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아렌달에서 들어오는 건설 자재들과 함께 외부의 마차 몇 대가 뉴렌달로 들어왔다.
눈에 익숙한 마차가 한 대 섞여 있는 행렬에 나는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어서 오세요. 스톨 백작님.
아직 도로공사가 끝나지 않아 오시는데 힘드셨을 텐데 괜찮으십니까?"
"길이 조금 거칠기는 했지만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네.
그리고 왕도나 아렌달 같이 도로가 잘 정비되어있는 영지도 흔치 않으니 이런 길도 익숙하다네."
"다행이군요."
스톨 백작과 인사를 나누자 그의 옆에 있던 기사가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렌달 백작님.
왕국기사단 부단장 에이스 스톨입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아버지께 아렌달 백작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에이스경. 뉴렌달에 지내는 동안 많은 것을 보시길 바랍니다."
내 말에 에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스를 따라온 왕도의 인물들에게 하나하나 인사를 하고 나니 스톨 백작의 마차에서 샤를로트가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샤를로트도 따라왔어?'
놀라는 나를 보고는 활짝 웃는 샤를로트를 보자 어이가 없었지만, 결국 나도 같이 웃어주었다.
에이스와 함께 감찰을 나온 왕도의 사람들은 빠르게 지어지는 콘크리트 건물들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건설 공법과 새로운 건설 자재들에 연신 질문 공세를 펼치며 뉴렌달의 정보를 캐내기 바빠 보였다.
"그런데 걱정했던 것보다 몬스터는 없어 보이는군."
"뉴렌달 외곽을 방위하고 있는 영지군 덕분입니다. 아직도 서쪽 구릉 지대나 구스강 너머에는 몬스터가 자주 얼굴을 비춥니다."
내 말에 스톨 백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렌달에 그렇게 넓은 지역을 보호할 수 있는 병력이 있었단 말인가? 아렌달의 영지군은 200명 정도로 알고 있는데?"
'우리 영지군 규모는 또 어떻게 아는 거야?'
왜 이렇게 아렌달 정보를 자세하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톨 백작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아직 까지는 아렌달의 전투력으로 몬스터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다 영지군이 밤낮으로 경계를 서준 덕분이지요."
내 말에 에이스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렌달은 기사들도 많지 않아 보이는 데 영지군의 전투력이 뛰어나군요.
한번 영지군이 몬스터를 상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기사단의 부단장다운 날카로운 말에 나는 대답을 회피했다.
"당장에는 몬스터가 없어서··· 기회가 된다면 에이스 부단장이 한 손 거들어 주시죠."
"물론입니다. 왕국의 기사로서 당연한 일이지요."
'이건 기대했던 반응이 아닌데.'
귀찮아하길 바라며 한 말에 에이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로서 정말 모범적인 모습에 나는 스톨 백작과 에이스를 번갈아보며 생각했다.
'스톨 가문의 사람들은 진짜 이해가 안되는 사람들 뿐이구나.'
감찰관들에게 공사 현장을 안내해주고, 스톨 백작의 수다 친구가 되어주기를 반복하며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감찰관들이 뉴렌달에 대해 이것저것 캐내려 했지만, 공사 현장을 보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기에 슬슬 감찰관들도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나 스팟과 영지군 그리고 볼튼은 감찰관들 눈에 들어오지 않게 숨겼으니까 특별할 게 없지.'
원래 공사판에서도 안전팀에 걸릴만한 것들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 놓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걸릴 거리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바다란 것은 정말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것 같군."
"그렇습니까?"
내 말에 스톨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뭔가 생각이 났는지 내게 말했다.
"그래! 가끔씩 여기 와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여기에도 저택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군."
"네?"
"영주들은 다들 왕도에 저택 하나씩 있지 않은가? 왕도에서 머물 때를 대비해서 말이네.
그와 마찬가지로 여기 뉴렌달에도 저택을 하나 갖고 싶어서 말이네."
