 볼튼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스톨 백작에게 줄 별장도 다 만들어진 것 같던데. 확인해 보러 가볼까?"
"친위대를 불러들일까요?"
"됐어. 지금 열심히 삽질하고 있을 텐데 뭐."
원래 오늘 일정이 없었기에 친위대 기사들은 마법 연구단지 공사를 돕고 있었다. 아마 지금도 애꿎은 땅을 뒤집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드마스터께서 같이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 필요하겠어."
"하하-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영주님."
스톨 백작의 별장은 정말 오션뷰가 끝내주는 장소에 지어졌다.
어마어마한 인맥을 자랑하는 스톨 백작이었으니, 혹시 그가 여기서 파티를 열게 되었을 때를 위해 정말 고르고 고른 장소에 만들어 준 것이다.
'만약 그 파티에서 오션뷰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면 이쪽의 땅값이 폭등할 테지.'
땅값이 폭등한다고 땅을 팔지는 않겠지만, 땅값이 오르면 건물값도 어마어마하게 오르는 건 기정사실이다.
어차피 귀족들에게 팔기로 계획한 별장 지대였으니 최대한 비싸게 팔아야 하지 않겠나.
"이야~ 여기 진짜 좋네."
스톨 백작의 별장에서 바라보는 오션뷰는 기대 이상으로 끝내줬다.
지금이라도 다른 곳에 별장을 새로 지어주는 건 어떨까 고민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눈에 익숙한 마차 한 대가 별장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스톨 백작이 뉴렌달에 온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