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추수가 끝나고 겨울이 시작될 때쯤 체스터 남작을 비롯한 아렌달에 투자를 약속한 귀족들이 영지를 찾아왔다.
"어서 오세요. 체스터 남작."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렌달 백작님.
제가 조금 늦었군요."
"큰 투자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 당연하지요. 조금도 늦지 않으셨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말에 체스터 남작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향에 손을 벌렸던 체스터 남작은 투자한 귀족 중에서는 늦은 편에 속했다.
그래서 혹시 바깥 영토의 권리를 받지 못할까 걱정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체스터 남작은 무려 10만 셀링을 투자하기로 한 큰손. 그런 큰손에게 잠깐 기다려주는 정도는 어렵지 않은 것이다.
"체스터 남작만 괜찮으시다면 내일 바로 바깥으로 출발할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기다리는 분들도 계시니 너무 제 편의를 봐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투자자들을 태운 마차가 바깥으로 나왔다. 지금까지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미지의 땅에 투자자들은 걱정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기대감이 훨씬 컸는지 영지의 경계를 지나자마자 연신 눈동자를 굴렸다.
"저기 초지를 보십시오. 어떤 작물을 심어도 잘 자랄 것 같군요.
아니면 목축을 하기에도 좋아 보입니다."
"제 고향인 체스터 영지와 비교해도 크기나 비옥함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땅입니다."
"이렇게 넓은 땅에 주인이 아무도 없다니···"
'주인이 왜 없어? 내가 있는데.'
"그래도 저는 직접 보고 나니 투자한 게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네. 이렇게 비옥한 땅을 가질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군."
광활한 영토에 만족하는 투자자들을 보니 나 역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바깥 영토를 직접 봤으니, 이들이 돌아가 조금만 떠들어줘도 투자하는 귀족들은 더 늘어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었던 것보다 몬스터가 안 보이는군요?
바깥은 조금만 가도 몬스터가 끝없이 나타난다고 들었는데.
특히 지금 같은 계절에는 먹을 것이 부족해 더욱 심하다고···"
"몬스터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설마 바깥 개발을 하겠다고 나서면서 몬스터에 대한 대책 하나 강구 하지 않았겠습니까?"
투자에 망설이던 부분 중 한 부분이 몬스터 때문이었는데, 몬스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확언하자 투자자들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나는 투자자들에게 충분히 바깥의 영토를 보여줬기에 마차를 돌리기로 했다.
"그럼 이만 돌아갈까요?"
"벌써요?"
"어차피 바다까지 가지 않는 이상, 더 들어가 봐야 계속 똑같은 그림만 나올 뿐입니다."
내 말에 아쉬워하는 투자자들이 몇 있었지만, 굳이 이들을 바다까지 데려갈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곳까지 들어가면 어쩔 수 없이 아렌달의 군사력을 보여줘야 했기에 여기서 멈추는 게 좋았다.
"지금처럼 울퉁불퉁 불편한 길로 바깥으로 가다가는 많이 힘드실 겁니다.
다음에 아렌달을 찾으실 때는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도로를 만들어 놓을 테니, 다음을 위해 즐거움을 남겨 놓도록 하죠."
"음- 아렌달 백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너무 한 번에 즐기는 것보다 다음을 위해 조금 남겨 놓는 게 좋겠죠."
체스터 남작의 말에 다른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렌달을 떠나는 투자자들을 보며 리오에게 말했다.
"공사 자재는 바깥으로 잘 보내주고 있는 거지?"
"예. 대장간에서도 영주님께서 지시하신 빔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랄프나 상단들을 통해 철의 수급도 매끄럽게 이루어지고 있으니 바깥 공사에도 차질은 없을 겁니다."
전화기가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공사가 잘 진행되는지 물어봤을 것이다.
"공사 자재를 들여오는 데 셀링을 아끼지 마. 특히 빔을 만들면서 철이 더욱 많이 필요할 테니까 절대 끊기는 일 없도록."
앞으로 투자 의향을 전하는 귀족들은 더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셀링을 아낄 필요는 없었다.
