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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현대인-35화 (35/169)

35화

"아렌달이 숨기고 있던 비밀을 알아 버렸으니, 에이스경은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

내 물음에 에이스는 침묵했다.

"아렌달의 군사력을, 아렌달이 가지고 있는 마법 무기를, 아렌달에 충성하고 있는 기사 볼튼을 국왕 폐하께 보고해야겠죠."

감찰관으로 온 에이스였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로 인해 피곤해지고, 더 나아가 분쟁에 휘말릴 아렌달의 사정 따위는 에이스가 챙겨주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에이스는 그저 자신의 역할대로 국왕에서 아렌달이 가진 위험성에 대해 보고만 하면 되는 것이다.

긴 침묵을 깨고 에이스가 내게 말했다.

"아렌달 백작님께서는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힘을 숨기고 계셨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하시려고 이런 마법 무기를 만드신 겁니까?"

내 대답에 따라 당장이라도 검을 뽑겠다는 에이스의 눈빛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아무것도."

"······"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내 대답에 에이스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나 보다.

"힘을 가지고 있다고 꼭 무언가를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힘이 필요할 수도 있지."

"그 말은, 다른 뜻을 품지 않았다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다른 뜻?

내가 스톨이나 다른 영지를 공격할까 봐 걱정하는 건가? 아니면 베르겐 왕국에 반역이라도 일으킬 것으로 생각하는 건가?"

"······"

"에이스경은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힘을 가진 권력자들은 언제나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에이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그럴만한 힘이 있다면 위에서 지배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고,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내 생각은

"굳이?"

라는 것이다.

누군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피를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살인이라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몸통에서 잘려나가던 바쿠의 머리가 떠오를 때마다 진저리를 치곤 했다.

그런데 한두 명도 아닌 수백, 수천, 어쩌면 수만 명 이상의 목숨이 사라질 수도 있는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굳이 전쟁을 하지 않아도 지금처럼 이세계에서 잘 먹고 잘살 수 있지 않은가.

바깥에는 주인 없는 땅이 넘치는 데 굳이 남의 것을 탐할 필요도 생각도 없다.

그리고,

"내 공략 스타일은 정복 승리가 아니라 과학 승리와 문화 승리 쪽이거든."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는 감찰관과 스톨 백작의 마차를 보며 볼튼이 말했다.

"괜찮겠습니까?"

"음- 괜찮지 않을까? 에이스경도 뭔가 깨달은 게 있는 것 같던데."

에이스는 아무도 모르게 나에게 쪽지를 남기고 돌아갔다.

-아렌달 백작님의 생각이 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사란 무언가 죽이는 걸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에이스는 내 생각을 이해해 주었다.

내가 먼저 칼을 뽑지만 않으면 에이스도 여기서 본 것들을 침묵해 줄 것이다.

"왕도의 일은 왕도에서 알아서 하라고 하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자고."

기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다져 놓은 지반 위에 콘크리트 타설이 시작되었다.

지반을 잡아주기 위해 심어 놓은 빔 위에 육각형의 콘크리트 매트(기초 바닥) 깔렸고, 바닥 콘크리트가 굳자마자 새로운 빔을 기둥 골조로 세워 한층 한층 플로워가 올라갔다.

이세계에서는 지금까지 없었던 건축 공법이었지만, 마법사들의 보조를 받으니 문제없이 건물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직은 외부 골조뿐이었지만, 충분히 위용을 보여줄 만한 탑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정말 탑을 만드시려는 겁니까?"

"겨우 10층짜리 건물 가지고 탑은 무슨··· 일단은 10층으로 만족하고, 나중에 100층짜리로 증축해줄 테니까 그때가 되면 마탑이라고 부르자고."

"······"

말을 잊어버린 자하에게 피식 웃어준 나는 알비레오를 불렀다.

"알비레오. 그때 나한테 말했던 마법 얼마나 보완했어?"

"네?"

"열기를 퍼트리지 않고 날아가는 폭발 마법 있었잖아? 내가 그걸로 보너스도 챙겨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 갑자기 그 마법은 왜 그러십니까?"

나는 슬쩍 볼튼을 바라보고 알비레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마법 무기의 성능을 한 단계 더 올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소드마스터의 위용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A2 정도의 개인 화기로는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군인 볼튼에게도 그런 공포를 느꼈는데 만약 적으로 소드마스터가 나타나게 되면 영지군이 전부 썰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개인 화기의 화력을 뚫고 들어와서 다 썰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단 말이지.'

"마법 무기의 성능을 올린다는 말은··· 영주님. 혹시 큰 뜻을 이루시려고···"

"뭔 소리야?"

"아, 아닙니까?"

볼튼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이스나 볼튼이나 기사들이란 기본적으로 공격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 같았다.

"침략을 위한 화력이 아니라 보호하기 위한 화력이다. 강한 화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적의 침략을 억제할 수 있으니까."

"아- 그렇군요.

소드마스터가 되어서도 영주님의 큰 뜻을 헤아릴 수 없다니 저는 아직 한참 멀었군요.

오늘도 영주님에게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역시 영주님이십니다."

오랜만에 급발진하는 볼튼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소드마스터가 된다고 해서 사람이 변하지는 않네.'

"자 그럼. 소드마스터 볼튼. 그대의 힘을 보여줄 시간이네.

나와 함께 시멘트를 상부 플로워로 날라주지 않겠나?"

