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의외의 말이었다. 마법사들은 일정량의 마법을 쓰고 나면 마나가 방전되기 때문에 보통은 무리하지 않는 편이었다.
사실 알비레오 같이 별종이나 마나가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마법을 썼지, 다른 마법사들은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알아서 마법을 조절해가며 사용하는 것이다.
"이제 다들 공사판에 익숙해져서 그런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법사들도 어느새 숙련된 노가다꾼이라도 되었는지 기술이 붙은 것 같았다.
"그럼 얼마나 잘하고 있나 한번 보러 가볼까?"
-펑
귀를 때리는 폭음에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 음- 음- 이제 들리네."
과거 이와 같은 상황을 겪어 봐서인지 금방 폭발의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어이~ 아티스트. 방금 폭발은 너무 크지 않았어?"
"엇! 영주님! 뉴렌달에는 언제 오신 겁니까?"
"조금 전에 도착했지."
내 말에 알비레오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말했다.
"왠지 모르게 얼마전부터 마력이 넘쳐서 저도 모르게···"
"마력이 넘친다고?"
내 말에 알비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근래에 열심히 공사를 도운 거야?"
"열심히 도왔다기보다는 마법을 사용하기 편해진 겁니다."
마법을 사용하기 편해져서, 그만큼 마법을 많이 썼으니 공사에도 도움이 된것이다.
"다른 마법사들도 다들 마법을 사용하기 편해진 거야?"
"음- 그런것 같은데요."
"왜?"
"그, 글쎄요."
내 물음에 알비레오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마법을 사용하기 편해질 수가 있는 건가?
나는 마법사가 아니지만,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자하는 뭐라고 했는데? 아무 말도 없었어?"
"자하님은 원래부터 마법을 많이 쓰지 않으시잖아요. 거의 공사장보다는 마법진을 설치하는데 시간을 다 쓰는 것 같던데요."
"음- 자하는 공사장에서 마법을 쓰기보다는 마법진을 설치하는 데 바쁘긴 하지.
그래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면 자하나 다른 마법사들과 의견을 교환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바로 뉴렌달에 있는 마법사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저는 마나석 덕분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마탑에 있을때는 이렇게 마나석을 여유롭게 사용한 적이 없어서···"
"저도요. 마나석을 조금 많이 가지고 다녀서요."
왕도에서 영입된 지 얼마 안 된 마법사들은 기존과 달라진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에서 마나석을 꺼내는 마법사들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그건 너무 많이 들고 다니는 것 아니야?"
"···죄송합니다."
"어차피 충전하면 상관없으니까 괜찮아.
자하는 뭔가 특별한 점을 못느꼈나?"
"음- 조금 이상하긴 하네요. 그동안은 마법진을 그린다고 공사 현장에서 나오지 않아 몰랐는데 이쪽으로 와보니 확실히 마나의 밀도가 높아진 것 같습니다."
"알비레오도 아까 그렇게 말했어. 왠지 모르게 마력이 넘친다고."
"네. 마력이 넘쳐서 마법을 사용하기 훨씬 편합니다."
알비레오의 말에 자하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다른 곳 보다 마나의 밀도가 높은 곳이라면···"
"뭔가 짚이는 게 있는 거지?"
내 물음에 자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탑··· 마나 스팟이 있으면 마나의 밀도가 높아집니다."
농경지 개척 공사는 일시 중지되었다. 그리고 마법사들 역시 다른 공사장에 투입을 멈추었다.
인근 지역은 영지군에 의해 철저히 봉쇄되었고, 나와 마법사들은 마나 스팟을 찾기 위해 뉴렌달 서쪽 평야를 탐사했다.
그리고 탐사를 시작하고 3일째 되는 날, 드디어 알비레오가 마나 스팟을 찾아냈다.
"여기가 마나 스팟이야?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확실합니다. 이 아래에서부터 마나가 끊임없이 용솟움치고 있습니다."
자하의 말에 다른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마법사들은 확실하게 마나 스팟의 존재를 느끼는 것 같았다.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용맥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지.'