주요한 보고를 마치자 리오가 상자 하나를 내게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울드 상단에서 영주님께 선물을 하나 놓고 갔었습니다.
아이스크림에 감명받았는지 울드 상단주가 영주님께 드리고 싶다고 중앙대륙의 디저트를 보냈습니다."
"중앙대륙의 디저트?"
중앙대륙.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는 단어였다.
베르겐 왕국은 동대륙에서도 동쪽에 있는 나라. 그리고 아렌달은 그 베르겐 왕국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영지였다. 그러니 중앙대륙의 문물이 아렌달로 오는 경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울드 상단이 외국의 상품들을 취급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내 손까지 올 리가 없었을 물건이었다.
"중앙대륙에서 온 물건이라니. 귀한 선물을 가져왔네."
흥겨운 기분으로 상자를 열자 까맣고 네모난 블럭이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외형의 까만 블럭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초코···"
"카카와틀이라는 건데 뜨거운 물에 녹여서 마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번 드셔보시겠습니까?"
리오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맛은 알고 있었으니까 굳이 먹어볼 필요는 없었다.
"나 초콜릿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겨울이 지나고 새로운 봄이 찾아왔다.
새해를 뉴렌달-바깥에 만들고 있는 도시-에서 시작할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아렌달에서 새해를 시작하게 되었다.
대신 아렌달에 있으면서 새로운 상품 연구를 돕거나 마법사들의 연구에 현대 지식으로 여러 가지 팁을 주면서 알차게 겨울을 보냈다.
본격적으로 투자금이 들어오면서 여유가 생겼다고 해도, 아직은 뉴렌달 공사에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기에 다른 수입원이 필요했다.
다행히 아렌달 밖으로 나가는 상품들은 호미나 아이스크림처럼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어서 안정적인 수입원이 되어주고 있었다.
"영주님. 이번 여름까지 나머지 1천 명이 더 아렌달로 들어올 겁니다."
"이주민들은 들어오는 대로 구분해서 공사에 투입 가능한 젊은이들은 뉴렌달 공사에 투입 시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국왕에게 양도받기로 한 백성들도 속속들이 아렌달로 유입되면서 어느새 아렌달의 인구도 5천 명을 훌쩍 넘어섰다.
그리고 일터를 찾아 스스로 아렌달로 오는 사람들도 있어서 아렌달의 인구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래 봐야 아직은 소규모 영지 수준에 불과했지만, 실제 인구수만 적을 뿐 아렌달은 오가는 상단들로 인해 다른 소규모 영지보다는 훨씬 북적이는 영지가 되었다.
"이번에 새로 지점을 들이고 싶다는 상단들은 입찰을 받아서 지점을 내주도록 해.
지난해까지야 아렌달에 상단을 유치하기 위해 그냥 자리를 풀어줬다고 해도, 올해부터는 그럴 필요 없잖아?"
아렌달은 지금 상단들에게 기회의 땅이 되어 있었다.
아렌달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리비아 상단과 울드 상단은 엄청나게 몸집을 불리는 모습에 보며 다른 상단들 역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리비아 상단이 철광석과 원목 등 공사 자재를 아렌달에 공급하면서 큰 이득을 보는 모습에 상단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공사 자재들을 가지고 아렌달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가격 경쟁이 붙으며 싸고 좋은 재료들을 많이 공급받았고, 아렌달의 상업 역시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럼 오늘은 이걸로 끝인가?
"네. 끝입니다."
리오의 대답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영주님?"
"바람이나 쐬러 나갈까 하는데."
"오늘 손님이 오시는 건 기억하고 계시죠?"
"손님? 누가 오기로 했던가?"
내 물음에 볼튼이 씨익 웃었다.
"아침에 스톨 영지에서 손님이 오시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
심심하면 오는 샤를로트를 손님이라고 맞아 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백작님. 그거 아세요?"
"주어를 생략하고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겠니?"
내 말에 샤를로트가 냉장고를 뒤져 민트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가지고 온 작은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아이스크림 위에 뿌렸다.