'나는 왕도에 저택이 없는데? 그보다 남의 영지에 저택을 가지고 싶다니. 그냥 영주성에 있는 게스트룸을 이용하면 되잖···
잠깐만··· 귀족들에게 바깥 영토에 대한 권리도 줬는데 도시의 건물쯤이야 더 상관없는 것 아닌가?'
꼭 국왕이 있는 왕도에서만 귀족의 저택을 가질 수 있는 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세계에서 땅에 대한 권리는 모두 국왕과 영주에게 있다고 하지만, 건물에 대한 권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법도 없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또 다른 사업 거리가 떠올랐다.
'바닷가라면 호텔과 리조트가 있어야지!'
"스톨 백작님. 제가 별장 하나 지어드릴까요?"
"저택이 아니고 별장?"
"바닷가가 보이는 뷰 좋은 곳에 별장 하나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진심인가?"
"물론이죠. 건물에 대한 소유권도 드리겠습니다. 대신···"
"10만 셀링 정도면 될까?"
스톨 백작의 과감한 결단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다시 한번 귀족들의 주머니를 털 좋은 구실이 생겼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나와 샤를로트의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샤를로트는 바닷바람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빙글 돌며 말했다.
"아- 시원하다."
"조금 춥지 않아?"
"음- 괜찮아요. 그동안 답답했던 게 확 날아가는 것 같으니까요."
"왜? 소설이 잘 안 써지나 보지?"
"이미 다 썼는걸요. 오라버니가 그러는데 왕도에서도 인기가 많데요."
샤를로트의 말에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설마 진짜로 소설을 쓸것이라고 조금도 생각 안 했는데 이미 완성했을 뿐 아니라 인기도 많단다.
"설마 그때 내가 잠깐 말해준 이야기야?"
내 물음에 샤를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님의 도움을 조금 받기는 했으니까 감사의 인사는 할게요.
고마워요."
"아니- 감사랄 것까지야."
내 대답에 샤를로트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러는데··· 또 다른 이야기는 없나요?"
"또 다른 이야기?"
눈을 반짝이는 샤를로트에 나는 시선을 돌려 바다를 보며 말했다.
"음- 바다가 있으니까···
그래. 어떤 어부가 있었다고 하자."
"어부요?"
"그래.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 한때는 잘나가는 어부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물고기를 못 잡는 게 된 거지.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 어부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어부는 두고 보자면서 먼바다까지 고기를 잡으러 갔어."
내 이야기에 샤를로트가 눈을 반짝였다.
"그래서요? 어떻게 됐는데요?"
"결국, 먼바다까지 나가 낚시를 한 어부는 자신의 배보다 큰 고기를 잡았지."
"와- 잘됐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야."
"그럼요?"
"먼바다에서 돌아오는 동안 잡았던 고기를 상어가 다 뜯어 먹어서 어부는 뼈만 남은 고기만 가지고 돌아온 거야."
로미오와 줄리엣에 이어 노인과 바다. 세계 명작 소설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힘들게 먼바다까지 갔다 왔는데 아무것도 남기질 못했네요."
"그래도 고기의 뼈를 가지고 왔으니 어부로서의 명예는 남았지."
"와- 재밌어···"
명예가 귀족에게는 정말 중요한 가치라는 걸 귀족 가문의 딸인 샤를로트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명작은 어디에서나 통하는 법.
'대충 써도 귀족들에게는 먹히는 이야기겠지.'
이미 샤를로트의 반짝이는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샤를로트와 바닷가를 걷는 데 자하가 달려왔다.
"영주님. 데이트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데이트라니···"
자하의 말에 살짝 샤를로트를 살피고 말했다.
"무슨 일인데?"
"헤돈경에게서 통신이 왔습니다."
"헤돈에게서?"
"네. 서쪽 구릉 지대 너머로 몬스터 군단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자하의 보고에 샤를로트가 말했다.
"급한 일인 것 같은데, 어서 가 보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친위대들이 하나둘 내 곁을 지키며 따라붙었고, 동쪽의 구스강을 지키던 영지군이 달려오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나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에이스 역시 눈에 들어왔다.