"여기가 마나 스팟이 확실하다면, 이제부터 마법사도 양성할 수 있는 건가?"
마법사들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마탑주와 트러블이 생겼기 때문에 앞으로 마법사를 영입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마나 스팟이 여기에도 있다면 굳이 외부의 마법사를 영입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에 마탑을 만들어 버리면 되니까 말이다.
"영주님. 그런데 마나 스팟은 왕국의 관리를 받는 장소 아닙니까?"
"왕국에는 보고하지 않을 거야."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리고 여기 마나 스팟이 있다고 보고하면?
왕도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왕국에서 똑바로 관리나 하겠어?
지금 있는 마탑도 똑바로 지원해주지 않는데 잘도 관리해주겠네."
내 말에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야말로 왕국에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해서 아렌달에 의탁한 마법사들 아니었던가.
오히려 마법사들에게 확실한 지원을 해주는 내가 직접 관리하는 것이 마법사들로서도 더 이로운 상황일 것이다.
"지금부터 여기다가 마법 연구소를 만든다. 아니 마법 연구단지를 만들 거야."
"연구단지요?"
"그래. 마나 스팟을 가지고 겨우 연구소로 만족할 수는 없잖아?"
내 말에 마법사들의 얼굴에 기대감과 흥분이 보였다. 나는 그들의 그런 모습에 웃으며 말했다.
"기대해. 내가 진짜 마탑을 만들어 줄 테니까."
"오랜만의 삽질이군요."
볼튼의 말에 친위대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렌달에 가 있는 동안에는 큰 공사가 없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노가다를 하진 않았다.
틈틈이 작은 공사를 시찰하면서 잠깐잠깐 했던 삽질이 전부였기에 진짜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노가다 현장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기사들도 좀이 쑤셨는지 오늘부터 시작될 마법 연구단지 공사에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영주님. 어서 첫 삽을."
내게 삽을 건네주는 볼튼에 나는 피식 웃으며 시원하게 첫 삽을 떴다.
"공사 시작!"
내 신호와 함께 기사들이 본격적으로 삽질을 시작했다.
이미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지반을 한 번 뒤집어 놓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삽이 지면을 헤칠 수 있었다.
"핫! 핫! 핫! 핫!"
기사들의 호흡에 맞춰 점점 아래로 파여 들어가는 구덩이를 보니 여기가 진짜 노가다 현장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열심히 땀 흘리며 삽질하는 나를 미리아가 불렀다.
"영주님! 아렌달에서 통신이 왔어요."
"아렌달에서 통신이 왔다고?"
"네. 리오님께서 급하게 영주님을 찾는다고 레이첼이 통신을 보냈어요."
지금까지 아렌달에서 먼저 통신을 보낸 적이 없었기에 나는 삽을 놓고 미리아에게 마법 통신기를 건네받았다.
"메신져! 여기는 뉴렌달. 아렌달 들리는가?"
-아렌달입니다. 영주님이 십니까?
"그래."
-영주님. 스톨 백작님께서 아렌달에 방문을 요청하셨습니다.
"스톨 백작이? 갑자기 왜?"
-스톨 백작님께서 바깥의 영토를 보고 싶으시다고 하십니다.
아렌달에 투자하신 다른 귀족들과 다르게 자신은 아직 바깥을 보지 못했다고, 가능하다면 바다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하셨습니다.
영주인 내가 아렌달을 비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영지를 방문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스톨 백작도 은근히 아렌달을 감시하고 있으니 내가 지금 아렌달에 없는 것도 알 텐데?'
분명 뭔가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스톨 백작이 그냥 방문을 요청한 건 아니지?"
-네. 왕도에서 감찰관이 온다고 합니다.
거기에 맞춰서 스톨 백작도 함께 방문을 요청한 겁니다.
"역시."
국왕이나 왕도의 권력가들도 이제 본격적으로 바다에 관심을 드러낼 시기였다.