"이렇게 섞어서 먹으면 엄청 맛있어요."
"민트초코··· 도대체 그걸 누가···"
"얼마 전 왕도에서 초코릿을 먹다가 아이스크림이 생각나서 같이 먹어봤는데 되게 상쾌하고 맛있더라고요."
"네가 생각한 거야?"
"네. 다른 귀족 영애들에게 소개해줬는데 다들 좋아했어요.
근데 왜 그러세요?"
어떻게 민트초코를 만들 생각을 했는지 놀라웠다.
깜짝 놀라서 말까지 잊은 나에게 샤를로트는 스스로 만든 민트초코를 맛보라고 건네주려 했다.
나는 그 모습에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이야기의 화제를 돌렸다.
"아- 냉장고는 스톨 영지에 잘 도착했나?"
"네. 도착했어요. 미리 말씀도 안 하시고 냉장고를 보내셔서 놀랐다고요!"
"잘 도착했다니 다행이네."
얼마 전부터 냉장고를 비롯한 마법 용품들을 팔기로 했다. 다른 영지나 마법사들이 복제하지 못하도록 확실한 보안 마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셀링을 받지 않고 먼저 상품을 줘도 괜찮은 건가요?"
"괜찮아. 그건 선물이니까."
"네?! 선물이요? 그거 1만 셀링짜리라고 하셨잖아요?"
샤를로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샤를로트는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렇게 대놓고 선물을 보내면··· 조금 부끄러운데···"
"스톨 영지는 투자도 크게 해주고 영지 공사에 인력도 파견해주었으니까.
그리고 스톨 백작님은 인맥도 넓으니까 다른 귀족들에게 냉장고를 소개해줄 수도 있잖아?
여러모로 생각해 봤을 때 스톨 백작님에게는 냉장고를 선물해도 아깝지 않지."
"······잠깐만요. 그 냉장고 저한테 보내신 게 아니라 아버지한테 보내신 거예요?"
"당연한 거 아니야?"
내 말에 귀가 빨개진 샤를로트가 나를 노려봤다.
"···왜?"
"몰라요!"
소리를 빽 지른 샤를로트는 잔뜩 화가 났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귀는 여전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이스크림은 연거푸 두 개 나 먹고 나서야 화가 풀렸는지 샤를로트가 나에게 말했다.
"바다는 어떻게 생겼어요?"
"파래. 그냥 시야 끝까지 파랑의 연속이야."
"처음 바다를 보면 엄청나게 감동받는다는 데, 진짜로 그래요?"
샤를로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에 대한 기억이 있는 나도 처음 뉴렌달의 바다를 마주했을 때 벅차오름을 느꼈다.
그리고 실제로 뉴렌달 공사를 위해 간 사람 중 많은 사람이 눈물을 훔치기도 했었다.
"나도 보고 싶다."
"나중에 뉴렌달의 공사가 끝나면 한번 가보면 되잖아?"
"백작님이 그 전에 한 번만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그건 곤란한데?"
"정말 안 돼요?"
"응."
"칫-"
내 대답에 혀를 차는 샤를로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솔직히 말해서 나와 함께 간다면 영지군의 보호를 받아 뉴렌달까지 가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샤를로트를 뉴렌달로 데려간 이후에는 문제가 생긴다. 아직은 샤를로트가 머물 공간을 만들어 주기에도 애매했고, 또 샤를로트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인력의 공백이 생기는 것도 불편했다.
그리고 내가 뉴렌달로 가게 되면 한동안은 그곳에서 있을 텐데 샤를로트마저 그 시간동안 뉴렌달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당연히 샤를로트를 스톨 영지로 돌려보내기 위한 움직임도 불필요한 소모 값이었다.
"앞으로 한 1년? 그 정도면 뉴렌달의 기초 공사가 끝날 거야. 그때 스톨 백작님이랑 같이 가는 게 어때?"
"지금 당장 보고 싶었는데."
"굳이 지금 당장 봐야 할 필요는 없잖아?"
"감동이 필요해요."
"감동?"
"네. 좋은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감동을 충전해야 하거든요."