"기사 볼튼! 영주님의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하핫- "

뉴렌달의 공사를 시작한 지도 어느새 1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1년 전 이 땅이 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는 몬스터의 땅이었다고 하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회색빛 건물로 가득한 뉴렌달의 모습을 보면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영주관 창가에 서서 멀리 보이는 마탑을 구경하고 있기를 잠시. 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마나석이 빛을 뿜었다.

"핫라인 통신? 무슨 일이지?"

통신 마법기를 받아 마법 회로를 연결하자 마나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 아렌달입니다.

"아렌달 백작이다. 누구지?"

-랄프입니다. 영주님.

"랄프가 핫라인을?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네. 영주님 급한 사안입니다. 철과 식량의 값이 폭등하고 있습니다.

랄프의 말에 얼마 전부터 아렌달에서 오는 철의 양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식량이야 아렌달에서 생산하는 양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철은 외부에서 들여왔기 때문에 철의 값이 올랐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폭등이라니.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말이었다.

"이유는? 가격 폭등의 이유도 알아냈어?"

-네. 나르비크에서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전쟁. 그것도 외국의 내전이다.

"기회다!"

나르비크에는 미안하지만, 나에게는 더 없을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도 정말 좋은 타이밍에 말이다.

"영주님. 나르비크의 내전에 참여하실 생각이 십니까?"

헤돈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영지군을 지휘하는 헤돈이었기에 물어본 것이겠지만, 그 역시 내가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난민이군요."

"맞아!"

역시 눈치가 좋은 헤돈답게 내 생각을 정확하게 읽었다.

"전쟁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지만, 전쟁이 길어지게 되면 난민이 생기겠지. 그 난민을 우리가 받아들인다."

왕도에 백성들을 받아 올 때마다 국왕에서 굽신댔던 것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난민을 받아들이는 게 나로서는 훨씬 편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르비크의 난민을 받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도 있었다.

베르겐 왕국은 바다를 가져 본 적 없는 내륙 국가였다. 당연히 해양 기술이 전무 했다.

바다에서 어업을 했던 어부도 없고, 바다를 건널 배를 만들 조선 기술도 없을뿐더러, 배를 몰고 바다를 건널 항해사도 없었다.

"랄프에게 당장 나르비크에서 난민 기술자를 쓸어 오라고 해.

내 이름을 걸고 가진 기술에 걸맞은 대우를 해줄 거라고 말이야."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다고 했던가? 지금 나르비크의 상황은 참으로 볼 만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나르비크의 내전이 균형을 이루며 아직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이 밀리려고 할 때마다 다른 곳에서 갑자기 힘을 내는 건 누가 봐도 외부의 개입이 있다는 말이지."

"분명 베르겐 왕국에서도 개입했을 겁니다."

"아렌달에서 리오와 랄프가 나를 대신해서 고생을 많이 하고 있겠군."

나르비크의 백성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내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나에게는 더 좋았다.

난민이 생기기도 전에 내전이 끝났다면 해양 산업의 기술자들을 영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중앙의 권력자들의 시선을 그쪽에서 끌어가 주는 것도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뉴렌달이 완공되면 본격적으로 영지민들의 이주가 시작된다.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방해를 받지 않는 게 여러모로 좋았다.

영지민의 이주가 시작되기 전 나는 아렌달로 돌아왔다.

헤돈과 자하도 오랜만에 아렌달로 귀환해서 아렌달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영주성에 모이게 되었다.

"아렌달의 제도를 개혁한다. 헤돈경."

"네. 영주님."

"지금까지 한 부대로 관리하던 영지군을 2개의 중대로 재편하겠다.

각 중대장은 발트와 카잔에게 맡긴다."

"알겠습니다."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면 영지군이 많이 힘들 것이다.

미리미리 중요 거점마다 초소를 설치해서 영지민들의 이주에 위험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해줘."

군사 분야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 없었다. 헤돈이 지금처럼 알아서 잘 이끌어 줄 테니까.

"랄프. 나르비크의 난민들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지?"

"베르겐으로 흘러들어오는 난민들을 붙잡고 있습니다.

일부 영지와 난민을 붙잡기 위해 경쟁이 붙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는 문제없이 아렌달로 끌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주님께서 말씀하신 해양 기술이 있는 난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저희쪽에서 붙잡고 있습니다."

"좋아. 난민들이 국경을 넘을 때마다 베르겐의 바다는 뉴렌달 뿐이라고 어필하면 확실하게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거야."

난민을 받는 것도 큰 문제는 없었다. 아렌달로 오는 상단도 늘어나서 그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그 외에 자잘한 지시를 내리고 가장 중요한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아렌달은 인두세가 아닌 소득세와 소비세를 받는다."

이세계에서의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은 기본적으로 인두세였다. 사람의 머릿수만큼 세금이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영지의 행정 역시 바꿔야겠지.

아렌달과 뉴렌달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들은 이제 영주민으로 인정받기 위한 주민등록을 시행한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주민 등록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개념이었기 때문에 다들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영지의 행정 체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자신이 아렌달 영지에 살고 있다는 것을 등록하는 거다.

영지에 자신이 태어난 지역과 시간 그리고 이름을 등록하면, 등록한 영지민에게 고유의 번호를 줄 것이다.

그 번호는 주민등록번호라 해서 살아가는 동안 자신을 증명하는 코드가 되는 거지."

주민등록번호를 토대로 체계적인 인구 관리를 할 생각이다.

행정관들이나 영지민들이나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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