이런 것을 보면 스톨 백작은 정말 명분을 잘 만드는 사람이었다.
-감찰관으로 오는 사람이 왕국 기사단의 부단장이라고 합니다.
"왕국 기사단의 부단장이라면···"
-스톨 백작님의 둘째 아들인 에이스경입니다.
"······"
-영주님.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이렇게 좋은 명분을 만들어 냈는지 스톨 백작의 수완에 감탄이 나왔다.
"하아- 보내."
나는 리오에게 짧은 대답을 건네고 통신을 끊어버렸다.
"연구단지 공사를 잠깐 멈춰야겠지?"
아무리 스톨 백작의 아들이라도 왕도에서 보낸 감찰관이라면 마나 스팟을 가만히 내버려 두진 않을 것.
다행히 아직 삽질만 조금 했을 뿐,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었기에 숨기기에 어렵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열심히 삽질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하아- 다들 멈춰! 연구단지의 공사는 잠시 뒤로 미룬다."
"······"
"응?"
그런데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기사들의 손이 멈춰 있었다.
오직 단 한 사람 볼튼만 멈추지 않고 삽질하고 있었다.
"뭐야? 다들 왜 그래?"
"여, 영주님."
"응? 볼튼은 왜 혼자 삽질을··· 저게 뭐야?"
양손의 그립을 확실하게 쥐고 무릎에서 허리, 어깨 그리고 팔로 이어지는 스윙이 아름다운,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삽질이었다.
그런 볼튼의 삽질을 보는 내 고개가 저절로 기울어졌다.
볼튼의 삽이 파랗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연구단지의 공사는 잠시 중지야."
"영주님! 저희에게도 깨달음의 기회를 주십시오."
"왕도의 감찰관이 돌아가면 그때는 너희들끼리 다 갈아엎어도 되니까 잠시만 참으라고."
"그럼 감찰관이 오기 전까지만이라도 삽질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친위대 기사들의 거듭되는 요청에 나는 알아서 하라고 손을 휘휘 저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저마다 삽을 하나씩 들고 달려나가는 기사들의 모습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허- 어떻게 삽질을 하다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쑥스러운 듯 말하는 볼튼을 보니 다시 한번 어이가 없었다.
삽질하다가 소드마스터가 되었다고 하면 누가 믿어줄까?
아마 다른 기사들에게 말한다면 기사를 모욕하지 말라고 결투를 신청할지도 몰랐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꺼야?"
"무엇을 말입니까?"
"볼튼경은 이제 소드마스터잖아?
소드마스터라는 경지에 오른 기사를 일개 영주의 호위 기사로 삼을 수는 없잖아."
국왕의 호위 기사도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는데 일개 영주의, 그것도 가장 변방 영주의 호위 기사가 소드마스터라니. 권위적인 국왕과 중앙의 권력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왕국에 소드마스터라는 걸 증명하기만 해도 백작의 작위를 하사받는다며?
이제 볼튼은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변경백이라지만 내 작위도 백작에 불과한데 당장 백작위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을 호위 기사로 붙잡아 두는 것도 이상했다.
볼튼을 위해서도 내 호위 기사로 있는 것보다는 더 넓은 곳으로 보내주는 게 맞는 것이다.
"어차피 왕도에서 감찰관이 온다고 하니까 그들과 함께 왕도에 가서 왕국에 인정을 받는 게 좋겠지.
혹시라도 영지를 하사받게 되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도와줄게."
"······"
내 말에 볼튼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했는지 나에게 말했다.
"언젠가 영주님께 제가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저는 영주님을 모시기 위해 태어났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영주님을 따르겠다고요."
"그거야···"
"아직 그 마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볼튼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무릎을 굽혔다.
"저는 그때 영주님께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제 충성의 대상은 베르겐 왕국도 국왕 폐하도 아닌 오직 데우스 아렌달이십니다."
"하-"
볼튼의 충성맹세에 한숨이 나왔다.
볼튼이 떠나지 않는다는 말에 안타까움과 미안함, 그리고 안도감이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