'내일이면 감찰관들이 왕도로 돌아가는 거였는데···'
"백작님. 몬스터가 나타난 겁니까?"
"몬스터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크게 위험한 일은 아닙니다. 에이스경은 그냥 쉬고 있어도···"
"기사로서 백성을 위협하는 몬스터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저도 백작님을 도와 몬스터를 사냥하겠습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왕국 기사단의 부단장으로서 왕국을 지키는 일입니다."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 에이스에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서쪽 구릉 지대에 들어오자 폭음이 들려왔다.
이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아렌달의 군사력이 에이스의 눈에 들어올 것이다.
영지군의 화력을 숨기기 위해서는 에이스의 눈을 가려야 했는데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하지.'
결국, 그 고민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영지군이 있는 곳까지 에이스를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
"헤돈경. 몬스터는?"
"지금 볼튼경이···"
헤돈이 에이스를 발견하고 급하게 말을 끊었다. 하지만 멀리서 보이는 몬스터 군단을 헤집는 볼튼을 보니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소드마스터. 어떻게 소드마스터가 여기에···"
혼자서 오크를 베어내고 있는 볼튼의 위용에 에이스뿐만 아니라 나 역시 말을 잊고 말았다.
하지만 볼튼이 혼자서 다 베어내기에 오크의 숫자가 많았기에 볼튼을 지나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오크 역시 점점 늘어났다.
점점 다가오는 오크 군단에 헤돈이 나를 일깨웠다.
"영주님!"
그리고 에이스 역시 많은 오크의 숫자에 나를 붙잡으며 말했다.
"백작님. 여기는 위험합니다. 뉴렌달로 돌아가 백성들을 피난시키십시오."
"에이스경. 괜찮으니까 놓고···"
"오크 군단이 다가옵니다!"
점점 가까워지는 오크 군단에 영지군에 다시 긴장감이 돌았다. 에이스 역시 나를 붙잡았던 손을 놓고 자신의 검을 꺼내 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오크 군단을 향해 달려갈 것 같은 에이스의 눈빛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기사단의 부단장이라더니, 스톨 백작의 돈으로 부단장이 된 건 아니구나.
저 눈빛이 나를 향했다면 나는 숨도 못 쉬었겠지.'
에이스가 얼마나 뛰어난 기사인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에이스는 자신이 죽더라도 몬스터에게서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네.'
결론을 내린 나는 헤돈에게 말했다.
"헤돈경. 몬스터를 소탕한다."
"알겠습니다."
"굳이 에이스경까지 나설 필요는 없으니 그만 검을 다시 넣으세요."
"아렌달 백작님?"
멀뚱히 서 있는 에이스에게 씨익 웃어준 나는 내 명령을 기다리는 영지군에게 소리쳤다.
"한 마리도 다가오지 못하게 화력을 퍼부어라."
"알겠습니다!"
내 명령이 내려지자마자 영지군 병사들이 달려오는 오크를 향해 화구를 겨누었다.
그 모습에 나는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오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갈겨!"
"파이어!"
서쪽 구릉 지대에 메케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영지군의 화력이 오크 군단을 태우며 고기 굽는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혹시 살아있는 몬스터가 없도록 확실히 확인해라!"
"살아있는 놈에게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이미 여러 번 반복 해왔던 일이라 그런지 오크 시체를 정리하는 영지군의 손이 익숙해 보였다.
그리고 오크 족장의 머리를 쥐고 돌아오는 볼튼을 보며 소드마스터라는 존재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을 고쳤다.
'괴물.'
그저 기사들보다 조금 나은, 높게 쳐줘 봐야 일당백 정도나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오만이었다.
소드마스터는 기적을 만드는 마법사보다 훨씬 대단하고, 위험한 존재였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범주를 넘어서 버린 괴물을 보며 나도 모르게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헤돈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나와 마찬가지로 얼어있던 에이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